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들의 배 - 어리석은 삶을 항해하는 인간 군상에 대한 통렬한 풍자
제바스티안 브란트 지음, 팀 구텐베르크 옮김 / 구텐베르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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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여기 바보들을 가득 태운 배가 있다. 하나 둘 태우다 보니 60명의 바보들. 만선인 탓에 나중에 타는 이들은 배 꼭대기, 돛대 위로 올라가는 수밖에 없다. 누군가 제멋대로인 이 바보들을 한 명 한 명 자세히 관찰하고는, 풍자하고 비꼬는 글을 남겼다.


15세기 말, 독일 인문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문인인 '제바스티안 브란트'는 탐욕적이고 어리석고 타락한 60가지 바보들의 천태만상을 한 책에 실었다. 그가 펴낸 <바보들의 배>는 중세 말기의 최대 걸작이자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 베스트셀러에 등극하여 현재까지 이어졌다.



처음 등장하는 바보는 책을 수집하고 서가에 모셔놓기만 할 뿐, 실제로 읽지 않는 이들이다. 그들은 구들장이 무너질 정도로 수천 권이 넘는 장서를 보유하고 있지만, 남들에게 자랑하려는 과시 목적일 뿐 자신의 지식을 불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초반의 이 대목부터 서가의 책에 포위된 난 가슴 찔리고, 허영과 과시욕에 물든 바보로구나 자각하고 반성하게 한다. 차례로 아끼지 않고 낭비하고 외양만 치장하는 바보, 배우고 참회하지 않고 노욕, 자만에 찌든 늙은이, 참된 우정과 친교를 스스로 끊어내는 바보, 육욕과 쾌락에 중독된 자들, 충분한 대비 없이 대규모 건축을 시작하는 바보, 순간의 행운에 취해 영원한 불행을 부르는 자, 남을 함부로 재단하고 판단하는 자 등이 저자의 도마에 올라 고발 당하고 꾸지람을 받는다.


그 외에도 34번째 바보로 지목된 어리석은 방랑자는 의미심장하다. 온갖 지혜가 집 안에 혹은 곁에 있음에도 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멀리 이국을 떠돌며 헛된 경험을 쌓고, 아까운 시간과 젊음을 낭비하는 이들을 비판한다.

과거에도 이런 이들이 존재했나 보다. 단지 새로워 보이는 것, 허나 그 속을 캐보면 하찮고 어리석은 것들에 혹하여 국경을 넘어 머나먼 이국을 떠도는 이들. 그들은 막대한 자금과 시간을 쏟아부어 많은 나라를 여행하지만, 아무런 지식이나 자기 발전을 위한 습득물 없이 빈손으로 더 어리석은 상태로 집에 돌아온다. 자신의 집에서 혹은 가까이에서 바로 앞에 흘러든 지혜의 강물을 외면하는 자는 멀리 낯선 땅에 놓여서도 똑같이 무지하고 어리석은 습관, 행동을 반복할 뿐이다. 단지 여권 스탬프를 늘리고 여유 자금을 소진하고, 천금 같은 시간을 낭비하는 장거리 이동 행위를 반복할 필요가 있을까? 진실로 참된 삶의 지혜와 덕은 자신의 가까이, 일상 속에 숨어있는 법이다.



희부연 안개를 헤치고 바보들이 탄 배가 기우뚱대며 바다를 향해 나아간다. 그들은 어디로 나아가는 지도 모르고 선두에 서서는 술을 마시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피우고 있다. 누군가는 싸움을 부추기려 험담을 하고, 분노와 시기심, 질투를 못 이겨 주먹다짐을 벌이는 이들은 배의 앞길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어디선가 태풍이 밀려오거나 혹등고래와 마주치거나, 해적선이 기습이라도 한다면 이들은 속수무책으로 바다에 뛰어드는 신세가 될 것이다.



15세기에 펴낸 '우인 풍자문학'이지만 지금 시대에 더 큰 울림과 깨달음을 주는 책, <바보들의 배>.

