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마른 삶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3
그라실리아누 하무스 지음, 임소라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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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멈이 옳을 것이다. 어멈은 항상 옳았다. 이제 어멈은 아이들이 커서 무엇을 할 것인지 알고 싶어 했다.

"소몰이꾼이 되겠지." 파비아누가 말했다.

비토리아 어멈은 질색하며 고개를 부정적으로 흔들었고, 그 바람에 하마터면 양철 트렁크를 떨어뜨릴 뻔했다._155p



20세기 브라질의 가장 위대한 작가로 손꼽히는 '그라실리아누 하무스'의 대표작이자 윌리엄 포크너 상 수상작인 <메마른 삶>이 국내 초역, 출간되었다.


표지는 황량하고 건조하다. 어디에도 발길이 머무르고 희망이 자리할 구석은 보이지 않는다. 유랑자들의 불확실한 미래를 상징하는 것처럼, 불투명하고 명확지 않음이 가득하다. 사체가 썩는 내음이 진동하는 불모지, 카칭가를 헤매는 이들. 소몰이꾼 파비아누, 비토리아 어멈, 부모를 따르는 두 아이들과 충견 발레이아 그리고 곧 죽음을 맞이할 대형 앵무새. 그들은 뚜렷한 목적지가 없고, 누구도 그들을 반기지 않는다. 공중을 선회하는 독수리들만이 그들이 탈진하여 쓰러지기를 바랄 뿐.. 앵무새가 유명을 달리하지만, 지하에 묻히기는커녕 곧바로 남은 이들의 끼니가 되었다. 그렇게 정처 없이 헤매다가 당도한 곳은 '세르탕', 사막 혹은 황야라 불리는 곳.



파비아누와 그의 가족들은 새로운 거주지에서 어떻게든 정착하려 하지만 현실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탐욕스러운 지주들은 소작인들의 뼛속까지 털어먹으려 하고, 정부/군인들 역시 빈자들을 폭압하고 영역 밖으로 내쫓으려 한다. 거장 그라실리아누 하무스는 철창에 갇히고, 진창에 빠져 뒹구는.. 황무지를 떠도는 가난한 이들의 모습을 3인칭 시점으로 담담히 그려낸다. 13개 장에서 다양한 이들이 거친 땅에서 쓰러지고 숨을 헐떡이다 끝내 다시 일어서려는 분투기가 애달프고 쓸쓸하다. 가족과 다름없는 개 '발레이아'가 주인의 총에 맞은 채, 자신이 묻힐 곳을 찾아 힘겹게 기어가는 장면은 서서히 진행되고 세밀히 클로즈업된다. 주인이 나타나면 힘껏 물어버리겠다, 복수를 다짐하지만 눈앞에 어른대는 환영과 멀리 들리는 아이들의 울음만이 그의 최후를 기릴 뿐이다. 발레이아의 비참한 죽음은 함께 한 가족들의 미래를 불확실하게 흐리고, 끝없는 떠남을 예고한다.



그들의 꿈은 소박하다. 등이 배기지 않는 안락한 침대를 원하고, 일용할 양식과 아이들이 교육을 받을 만한 터전을 바랄 뿐이다. 허나 거대 자본과 공권력은 그들의 찢긴 주머니를 뒤지고, 정착하게 놔두지를 않는다. 도주하다시피 짐을 꾸려 어딘가로 길을 떠나는 파비아누와 가족들. '덜 메마른 삶'을 찾아 떠도는 그들의 발걸음은 무겁고 느리지만, 결코 멈추지 않는다. 저 지평선 너머 어딘가, 자신들을 반기는 최소한의 삶을 영위할 만한 낙원이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실낱같은 그 희망마저 놓아 버린다면, 현재의 고통은 배가 될 것이고 죽음이 그들을 사로잡을 것이기에..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고 낙관적인 미래에 대해 의논한다. 도시에 정착하면 아이들의 이름을 지어주고, 학교에 보내 소몰이꾼이 아닌 다른 업을 찾게 도와야지.. 하는 이런저런 장밋빛 계획들과 청사진들. 그들이 밟는 땅은 여전히 메마르고, 허공에는 독수리들이 맴돌고 있다. 서로에게 기대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그들의 모습을 우리는 오래도록 지켜보고, 무사함과 안녕을 바랄 수밖에 없다.


