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개의 이름은 아무도 모른다
가에쓰 히로시 지음, 염은주 옮김, 기타무라 다이이치 감수 / 북멘토(도서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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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2월 남극,

일본 남극 관측대 쇼와 기지 근처에서

가라후토견 한 마리의 사체가 발견되었다.

이 일은 일반인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_ 책 서두에서..



1911년 겨울, 노르웨이의 탐험가 로알 아문센이 그린란드 썰매 견을 끌고 남극점을 정복할 거라 하자, 경쟁자 영국의 해군 대령 로버트 스콧은 이 결정을 비웃었다. 스콧은 스노모빌과 조랑말을 주력으로 남극점으로 향했지만, 남극의 한파를 견디지 못하고 이들은 고장이 나거나 동사했다. 결국 충직하고 노련한 개들과 함께한 아문센은 무사히 귀국했지만, 스콧은 남극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여기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가 있다. 인류는 아문센과 스콧이 남긴 교훈 대로 극지방 탐험을 위해 썰매 견들을 훈련시키고 원정대에 포함시켰다. 전후 일본 또한 남극 탐험을 위해 추위에 강한 '가라후토 견' 여럿을 1차 탐험대의 이동 수단으로 삼았다. 1958년, 미지의 동토 남극은 극한의 한파가 몰아쳤고, 빙토 곳곳에 크레바스와 크랙이 입을 벌린 위험 가득한 험지였다. 노령의 썰매 견 몇 마리가 기력이 다해 숨을 거두었고, 어떤 개는 짝짓기에 소외되자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자진하여 무리를 떠나 어딘가로 사라졌다. 가라후토 명견들은 얼음 땅 1600km를 내달릴 만큼 강인했고, 주인에게 의리를 지켰다. 개는 자신을 부리는 인간을 배신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그들을 버리고 학대하며, 겪는 고통을 모른체한다.



1차 월동대는 엄혹한 추위에 밀려 철수하고, 쇼와 기지는 유령 기지로 변한다. 대원들을 태운 헬기가 눈바람을 일으키며 이륙할 때마다, 남겨진 개들은 쇠사슬에 묶인 채로 발버둥 치고 울부짖는다. 빙판을 달리느라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자신들을 함께 데려가라고, 여기에 묶인 채로 버려두지 말라고, 자신들을 잊지 말라고.. 개들의 몸부림과 비명은 빙판에 검은 점이 되어 이내 흩어진다. 혹한의 땅에 버려진 열다섯 마리의 개들. 그들은 목줄이 한껏 조여져 기둥에 묶인 채로 버려졌다. 그 후로 일 년이란 기나긴 시간이 흘렀다.


반려견에 대한 인식이 무르익지 않은 50년대였지만, 일본 각지에서 비난 여론이 빗발쳤다. 가까이서 개들을 돌보았던 '기타무라 다이이치'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3차 월동대원에 포함되어 다시 쇼와 기지를 밟게 된다.



놀랍게도 그는 살아남은 성견 두 마리를 발견하게 된다. 생존한 개들의 이름은 타로와 지로. 개들은 처음에는 경계하고 이빨을 드러냈지만, 자신들의 이름을 부르는 인간을 알아보고 반갑게 달려들었다. 자신들을 이 땅에 버리고 간, 동료들을 참혹한 아사의 지경으로 몰고 간 철천지원수임에도 환영의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불시에 달려들어 목덜미를 물어뜯어도 시원치 않을 원한이 마음 어딘가에 맺혀 있을 텐데도.. 개들은 인간에게 부드러운 혀를 내밀어 핥고 꼬리를 흔들었다. 기타무라 다이이치는 그간의 잘못을 참회하고 용서를 빌면서 눈 아래 파묻혀 동사한 개들의 사체를 거두어 수장한다. 그는 양심적인 인간이었고, 개들이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따스한 정과 무리를 지키는 보호 본능을 가지고 있음을 일찍이 깨달았다. 빙하 아래 얼어붙은 사체를 수장하면서, 그는 눈썰매를 끌던 개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각자의 추억을 되새긴다. 사무친 한에 물 아래 가라앉지 못하고, 한참을 맴돌다가 천천히 잠수하는 개의 사체들.. 그들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몇 장의 사진들이 눈물겹다.



