나는 엑스트라였다. 주인공인 줄 착각하며 산 일생 엑스트라. 그런데 이건 누구의 일생일까.
누구의 일생인지도 모르는 껍데기를 살아왔다는 걸 알면서도, 일생을 포기하지 못하고 두드릴 수밖에는 없는 사람처럼, 그 두드림을 멈춘다면 일생이 곧 무너질 사람처럼, 그리하여 두드림만을 위해 일생을 살아온 사람처럼 나는 두드렸다. 어떻게 두드려야 하는지, 두드리면 열리는지, 이게 문이 맞긴 한지도 몰랐지만, 문을 생각하다 보면 문이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믿으면서 두드렸다. - P15

오직 꿈꾸는 자에게만 보이는 것이 있다. 오직 한 번은 죽어본 자에게만 보이는 것이 있다. 그것을 단순히 고통이라고만 명명할 수는 없으리라. 왜냐하면 죽음으로 죽지 않고 죽음으로 살고 있는 한 그 경험은 고통을 초과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수난(passion)의 다른 이름은 열정이며, 여자는 사랑의 불가능에 온 생을 봉헌하여 기꺼이 수난에 처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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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까지는 행복하다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채 살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몹시 놀랐다고 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제들도, 아내, 아들들도 주지 못했던 행복감을 20밀리그램이 정량인 캡슐 속 가루약이 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소름과 함께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공포감이 밀려든다고. - P45

영원성을 추구하는 것은, 유한한 인간의 본능이 아닐까. 무한한 존재가 되고자하는 욕심이. - P101

오래오래 살겠다고 다짐하는 한 어머니를 보았다. 죽은 자식을 오래오래 기억해 주기 위해서 자신이 죽으면, 죽은 자식을 기억해 줄 이가 아무도 없을 것 같아서.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죽은 자식이 너무 불쌍하고 안쓰러워서..

L의 운동화를 복원하는 것은 애도의 한 행위이기도 할 것이다. - P104

미학 강의 시간에 아름다움에 대하여 이야기하던 그와 짐승의 뼈다귀를 뜯는 그가 동일인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둘 사이의 괴리가 너무 커서 그녀는 분노마저 일어났고, 그날 이후 미학 강의를 들을 수 없었다. - P115

모두를 위해서라는 말이 나는 여전히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그 말이 내게는 폭력적인 그 어떤 말로 들려요. - P117

절박한 개들 속에서 보다 어린 개, 보다 건강해 보이는 개, 보다 영리해 보이는 개, 보다 마음을 끄는 개를 고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란다고 했던가. - P123

종류별로 사는 것이 내게는 여전히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늘 가던 식당만 가고, 늘 시키는 메뉴만 시키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매번 어려워요. 한 종류로만 사고 싶은 충동과 싸워야 하니까요. 어째서 한 종류로만 사면 안 되는지 여동생에게 묻고 싶었지만, 여태까지 묻지 못했어요.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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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은 여자들이 있다. 말함으로써 멀어지고싶지 않은 여자들, 사물을 비껴 나가는 말로 말하고 싶지 않은 여자들이 있다. 말의 발걸음이 내는 소음은 사물들의 맥박을 뒤덮어 가려 버리기에, 나는 사물 위로 떨어져 내려 그 미세한 떨림을 얼어붙게 하는, 음조를 어긋나게 하는, 먹먹하게 만드는 말로 그 여자들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다. 나는 말이 그녀들의 목소리 위로 떨어져 나리는 것이 두렵다. 어느 한 목소리를 열렬히 사랑할 수 있는 나. 나는 여자다. 목소리의 사랑. 베일에 가려진 채 나의 피를 깨우러 오는 깊고도 조심스러운 목소리의 친근한 손길만큼 강력한 것은 없다.
목소리는 갓 태어난 심장이 만나는 최초의 빛줄기다. 내 심장이 속한 곳은 목소리이며, 그것은 무한히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곁에 있어 주는 찬란한 어둠으로 빚어진다.
내게는 차마 소음을 일으키며 흘러나오는 말에 기대 입 밖에 내어 말할 수 없는 여자들이 있다. 그녀들의 목소리가 지닌 무한한 섬세함을 사랑해서다. 섬세한 곁에 있음을 존경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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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은 것을 쓰지 말자, 공연히 멋을 부리며 내가 경험하지도 않은 것들을 쓰지 말자, 화려한 문장이나 상상력에 의존해 쓰지말자, 내가 모르는 것 또한 절대로 쓰지 말자. 내 가슴으로 느낀 것,
내 눈으로 본 것, 내 머리로 생각한 것들을 담담하게 쓰자, 라고 결심한 채 한 편, 두 편 이야기를 써 나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나는 내 존재의 비루함과 나약함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요가와 글쓰기를 끝내 놓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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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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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지 않은 시간에 읽었던 작품도 있었지만, 어쩌면 다시 읽은 이제서야 이해하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 아껴가며 천천히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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