그라실리아누 하무스 <메마른 삶>은 조지 스타인벡의 역작 <분노의 포도>를 떠오르게 합니다. 자본의 횡포를 피해 어딘가로 떠나는 가족들의 행렬은 장례 의식처럼 비장하고 처절해요. 하지만 그들은 희망을 놓지 않고 걸음을 멈추지 않아요. 과연 그들이 당도할 곳은 젖과 꿀이 넘치는 낙원일까요? 아니면 메마르고 황량한 지옥일까요?

길지 않은 분량에 생경하고 낯선 브라질 향토를 배경으로 한 <메마른 삶>.

휴머니스트의 흄세 시즌 7 <날씨와 생활> 시리즈 중, 꼭 읽어야 할 필독서로 추천하고 싶어요!




#서평단 #도서협찬 #흄세 #휴머니스트 #메마른삶 #그라실리아누하무스 #임소라번역 #브라질작가 #윌리엄포크너상 #국내초역 #신간추천리뷰 #흄세시즌7 #날씨와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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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 빛과 물질의 탐구가 마침내 도달한 세계
그레고리 J. 그버 지음, 김희봉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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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SF의 창시자 허버트 조지 웰스<투명 인간>과 이를 영화화한 여러 작품들을 보고 충격에 빠진 적이 있다.

주변에 혹시 존재할지 모르는 '보이지 않는' 인간들이 집에 몰래 들어와 도둑질을 일삼고, 우리 일상을 몰래 훔쳐보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앞서기도 했고.. 남들 눈에 띄지 않는 투명 인간이 되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겠다, 어디든 갈 수 있겠네 하는 상상에 빠지기도 했다.


허나 치기 어린 상상은 거품처럼 삽시에 터졌다. 인간 혹은 물질을 투명하게 만드는 기술은 시기상조이고, 실현이 어려움을 깨달으면서 '투명 인간'은 SF 소설 속의 허상으로 점점 사라져 갔다.

바야흐로 세상은 광속으로 탈바꿈하고, 과학은 우리를 광활한 우주와 인터넷/AI의 세계로 차원 이동시켰다.



물리학/광학 교수이자 SF 애호가인 '그레고리 J. 그버'는 저서 <보이지 않는>을 통해 투명 인간의 실현 가능성에 주목한다. 18세기 무렵부터 여러 과학자들이 무수한 시행착오와 시도 끝에 발견한 빛과 소리, 전자기, 양자 역학 등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한다. 굴절, 가시광선, 적외선, 자외선, 엑스선, 전자기장, 주기율표 등 학창 시절에 접한 익숙한 용어들이 새삼 반갑다. 아이작 뉴턴, 맥스웰, 토머스 영, 아인슈타인, 페러데이, 닐스 보어, 막스 보른 등 물리학, 화학, 의학 등을 넘나드는 쟁쟁한 학자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저자는 또한 과학자들이 예견하지 못하는 저 너머 세상을 상상하고, 미래 세계를 문장으로 축조한 선지적 작가들의 작품을 소환한다. SF 작가들이 작품 속에 구현한 이론과 서사가 후대 과학자들이 논리적으로 실증한 성과와 놀랄 만큼 유사함을 거론한다. 이를 통해 인간이 그리는 허구적 상상과 실존하는 구체적 현실은 동떨어진 별개의 세계가 아닌, 유사한 맥락으로 소통하고 상호 발전하는 하나의 광활한 우주임을 깨닫게 한다.



근 2세기 동안 과학은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하면서 불투명하고 무질서한 사물의 이치를 증명 가능한 수학적/논리적 이론으로 정립하고 실생활에 응용하는 과정은 인류 문명의 폭발적인 확장과 혁신을 일으켰다. 현재 우리는 우주의 비밀을 엿보고, 화성을 제2의 터전으로 확장하려 발을 내딛고 있다. 광속으로 질주하는 무선 전자기파와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무한대의 가상 세계를 확장하고, 이를 지배하는 인공 지능/로봇을 업그레이드 중이다. 우리는 이제 명확히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게 하는 기술에 주목한다.