이후는 노년의 기타무라 다이이치가 저자와 함께 살아남은 제3의 개의 행적을 쫓는 과정이 그려진다. 상대적으로 어리고 경험이 일천한 타로와 지로가 살아남기까지의 과정을 추리하는 과정이 흥미롭다. 그들이 생존을 위한 먹이를 어떻게 구했을까. 혹시 제3의 개가 그들의 생존에 기여하지는 않았을까? 미수(88세)에 이른 기타무라가 행방불명된 개들을 떠올리면서, 마침내 제3의 개라 유력시 되는 이름을 불렀을 때.. 남극을 떠도는 수많은 견공들의 원혼은 일제히 하울링을 터뜨리고 꼬리털을 부풀렸으리라.


머나먼 극지에서 불귀의 신세가 된, 자신들의 이름을 기억도 못하는 인간들을 원망하고 저주하면서.. 그럼에도 한때 곁에 머물렀던 인간들의 향취를 떠올리고 그리워하면서 말이다.





#서평단 #그개의이름은아무도모른다 #북멘토 #가라후토견 #썰매견 #기타무라다이이치 #신간추천리뷰 #남극탐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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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203호 - 2024.봄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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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계간지 <창작과 비평> 203호는 갈수록 혼란해지는 세계 체제하에서 한반도가 어떻게 생존하고 활로를 뚫어야 하는지에 대해 서사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올해 예정된 미 대선에서 트럼프가 재집권하리라는 전망이 높아지고 있다. 영원하리라 믿었던 천조국 달러와 IT, 막강 군사력으로 대표되는 제국. 미국은 분열하고 있으며 카오스의 중심으로 돌입하는 중이다. 첨예하게 대립하는 중국, 러시아와 미국의 최전방 전선에 위치한 한반도는 과연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 혼종화되는 세계 체제에서 생존하고 진화하는 성공 서사를 써내릴 수 있는지를 다루고 있다.



목차를 들여다보면 창작과 비평 측면에서 풍성한 콘텐츠를 담고 있다.

산문은 공선옥 작가의 <담양산보>, 김금희 작가가 연재하는 <대온실 수리 보고서> 최종 편이 눈에 들어온다.

시편에서는 고명재 시인, 김정환 시인, 김이듬 시인 등 신구가 조화로운, 운문과 산문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파격적인 형태의 시가 돋보인다.

다른 한 축을 이루는 문학 비평도 뒤질 수 없다. 김해자 시집 <니들의 시간>을 조명하는, 유병록 시인의 친근한 글. 시인의 마음에 담긴 무수한 울음이 조각조각 이어져 천의무봉의 웃음에 이른다는, 세심하면서도 유쾌한 글을 놓칠 수 없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0주년을 맞이하여 미지의 땅 유라시아에서 조우한 유홍준 작가를 추억하는 강인욱 교수의 글은 미지의 영역에 대한 답사기를 이어가도록 그를 응원하는 마음이 가득하다.




<창작과 비평>을 읽다 보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오른다. 어릴 적 낡은 마호가니 책장 위 칸에 나란히 꽂힌, 누렇게 바랜 7~80년대 문예 잡지들. 아버지는 종종 마음이 심란할 때면 까치발로 서서는, 일렬로 늘어선 장서들을 올려다보곤 했다. 무심히 바라보는 것만으로, 습기를 머금어 쭈글한 표지를 쓰다듬는 것만으로, 정연한 목차를 훑는 것만으로.. 알 수 없는 위안과 힘을 주는 그 시대 수많은 창작물과 평론들. 그 시절 <창작과 비평>은 무력통치와 외압을 두려워하지 않고 줄기차게 군부 독재를 비판하는가 하면, 자유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시민운동을 적극 응원했다.