저자 '제바스티안 브란트'가 풍자하고 꼬집는 60 명의 바보들이 '나 자신' 이 되지 않도록 항상 되돌아 보고, 어제보다 나은 삶을 견지한다면.. 위태롭게 표류 중인 '바보들의 배'에 탑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구텐베르크 출판사, 제바스티안 브란트 <바보들의 배>는 보다 지혜롭고 올바른 삶의 방향을 잡기 위한 나침반, 평생 지침서로 쓰이기에 충분하다.





#서평단 #도서제공협찬 #제바스티안브란트 #구텐베르크 #바보들의배 #신간추천리뷰 #우인문학 #돈키호테 #고전베스트셀러 #인생지침서 #인생나침반 #풍자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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왝왝이가 그곳에 있었다 - 제15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75
이로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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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잊히기를 바랐나. 스스로 잊기를 바랐나. 그곳의 아이들은 잊히기를 바랐던 아이들일까, 아니면 잊고 싶은 게 있었던 아이들일까. 나는 잊히고 싶지도, 잊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돌아왔다. 왝왝이의 세계에 남을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않기로 했다."_120p



아빠 몰래 학원을 그만둔 연서. 우산 없이 비 오는 거리를 헤매고, 아빠는 연서가 먹는 우울증 약을 숨기기에 바쁘다. 어느 날 테니스 코트 옆 하수구 근처를 걷다가 "왝왝!" 소리에 가까이 다가가는데.. 개구리나 맹꽁이인 줄 알았던 그녀가 플래시를 비추자, 수면 위에 뜬 사람의 두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발견한다.


연서는 두려움을 떨치고 하수구 아래로 내려간다. 구불한 하수도를 지나 투명한 막을 뚫고 들어가면 공기가 달라지고, 그 소년이 머무는 기묘한 세계가 펼쳐진다. 연서는 지상 어디선가 마주친 듯한 소년의 이름을 '왝왝이'라 부르고,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끔찍한 버스 사고를 겪은 연서는 현장에서 친구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하고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참사의 자세한 정황은 묘사되지 않고 단편적인 피해 상황 만이 소환된다. 그녀는 참사의 후유증, 충격으로 인해 그날의 기억, 동승했던 탑승자의 이름 등을 떠올리지 못한다. 사고 이후 학생회는 희생자를 기리고 피해자를 위로하기 위해 '추모제'를 기획하지만, 이런저런 잡음에 시달리며 행사 준비는 난항에 부딪힌다.


연서는 마음이 혼란스럽고 어지러울 때마다 '왝왝이'가 기다리는 하수구 아래 세계를 찾는다. 그곳에는 지상의 괴로운 기억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망각의 시간으로 유도하는 열매가 존재했다. 일종의 보호소, 대피처, 은신처라고나 할까. 왝왝이가 금단의 열매를 먹은 만큼 그의 존재는 지상에서 잊히고, 그 또한 지상에서의 기억을 소멸시켜 가는데..


연서는 자신과 뜻이 맞는 혜민, 효정과 함께 왝왝이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하수구 안을 헤맨다. 와중에 그녀가 아끼던 길고양이 '옥이'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존재들에게 이름을 붙이고 자주 호명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행위인지를 깨닫는다.


연서와 친구들이 '왝왝이'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마음속 깊은 어둠과 상처를 마주하고 보듬어 주면서, 그가 금단의 분홍 열매가 아닌 자신들과 눈을 맞추고 대화하며 지상에서의 소중한 기억들을 떠올리기 시작했을 때..


연서는 교실의 빈 책상, 책상 위 새겨진 비뚤배뚤한 낙서. 그 책상에 자리했던 누군가의 존재를 수면 위로 떠올리면서.. 비로소 '왝왝이'가 누구였는지를, 그의 이름 석 자를 트라우마와 망각의 수렁에서 건져낸다.



제15회 문학동네 청소년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이로아 작가' 장편소설 <왝왝이가 그곳에 있었다>.