거대한 물질적 파동이라 할 수 있는 지진과 해일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일정 영역을 완충물질로 감싸 그 충격파를 보이지 않게 최소화하고 무력화시키는 연구가 이제 발을 내디뎠다고 한다. 급속한 과학의 발전은 밝고 긍정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반대급부적인 암울하고 그늘진 이면을 넓히기 마련이다. 일찍이 제임스 돌턴, 피츠 제임스 오브라이언, 에드먼드 해밀턴, 앰브로즈 비어스, 필립 와일리 등 선지자에 가까운 SF 작가들이 결코 실현되지 말아야 할, 디스토피아로 빚어낸 파멸적 재앙이 우리 눈앞에 바짝 다가와 있다.



<프레데터>의 기괴한 외계 생물체처럼.. 적대국과 라이벌 기업의 기밀 정보를 훔치고, 요인을 무차별 암살하는 클로킹(투명) 스파이, 킬러와 지하 벙커까지 침투해 민간인을 학살하는 드론 무리가 암약하는 시대.

빛을 파괴/우회하여 자신의 존재를 변형하거나 감추어 개인의 사생활을 엿보고, 잔인무도한 범죄를 저지르는 무법/무정부 투명시대가 도래하는 건 아닌지.. 우리는 던져진 주사위의 여러 면을 살피는 것처럼 다가올 미래를 다각도로 상상하고, 예측되는 위험에 대응하는 현명함을 갖춰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그레고리 J. 그버가 <보이지 않는>에서 시도한 것처럼, SF 문학과 첨단 과학이 긴밀하게 협조하고 상호 귀 기울이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서평단 #광학 #과학책 #SF문학 #SF소설 #그레고리J.그버 #김희봉번역 #을유문화사 #정재승교수추천 #신간리뷰추천 #물리학화학 #투명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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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적의 균형
신지은 지음 / 꼬마의마음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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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소설의 첫 문장을 지지한다.

모든 이야기의 첫 시작, 첫 페이지의 첫 줄, 첫 문장을 진심으로 사랑한다._11p


나는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당신도 결코 그러지 않을 것이다.

내 온 마음을 다해 지지할 테니.._ 223p



신지은 작가가 단편집 <최적의 균형>을 출간했다.

책을 펼치면 산문시, 에세이와 소설, 러브 판타지 중단편들이 총 4장에 나누어 실려 있다.

그녀는 예명 '신하랑'으로 연기자, 모델로 활동을 하고 있고, 자신의 내밀하면서 파격적인 속 이야기를 솔직히 드러낸다.


그리 길지 않은 숏폼 형태의 이야기 한 편 한 편이 다채로운 빛을 발하고 있어

흡인력이 상당하다. 다양한 인간과의 만남, 우정, 로맨틱한 사랑 그리고 고통스러운 이별의 순간까지.. 이런저런 엇갈림과 오해, 시행착오 끝에 삶의 '최적의 균형'을 찾아내는 지난한 과정이

끄덕끄덕, 맞아, 그럴 수 있어. 라는 공감대를 불러일으킨다.



오랜 기간 몸을 담은 업 종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을, 화려한 연예계 이면의 치졸하면서 사기성 짙은 내막을 낱낱이 고발하기도 한다. 그녀를 둘러싼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분투의 결과물. 손을 내미는 이들과 연을 맺고, 인연이 다해 끊어지는 희로애락의 시간이 묻어난 기록들이 한데 모였다.



신지은 작가, 그녀가 공들여 만든 컬러풀하면서 섹시한 맛의 칵테일이 여기에 놓여 있다.

자, 편안한 소파에 기대어 심호흡을 하고 날뛰는 마음을 진정시키자.

우리는 마음에 드는 칵테일을 홀짝이면서, 그녀가 소곤대는 여러 이야기들을 음미하면서..

일상 속 최적의 균형점을 찾아내는 행운을 누리기만 하면 된다.




#서평단 #신지은작가 #단편집 #산문시 #꼬마의마음 #최적의균형 #신하랑 #신간추천리뷰 #러브판타지 #연기자모델 #칵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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쳇 베이커 -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현대 예술의 거장
제임스 개빈 지음, 김현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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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이 얼마나 타오르고 있는지 당신은 알지 못하죠.

이 사랑은 결국 살아남지 못하겠지만 사라지지도 않을 거예요._278p




한 예술가의 삶과 음악을 이토록 진실에 가깝게, 세밀히 다룬 책이 있을까?

모던 재즈사에 한 획을 그은 트럼페터이자 보컬리스트, 쳇 베이커의 생애를 다룬 제임스 개빈의 <쳇 베이커>.