아버지의 유품으로 남은 그 시대 <창작과 비평>이 남긴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고, 경직된 사회를 뒤흔드는 울림이 있다. 마흔이 넘은 나 또한 여러 권의 창작과 비평 지난 호를 서가 가장 높은 곳에 꽂아두고, 가끔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곤 한다.


현재 한반도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짚어 주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밝히는 혜안이 눈부시다. 신인 작가를 발굴하여 지면에 등장시키는 문학 등용문 역할도 충실하다. 언젠가 내 글도 어느 최근호의 목차와 페이지 어딘가에 실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까지 불쑥 움튼다.





90년대 어느 나른한 주말 오후, 서가를 바라보는 아버지처럼.. 두 발 모아 꿈치를 들고 손을 뻗어 누릿한 책등을 매만지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창작과 비평>은 언제나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다. 굴곡진 시대에 지치고 좌절한 모든 이들이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담벼락처럼 말이다.




#서평단 #창작과비평 #문학잡지 #스위치 #세계서사 #혼종의세계 #대산대학문학상 #공선옥작가 #김금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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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의 요람
고태라 지음 / 아프로스미디어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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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릿한 바다 내음이 작렬하는 다도해의 이역, 죽해도에 다다른 떠돌이 민속학자 '민도치'.

남북으로 기다란 섬, 죽해도는 각각 산신과 용왕을 모시는 나릿골과 우름곶 주민들의 오랜 반목과 대립, 이를 중재하고자 하는 정체불명 사교집단 단현사의 도량으로 섬 전체가 원시에 가까운 풍속신앙체처럼.. 괴이하고 불경한 기운을 내뿜는 섬이다.



영민한 고양이 상을 지닌 민도치는 섬 도처에서 풍기는 귀기와 사위스러움을 접하고, 심상치 않은 횡액이 코앞에 다가왔음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아니나 다를까. 피해자의 절개된 복부의 장기가 모조리 사라진 참극이 섬 한복판에서 벌어지고.. 민도치는 낯 두꺼운 붙임성과 청산유수 같은 입담, 조예 깊은 토속종교 경험을 바탕으로 경찰, 도민들과 함께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연쇄살인 사건이 터지는 가운데 섬에 도사린 악의 심연과 그 안에 웅크린 마라의 요람을 직면한 그는 난관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 돌파를 결심하는데..



고태라 작가는 데뷔작 <설곡야담>으로 2023년 <미스터리> 봄호 신인상을 수상한 장르 문학의 신성이다. 그는 요코미조 세이시의 <옥문도>에 영감을 받아 <마라의 요람>을 구상했다고 한다. 타고난 재능 아니면 거장을 따르고자 하는 열망 때문일까. 신인답지 않은 매끄럽고 유려한 문장과 서서히 수위를 높이는 긴장감 넘치는 서사가 빛을 발한다. 섬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삼각 세력 간의 아귀다툼과 본심을 감추는 여러 인물들을 조율하면서, 복선과 트릭을 적절히 배치하여 대망의 엔딩으로 나아가는 추진력은 기성 작가 못지않은 필력을 자랑한다. 피비린내 가득하고 토악질이 치미는 죽해도의 음기를 누르기 위해 틈틈이 난입하는 위트 넘치는 돌발 대사는 독자들의 웃음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쌓아 올린 겹겹의 서사가 돌신제가 벌어지는, 모든 주민들이 운집한 단현사 경내에 다다르는 순간.. 사건의 실마리를 움켜쥔 도치는 뒤엉킨 매듭을 풀기 위해 섬에 도사린 비밀을 폭로하기 시작한다. 과연 그는 마라의 요람이 잉태한 범인을 찾아내고 섬의 비밀과 얽힌 범행 동기를 파헤칠 수 있을까? 한국의 요코미조 세이시와 에도가와 란포를 꿈꾸는, 나아가 고유의 토속 장르 소설이라는 신영토를 개척하고자 하는 고태라 작가의 열망은 이제 첫 발자국을 내디뎠다. 그가 '민도치'라는 독보적이면서 유일무이한 민속학자 탐정 캐릭터를 중심으로 연이은 작품을 선보이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서평단 #마라의요람 #고태라작가 #아프로스미디어 #민속학장르 #사교밀교 #죽해도 #풍속신앙체 #나릿놀우름곶 #단현사 #민도치 #민속학자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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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나라 정벌 - 은주 혁명과 역경의 비밀
리숴 지음, 홍상훈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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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리숴의 <상나라 정벌>. 원전 제목은 <전상翦商>, 상나라를 반으로 잘라 해부하다/파헤치다란 의미. 부제는 <은주 혁명과 역경의 비밀>이다.