참사 이후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당시 기억을 상실한 연서가 하수구 속 지하세계에서 비슷한 사연을 지닌 왝왝이와 교류하며 충격에서 벗어나 '진정한 나'를 찾는다는 이야기. 결국 연서와 왝왝이는 서로가 거울을 바라보는 것처럼 닮은 꼴이고 유사한 존재이다. 마음을 담아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고 희망적인 기억을 떠올릴수록, 흐트러진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것처럼 자의적인 도피, 무심한 타의에 의해 소거된 존재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음침한 하수구에 침잠하고 은둔했던 왝왝이가 친구들에 의해 이름을 찾고 호명되며 관련 기억이 재생될 때, 그는 중독적인 금단의 열매를 끊고 나와 지상의 밝은 빛을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눈빛을 교환하며 각자의 이름을 불러주는 한, 세상은 그들을 기억할 것이고 그들 또한 당당히 자신을 세상 밖에 내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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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천대루
천쉐 지음, 허유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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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을 대표하는 중견 작가, 30년간 쉼 없이 작품을 출간한 '천쉐 작가'의 <마천대루>가 국내 출간되었다.

2015년 초판 출간되었고, 저자의 소설 작품으로는 국내 첫 출간이라고 한다.


전 세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안젤라 베이비 주연의 총 16부작 드라마 <마천대루>의 동명 원작이다.


서문에는 폐허가 된 몇몇 마천루의 날 풍경이 자세히 묘사된다. 박살 난 유리, 시멘트 등 온갖 폐기물이 산적한 중정과 슬럼가로 쇠락한 고층 건물의 스산한 풍경. 부랑자에 노숙자, 마약 중독자, 범죄인 등이 은거하는 빌딩은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머물고 나가면서 끊임없이 생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높이 150미터, 지상 45층. 하늘을 찌를 것만 같은 고층 아파트 '마천대루'에 거주하는 다양한 인물들이 차례로 소개된다. 교통사고를 낸 죄책감에 유가족을 돕느라 경비원 직에 종사하는 '셰바오뤄'. 이리저리 남자들의 손에 이끌려 방랑하는 어머니와 계부에게 학대받다가 가출하여 카페 매니저를 하는 '중메이바오'. 부동산 중개인으로 마천대루의 공실에서 다른 여성들과 밀회를 즐기는 '린멍위'. 메이바오의 과거를 알고 있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린다 썬'. 온실 속 화초처럼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린다 썬의 아내 '리모리'. 광장 공포증이 심해져 두문불출하다가 전업으로 웹 소설을 쓰는 '우밍웨'까지..



하늘에 닿을 것만 같은 현대판 바벨탑, 마천대루에는 제각기 사연과 욕망을 지닌 인간 군상들이 한데 어울리고 충돌하며 지내고 있다. 어느 날 빼어난 외모와 상냥한 성격으로 다른 지역에까지 이름이 알려진 중메이바오가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형사들은 피해자 주변에 얽힌 인간관계와 거주민들의 알리바이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마천대루 층층칸칸 덮인 추악한 비밀이 드러나고, 동시에 중메이바오를 감싸고 보호하기 위한 온정도 존재했음을 깨닫게 된다. 서로에게 표정 없이 무관심한 듯하지만 미로처럼 뻗은 환기구를 통해 관음증 어린 시선이 번득이기도 한다. 중메이바오의 약점을 쥐고서 그녀의 뒤를 쫓는 계부 '융위안' 그녀가 물심양면 지원하는 허약하지만, 예술적 재능이 넘치는 미소년 동생 '옌쥔'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마천대루에 숨어들어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지우고 새 출발을 시도했던 중메이바오. 그녀의 비통하고 안타까운 죽음은 소설의 마지막, 마천대루의 일상을 담담히 묘사함으로써 그 비극성이 극대화된다. 마녀사냥하듯 그녀를 추적하고 악인을 동정하며 상품화하던 미디어는 어느새 태도가 돌변하여 잠잠해진다.


수많은 이들의 생사가 갈리고, 무수한 만남과 사랑, 이별이 이어지는 가운데.. 그들을 품은 '마천대루'는 여전히 비밀을 간직한 채 우뚝 서 있다. 스러지는 이들을 위한 묵시록이자 묘비로 남은 거대한 마천루.