부제는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주름지고 그늘진 노년의 쳇 베이커가 눈을 감은 채, 빛나는 트럼펫을 감싸는 표지 사진이 비극을 예고한다.



쳇 베이커는 부친으로부터 천부적인 음악 재능과 직관력을 이어받았다. 하지만 난폭하고 쾌락에 휘둘리는 기질까지 그의 생을 지배했다. 젊은 시절 그는 반항적인 곱상한 외모와 로맨틱하면서 강렬한 트럼펫 연주로 '재즈 계의 제임스 딘'으로 불리며 큰 인기를 끌었다. 종잡을 수 없으면서 물 흐르듯 끊임없이 이어지는 재즈 플레이, 친근한 성격에 때로는 터프한 행동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그가 마약에 손을 대면서 모든 것이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라이브 공연의 압박감을 이겨내기 위한 도피처였을까? 아니면 아버지로부터 내려온 폭력성이 마조히즘적인 자학성으로 폭발했는지 모른다. 제임스 개빈은 재즈 계의 아이돌로 등장해 최정상의 지점에 올랐다가 내리막을 그리며 바닥으로 추락하는, 천재적인 예술가의 굴곡진 삶을 생생히 기록한다.



그의 곁에 머무르고 스쳐간 수많은 재즈 음악가들, 가족/지인들, 연인들의 족적, 코멘트를 따라가며 쳇 베이커의 삶을 진실에 가깝게 고증하고 재구성한다. 오랜 마약 중독과 과용에 따른 후유증으로 그는 길지 않은 생을 살았지만, 무수한 앨범과 라이브 공연을 펼치며 말년까지 끈질긴 예술혼을 불태웠다. 덕분에 그의 롤러코스터와 같은, 위험천만한 삶을 재현한 전기는 10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이 필요했다. 허나 베일에 가려진, 은밀하면서 신비한 그의 이면을 낱낱이 들춰볼 수 있기에.. 광기 어린 천재의 급격한 하락세를 감상한다는 인간의 잔인한 본성을 자극하기에(모차르트의 파멸을 지켜보는 살리에르처럼..), 우리는 수월하게 이 책을 완독할 수 있다.



쳇 베이커. 그가 금빛 트럼펫을 곁에 두지 않았다면, 부드러운 나긋한 목청으로 연가를 부르지 않았다면..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빠졌을 테고, 더 일찍 생을 마감했을지 모른다. 예측 불가한 리듬으로 천상과 지옥을 오가는 삶을 살아낸 그는 재즈를 통해 그리운 고향에 다다랐다. 말년의 그는 더 이상 무대에 설 수 없는, 산송장에 가까운 상태였음에도 일말의 자존심과 공포마저 내려놓은 채, 끝내 트럼펫을 놓지 않았다. 그의 찬란했던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머나먼 이국의 땅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는 장면에서 비탄을 금치 못하리라.



책을 읽으면서 소장한 쳇 베이커의 여러 음반을 시대순, 맥락에 맞추어 플레이했다. <My Funny Valentine>, <Blame it on my Youth>, <These Foolish Things> 등등.. 더해가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죽음을 예감하는 것처럼.. 후기 음반으로 갈수록 다른 연주와 불협하고, 기력이 쇠하는 그의 트럼펫 연주에 가슴이 미어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의 가냘픈 날갯짓과 떨리는 음성은 최후까지 지속되었고, 영원을 향하는 것처럼 귓가에 남았다.

난 책을 덮고 그가 남긴 유산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무거운 날개를 벗고 천상에 올랐다. 어디선가 들리는 청명하고 우렁찬 트럼펫 소리.. 쳇 베이커는 재즈 그 자체의 삶을 살았고, 죽음 또한 그러했다.





#도서협찬 #도서제공 #서평단 #쳇베이커 #제임스개빈 #김현준번역 #트럼페터 #재즈 #재즈아티스트 #을유문화사 #현대예술의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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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을 향해 달리다 - 기억과 대면한 기록들
세라 폴리 지음, 이재경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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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이츠의 시 <도둑맞은 아이, The Stolen Child>에 곡을 붙인 로리나 매케닛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걷는다.

"이리로 오렴, 인간의 아이야. 이 물가로, 이 벌판으로, 요정과 함께 손잡고 오렴.