저자는 프롤로그부터 상나라 곳곳의 유적지, 무덤, 지하 갱에 켜켜이 묻힌 유골 더미를 낱낱이 들여다보고 당시 상황을 재연한다.



"1차로 19명을 죽였는데, 머리와 몸뚱이가 온전한 것은 2구뿐이고 정강이나 발목이 잘린 것이 5구, 머리뼈가 있는 것이 10개, 상악골 하나, 오른쪽 넓적다리 하나가 있다. 분별이 가능한 젊은 남자와 여자가 3명이고, 성년 남자가 2명, 아동이 4명, 영아가 2명이다. 4명의 아동은 모두 시신이 불완전한데, 하반신이 없다.. 2명의 영아는 모두 머리 뼈만 남아 있다."_ 22~23p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시신이 절단된 상태로, 하늘에 제물로 바쳐진 것처럼 발견된 망자들. 저자는 이들이 중국 교대 훠화 문명을 기반으로 한 상나라의 순장과 인신 공양 제사 풍습을 증언하는 사료라고 서술한다. 상나라는 왕국의 풍요와 평안을 위해 노예와 평민, 귀족을 불문하고 살아 있는 이를 제물로 바치는 카니발리즘 문화가 존재했다. 망자와 함께 일부 가족과 노예 등이 갱저에 묻히는 순장 풍습과 함께 인신공양은 고대 신관 문화를 대표하는 관례였으니.. 신성하고 어린 자의 사지를 절단하고 내장을 꺼내 그 형태로 미래의 길흉을 점치는가 하면, 제물의 꿈틀대는 살점을 육장에 담그거나 무솥에 삶아서는 액을 물리치기 위해 섭식하기까지 했다. 이 과정에서 육신의 일부가 훼손된 자들은 숨이 떨어질 때까지 고통과 비명에 시달리며 다져진 사면의 지하 갱에 버려졌으니, 그 집단 상흔이 현재 중국 은허 지역의 제사갱 등에 남아 출토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평생을 바쳐 탐구한 고고학 유물과 갑골문자, 고대 문헌을 바탕으로 지하 깊이 파묻힌 상고 역사와 인물들의 서사를 재구성한다. 상나라 주왕에 이르러 무차별적인 인명 살해의 마수는 귀족층에까지 뻗칠 정도로 극에 달한다. 주지육림, 포락지형의 고사를 기억하는가? 도처에 울음이 퍼지는 가운데, 상나라의 속국이 된 주나라의 문왕에게 비극이 덮친다. 문왕 희창의 장자 백읍고는 포로 신세가 된 아버지의 석방을 탄원하다가 되려 제물이 되어 처형되고 만다. 왕명에 따라 친자의 피가 뚝뚝 흐르는 육장을 삼키는 아버지의 표정이 비탄에 잠긴다. 주나라 문왕은 복수를 다짐하며 토굴에 은신한다. 상나라가 숭상하는 검은 새를 저주하며 건괘를 조합하여 두 나라의 운명을 점치는, 기묘한 은유가 넘치는 글을 엮었으니 저자는 이를 <역경>이라 주장한다. 역경은 주 문왕이 처참하게 살해당한 친족의 복수와 함께 상나라의 몰락을 기원하고, 주나라의 길복 역전을 염원하는 비밀스러운 점괘서였다는 것이다.