누군가의 길지 않은 생애, 비극적인 죽음이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 때로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일 수도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이 소설은 쓰였다. 드라마를 통해 드러나지 않은, 텍스트를 접해야만 알 수 있는 디테일한 속 이야기를 접하고 싶다면.. 인플루엔셜, 천쉐 작가 소설 <마천대루> 읽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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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자은, 불꽃을 쫓다 설자은 시리즈 2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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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교사 안은영>, <피프티 피플> 정세랑 작가의 통일신라 여성 탐정 '설자은' 시리즈가 2권으로 돌아왔다.

<설자은, 불꽃을 쫓다>는 당나라 유학파 출신 통일 신라의 남장 탐정 설자은이 금성에서 발생한 연쇄 살인/방화 사건을 추적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시리즈 전작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에서 죽은 오빠를 대신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설자은은 금성으로 돌아와 백제 장인 목인곤을 식객으로 들여 함께 사건을 해결했어요. 결국 하늘 같은 왕의 눈에 띄어 집사부의 대사로 임명되었지요.


7세기 통일 신라는 번성했지만, 수도 금성은 구려인, 백제인, 말갈인 등 여러 민족들이 뒤섞인 혼란의 도가니였어요. 오늘도 금성의 번화가에서 불길이 치솟고, 잿더미 속에서 몇 구의 시신을 발견했어요. 문제는 불탄 시신들이 고문 당한 흔적이 있거나, 이미 목이 베인 살해 흔적이 역력하다는 것. 

몇 차례의 연쇄 살인/방화 사건이 터지면서 신문왕은 대사 설자은을 불러 상황을 묻고 어렴풋한 힌트를 주기도 해요. 통수가 뾰족한 말갈인들의 시신, 자금서당, 흑금서당, 청금서당의 대립과 반목은 방화 사건과 어떤 관련이 있을지.. 설자은은 목인곤, 남동생 호은, 여동생 도은, 진골 여성 산아 등 동료들과 합심하여 미스터리한 사건을 해결해 나갑니다.



"지귀는 올 것이다. 얼룩져 부패해가는 금성을 처음으로 돌리기 위해서, 훨훨 날아올 것이다!"



혼탁해진 금성을 정화하기 위해 불귀신 지귀가 내려올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도는 가운데, 설자은은 과연 사건을 해결하고, 왕의 근심을 덜어줄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이후 벌어지는 사건들도 흥미진진해요. '탑돌이'를 하던 도은에게 전해진 설자은의 납치 소식. 왕명으로 다섯 작은 수도, 오소경으로 떠난 이들의 재물 갈취 사건까지.. 


베일에 싸인 사건들을 해결하면서 설자은은 왕이 내린 흰 매가 새겨진 칼을 휘둘러 악한 기운을 내쫓고, 악인을 베어버릴 수 있을까요? 그 와중에 설자은 만이 품고 있는 사려 깊은 마음으로 무고한 이들을 구할 수 있을지도 기대됩니다.


설자은 시리즈는 후속편 <설자은, 호랑이 등에 올라타다>가 이어 출간될 예정이에요. 통일신라 천년 수도 금성에서 펼쳐지는, 매력 넘치는 캐릭터 설자은과 동료들이 활약하는 미스터리 사건 해결 모험기. 잔인 무도한 악의를 퇴치하고 정의를 되찾는 그녀의 맹활약에 응원을 보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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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신화 千년의 우리소설 14
김시습 지음, 박희병.정길수 옮김 / 돌베개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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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후 8개월에 글을 깨우치고, 만 3세에 시를 짓던 천재 아이. 허나 조선의 과거 시험을 준비하던 21세 청년은 수양 대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소장한 책을 모두 불사르고 측간에 빠져 미친 척을 했다. 머리를 깎고 '설잠'이라는 법명으로 십 년 가까이 전국을 유랑하다가 경주 금오산에 정착하여 소설집을 남겼으니.. 그의 이름 김시습, 저작은 <금오신화>이다.