세상은 네가 이해하는 것보다 더 눈물로 가득하단다."_290p




<우리도 사랑일까>,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 <위민 토킹> 등으로 이름을 알린 세라 폴리 감독이 첫 에세이집 <위험을 향해 달리다>를 출간했다. 그녀는 네 살부터 캐나다를 대표하는 아역 배우로 스크린과 무대를 누볐다. 책의 시작은 어린 시절 <거울 나라의 앨리스> 공연에서 주연 앨리스를 연기했을 때를 떠올린다. 당시 그녀의 엄마는 고통스러운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고, 아빠는 실의에 빠져 집안 일과 양육을 게을리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저자는 척추 측만으로 호흡 곤란에 체형을 교정해야 하는 겹겹의 고통을 겪었다. 어릴 적부터 남달랐던 예술혼과 열정으로 50회가 넘는 무대 공연을 소화했지만, 그녀는 결국 무너지고 만다. 동료 배우들과 이모들의 도움이 있었지만, 시시각각 덮치는 무대 공포증은 그녀의 발목을 타고 올라 온몸을 장악했다. 극에 달한 공포를 면하기 위해, 유일한 탈출구 삼아 수술대에 자진하여 오르는 그녀. 그녀의 척추는 해체되어 올바르게 정렬 후 조립되었다. 사회 통념에서 벗어난 아빠 그리고 자신을 루이스 캐럴과 앨리스에 비유하며 엉망진창에 최악의 나날이었던 당시를 회상한다.



이후 저자는 미치광이 천재 '테리 길리엄' 감독의 <바론 대모험>에 아역 출연했던 일화를 소개한다. 작품 완성을 위해 어린 연기자에게 불구덩이에 뛰어들기를 강요하고, 스태프의 절대적인 희생을 강요하던.. 독재자에 가까운 명감독의 기행을 고발한다. 또한 자신의 고위험 임신과 신생아 중환자실 입원을 겪으면서 대량 출혈, 유산의 공포와 맞닥뜨린 기억을 소환한다. 이 과정에서 열 살 무렵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과 마지막을 추억한다.

어머니의 이른 죽음을 애도하고 영아 중환자실에 도사린 비극을 마주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과중한 모성애의 압박에서 풀려나는 것처럼 보인다.



저자는 과거 성폭력을 고발했던 미투의 기억과 불의의 사고로 뇌진탕 후유증에 시달린, 이런저런 시행착오로 얼룩진 시간을 마주한다. 그녀는 자신의 괴로운 기억들이 현재의 맥락과 맞물리며 상처가 점차 아물고 흉터가 최소화되는 과정을 세심히 기록한다. 질기게 달라붙는 트라우마와 대면하고, 기피하고 두려워하는 '위험을 향해 달리는 것'이 때로는 만성적인 고통을 어루만지는 특효약임을 몸소 증명한다.



세라 폴리는 성인이 되어 세 아이를 거느린 채, 프린스에드워드 섬으로 여행을 떠난다. 아역 배우 시절, 빨강 머리 앤을 연기했다는 원죄로.. 섬을 찾은 인파가 어린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스토킹을 일삼은 기억이 남은 곳. 허나 과거는 망각에 빠졌고 현재는 무해하다. 부모의 죽음과 고통스러운 시절을 통과한, 나이 든 그녀의 모습을 보고 화려한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녀. 꺾이지 않는 삶과 예술을 향한 의지와 주변의 도움 덕분에 그녀는 살아남았다.

온몸을 뒤덮었던 과거의 트라우마와 상처는 점차 소멸로 향하고, 그녀는 다시금 위험을 향한 본능이 꿈틀대는 것을 자각한다. 세인이 자신을 알아보고 접근하기를 원하는 연예인의 끼가 마음 한편에 치솟고, 큰 아이가 연기자의 길을 걷고 싶다고 하자 솔깃한 마음을 숨길 수 없다.



어찌했든 그녀의 삶은 지속될 것이고, 고난은 언제든 불시에 고개를 내밀어 발목을 붙잡으리라.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위험으로 가득한 불씨를 어루만지고 함께 달리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동력으로 삼는 법을 익힌 듯하다.

<위험을 향해 달리다>를 읽는 여러분들 또한 그 지혜를 깨달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서평단 #위험을향해달리다 #세라폴리 #캐나다영화감독 #첫에세이집 #위즈덤하우스 #신간추천리뷰 #앨리스 #빨강머리앤 #트라우마 #고통상처 #기억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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