결국 주나라 무왕에 이르러 결성된 동맹군은 목야 전투를 통해 상나라의 주력 방어군을 섬멸한다.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물 건너는 이의 정강이를 도륙하던 폭군 주왕은 분신하여 자결했다. 친형 백읍고의 비참한 죽음을 목격한 무왕은 복수를 위해 주왕을 재차 참수하고, 상 왕족과 측근들을 모두 인신 공양 풍습대로 천천히 살해하며 카니발의 밤을 즐겼다. 친족의 인신공양 참극과 통렬한 복수, 후대의 금의환향에 이르는 고대 서사라니.. 어찌 흥미롭지 않겠는가?


이후 이어지는 주공의 인본 정치를 숭상하는 섭정과 상나라 역사 지우기, 상나라의 후예였던 공자의 역경에 대한 촌평과 어두운 선대 역사에 대한 하소연, 육경 편집 에피소드까지.. 저자 리숴의 기존 고대 역사관을 비틀고 깨부수는 혜안과 논리적이면서 풍부한 서사 능력은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이 책으로 인해 중국 고대사를 바라보는 학계 인식이 바뀌었고, 석기시대부터 시작된 하/상/주나라의 역사를 재조명해야 한다는 세간의 요구가 빗발쳤다 하니.. 기회가 되면 일독하기를 권하고 싶다.


1000 페이지에 육박하는 두터운 역사서지만, 관련된 유적 사진과 스케치, 지하갱 도면이 상세하여 큰 막힘없이 완독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두 나라의 일족 살해 & 복수 활극 서사가 몰입감이 상당하여 마치 대하 역사 소설을 읽는 듯하다. 중국 출간 1년 만에 40만 부를 돌파하면서 경직된 중국 상고사 학계에 날선 도끼를 내리친 <상나라 정벌>이 국내에 상륙했다. 이제 당신이 육중한 청동 도끼를 받아들어 날과 자루에 새긴 갑골문을 더듬어 훑을 차례다. 석화된 검은 새가 날갯짓을 하고, 지하에 묻힌 억울한 망자들이 깨어나 손짓을 한다. 우리는 그들의 한 맺힌 사연과 참회록을 밤새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서평단 #상나라정벌 #리숴 #글항아리 #문학동네 #인신공양제사 #주지육림 #주왕문왕 #주공공자 #고고학역사 #신간추천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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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알 환상하는 여자들 1
테스 건티 지음, 김지원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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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이가 많아지면 서로에게 오줌을 싸고 뭐 그러는 거야. 따로따로 넣은 우리가 열 개는 있지 않으면 저놈들은 싸우기 시작해. 그리고 수컷이 다른 수컷을 거세하지. 그런다니까. 고환을 물어뜯어버려. 그러면 피투성이 난장판이 되는 거야. 그래서 저것들이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잡아 죽여야 해. 안 그러면 난리가 나.

_ 1989년, 미시간 주 플린트 주민 론다 브리턴..





테스 건티의 데뷔작 <우주의 알>. 배경은 인디애나 주의 몰락한 도시 바카베일. 러스트 벨트라 불리는, 미국 디트로이트와 플린트 시를 연상시키는 가상의 도시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토끼장'을 빼닮은 어느 빈민가 아파트 라라피니에르. 우리는 이곳을 슬럼가, 닭장이라 비하하여 말할 것이다. 서두부터 18세 소녀 블랜딘 왓킨슨의 영혼은 육체에서 이탈한다. 그녀가 신봉하는 신비주의자들의 믿음 대로 심장의 황홀경, 천사의 화살 공격이 벌어지나 했지만, 현실은 여전히 그녀의 온몸을 뒤덮고 있다. 이후 등장할 자동차 공장, 폭스콘의 노동 착취 현장, 솜꼬리 토끼의 행렬, 어머니가 삼키는 옥시코돈 등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저자는 우리를 만화경의 세계로 데려간다, 다채롭고도 암울한 판타스틱한 이미지들의 축제..