돌베개 '천 년의 우리 소설' 시리즈 14권으로 <금오신화>를 새로 펴냈다. 원문을 왜곡하지 않고 충실한 번역을 위해 정본을 엄선하여 이를 바탕으로 번역했다. 현대인이 흥미를 잃지 않고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도록 고루한 문체를 지양했고, 풍부한 해제를 통해 이해를 도왔다.


최초의 한문 소설로 알려진 <금오신화>. 책에 따르면 사실 최초의 창작 소설은 최치원이 지은 <호원(김현감호)>이라고 한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일부 단락만 학습하고, 어언 30년이 흐른 후에야 완독하게 되었다.



남원에 '양생'이란 자가 이성을 애타도록 찾다가 밤에 등불로 점을 치고, 부처님과 저포(윷놀이) 내기까지 하며 한 여인을 쟁취했으니.. 첫 단편 <만복사저포기>부터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억울한 죽음으로 한 맺힌 여인을 만나 정을 통하고 이별을 하는 기담이 펼쳐진다. 시를 읊으며 사랑을 나누던 남녀가 선녀, 신선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취유부벽정기>를 지나면 '박생'이란 자가 염라왕과 만나 귀신과 도깨비의 섭리에 대해 거침없이 진담을 주고받는다.



<남염부주지>에서 주지할 부분을 인용한다.

"나라를 가진 자는 폭력으로 백성을 위협해서는 안 되오. 백성이 비록 두려워해 명령에 따르는 듯 보이지만 속으로는 반역할 마음을 품어 시간이 흐르면 결국 큰 재앙이 일어날 것이오. 덕 있는 자는 힘으로 군주의 자리에 나아가지 않소. 하늘이 비록 자상한 말로 사람을 깨우치지는 않지만 시종일관 일을 통해 보여 주거늘. 이를 보면 하늘의 명이 엄하다는 걸 알 수 있소. 무릇 나라는 백성이요, 명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오. 천명이 임금에게서 떠나고 민심이 임금에게서 떠나간다면 비록 몸을 보전하고자 한들 어찌 보존할 수 있겠소?"



김시습은 당시 집권했던 세조에게 이 말을 작정하고 진언하고 싶었으리라. 자신의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은 사육신을 비롯한 수많은 원혼들의 아우성이 하늘을 찔렀으니, 세조의 말년은 평탄치 않았다.


김시습이 염라왕을 통해 모든 군주에게 전한 진언은 600여 년이 지나, 수 세대의 역사를 관통하여 현시대에도 명심하고 가슴에 새겨야 할 고견으로 통한다. 무릇 나라는 민초들이 근본이 되어야 하는 세상이니, 이는 곧 대다수 민중의 뜻이 하늘의 명과 같다는 의미이거늘. 군주는 덕으로 하늘을 섬기고 지상에 발붙인 민초들을 달래어 한마음, 한뜻으로 나아가야 자리를 온전히 보존할 수 있도다. 한국의 보수 우파, 군사독재 대통령 대부분은 어찌 이를 망각하여 스스로 위기를 자초하고 자리를 보전치 못하는 비극을 초래하는 경우가 한둘이 아니니..


스스로 골방에 갇혀 쇠고랑을 차고앉은, 작금의 저 군주도 예외는 아니더라.




"폭군의 노여움을 받아

나뒹구는 사육신의 시신들 수습하고

경주 금오산에 은거하여

뜨락에 홀로 버티고 선 소나무 바라본다

등불 켜고 긴 밤을 향 사르고 앉아

한가로이 세상 진귀하고 풍류 넘치는 이야기와

시심 가득한 세계를 자아내니

굽이돌아 흐르고 흘러 여기 다다랐네"_153p, 갑집 뒤에 쓰다




김시습의 <금오신화>는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더불어 그가 전하는 덕치주의, 민본위/천명 사상은 이 땅에서 다스리는 자가 태평성대를 위해 갖춰야 할 필수 덕목이라 할 수 있겠다. 빠른 시일 내에 덕으로 민심을 헤아리고, 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않은 리더가 등장하여 혼란한 시국을 안정시켰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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