야생적인 날 것의 요지경이 펼쳐진다. 뒤죽박죽 얽히고 설긴 캐릭터와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들. 만화경으로 바라보는 토끼장의 내부는 혼란하고 기이하기만 하다. 생쥐들이 천장과 복도를 활보하고, 에어컨과 외창이 없는 암울한 실내. 그 안에 서식하는 인물들은 비현실적이면서 비물질적인 상태로, 허공을 떠다니는 미세먼지보다 작은 무인 것처럼 점멸하다가 사라진다. 동물들을 학대하면서 쾌락을 찾고 그 영상을 SNS에 올리는 10대 소년 잭. 멸종 위기의 나무 늘보를 위해 자신의 유골을 기증하겠다는 부고를 직접 작성한 어느 여배우는 죽음과 나란히 셀카를 찍었다고 증언한다. 그녀의 외아들 모지스는 고해성사를 통해 부재하는 어머니의 위선과 거짓된 삶을 고발하려 하지만 고백은 자꾸만 행간 밖으로 뛰쳐나가 진심을 잃어버린다. 우리는 눈을 깜박일 때마다 만화경 렌즈에 비치는 토끼장의 전경과 내부가 달라지는 기분에 도취된다. 어느 페이지를 펼치더라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랜덤 한 서사가 우리의 식상하고 천편일률적인 해석을 프리즘처럼 굴절시킨다. 가련한 주인공 티퍼니는 40 대의 음악 선생 제임스와 관계를 가지며 진정한 신을 현현했다는 옛 성녀의 이름을 본떠 '블랜딘'이라 개명한다. 허나 제임스는 신이 아니라 자신의 제자의 육체와 순수한 영혼까지 탐하는 비열한 쓰레기일 뿐이다. 블랜딘은 여전히 두꺼운 알 껍질을 깨지 못한 채, 갈수록 토끼장 안으로 매몰되고 감금되고 있다. 서로의 고환을 핥고 물어뜯어 거세하는 야생의 철장에 갇혀 방황하고 있다.



그녀는 언제쯤 속박에서 벗어나 해방되는 것일까. 그녀는 과연 불뚝이는 심장을 꿰뚫는 황금 화살의 세례로 고통과 존재의 한계를 초월하여 무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인가. 블랜딘은 악동 패거리에 둘러싸여 죽음에 내몰린 염소를 대신해 칼에 찔리고, 자신의 붉은 피를 바치고서야 초월적인 존재를 현현하게 된다. 쩌억! 오래도록 깨지지 않고 틈이 안 보이던, 질기고 강건한 태초의 알 껍질 표면에 금이 가는 소리. 그 안에서 황홀경에 빠진 심장의 박동이 두근대고, 먼 우주에서 천사가 쏘아 올린 화살이 알의 핵심을 노리며 광속으로 날아온다. 시작과 끝이 모호한 환상으로 가득한 토끼장의 세계가 흔들리고 무너지려 한다. 짧은 엔딩 크레디트가 위로 흐르고 암전 되면 우리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C4 호에 누워 자신의 육체를 내리보는 블랜딘의 영혼을 마주한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영원한 되돌이표처럼 무한 생성되고 증식하는 황홀경에 빠진 만화경의 요지경 세계. 희망적인 후속편과 기적적인 환생을 약속하는 쿠키 영상이 재생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실망하지 않고 기꺼이 그 안에 다시 빠져들어 심취할 수 있다.



내 말 들어. 진짜로 여러분, 내 말을 들어. 이 뒤로는 아무것도 없어. 알겠어? 그러니까 3막이 있는 것처럼 살지 마.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 다음 쿠키 영상도 없어.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야.. _<우주의 알>_327p



기묘한 만화경을 뒤흔들고 내던져도 그 안에 담긴 환상적인 이미지는 무너지거나 흩어지지 않고 갖은 이야기를 쏟아낸다. 우리를 둘러싼 각종 SNS에서 1 ms도 쉬지 않고 헛소리를 지껄이고, 자아도취에 빠진 과 노출/댄스 & 펫 & 맛도리 이미지와 영상을 토해내는 것처럼.. 우주의 알에 둘러싸인 환상은 멈추지 않는 심장처럼, 엔딩 없는 수다를 떨고 있다. 우리는 불규칙하고 엇나가는 박동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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