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드물게 번역으로 감동을 준 작품이다.

보통 번역에 주어지는 평가는 기껏해야 본전이다.

오역이나 실수 등은 쉽사리 눈에 띠어서 가차 없이 점수를 갉아먹지만 번역을 잘했다고 해봤자 번역은 원작의 미덕을 한껏 치켜세워주고서는 슬그머니 뒷자리로 물러난다.

심지어 독자에 따라서는 자신의 성향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박한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독자가 해당 언어에 익숙하다면 평가는 더욱 깐깐해지기 일쑤다.

나 역시 마찬가지라 번역, 특히 일본어의 번역에 대해서는 꽤나 평가가 박한 편이다.
하물며 번역에서 감동을 받는다는 건 정말 좀처럼 없는 일이다.
그만큼 이 소설의 번역은 정말 치열하고 아름답다.

이 소설의 원작은 도호쿠 방언으로 쓰였다.
일반적인 일본어 사용자를 독자로 하는 작품이라 어느 정도 선에서 수위를 조절하기는 했지만 원작이 가지고 있는 어감이나 리듬을 번역으로 살려내는 건 시쳇말로 헬 오브 헬의 난관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읽는 순간 정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원작은 주인공인 모모코가 화자인 1인칭 소설인데 원서를 읽으면서 느꼈던 그 모모코의 말투가 그대로 전달되는 착각이 들었거든.
그만큼 이 소설의 한국어판은 화자 모모코의 목소리를 온전하게 한국어로 옮겨냈다.

원작의 도호쿠 방언을 한국어판은 강원도 방언으로 옮겨놨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건 정말 완벽한 선택이다.
방언은 작품의 주제와도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이걸 표준어로 옮겨내는 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도호쿠 지방은 강원도와 많이 닮았다.
우뚝우뚝한 산, 춥고 척박한 땅, 겨울이면 쏟아져내리는 눈...

너무 놀라서 번역자를 찾아봤다.

정수윤 번역자님.
번역자로서의 이력이 심상치 않더군.

다자이 오사무 전집의 번역을 맡았고 도호쿠의 이와테 출신인 미야자와 겐지의 시 [봄과 아수라]를 번역했는데 이 두 작가의 작품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도호쿠 방언이 우글우글하다.

독하게도 이걸 하나하나 꼼꼼하게 고민하고 발품을 팔아가며 번역하신 모양이다.

작품도 작품이지만 이걸 한국어로 이만큼이나 온전하게 옮겨주신 번역자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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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대니 Danny K-픽션 7
윤이형 지음, 전승희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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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생뚱맞게도 영화 감독 제임스 카메론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에일리언2의 인조인간 비숍과 터미네이터2의 T800이.

인간의 감정과 사랑을 기계(또는 AI) 배우는(또는 느끼는) 것이 가능할까?
라는 물음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 작품중에 이 소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기계가 감정을 배운 대상인 인간이 그 감정이 메마른 혹은 그 감정을 견뎌내야 하는 상태라면?
대니의 대사는 인간성의 깊숙한 곳을 까발기면서 동시에 위로하는 역설적인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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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 - 애거서 크리스티 12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2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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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사 크리스티, 에르퀼 푸아로 모두에게 역사적인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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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Where Would You Like To Go? K-픽션 14
김애란 지음, 제이미 챙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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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이 많은 지용이가 마지막에 움켜쥔 게 차가운 물이 아니라 권도경 선생님 손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놓여요.


마음 어딘가를 사무치게 찌르고 들어오는 한마디.
문학이 할 수 있는 위로와 애도는 이런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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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年泥 第158回芥川賞受賞 (單行本)
石井 遊佳 / 新潮社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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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상반기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일전에 읽은 나는 나 혼자서 갑니다와 함께 수상했다.
나는 나 혼자서 갑니다의 와카타케 지사코 씨가 무려 63세로 사상 두 번째 고령 수상이라 화제성에 밀리긴 했지만 백 년 진흙의 작가 이시이 유카石井遊佳 역시 54세로 만만치 않은 고령 수상이다.(아쿠타가와상은 등단 10년 이내의 작가에게 주는 일종의 신인상이다)
심지어 데뷔작인데도 이야기를 엮어내는 솜씨가 범상치 않다.

작가의 이력부터 독특하다.
현재 인도 첸나이의 IT회사에서 일본어 강사로 근무중.
작품의 주인공 ‘나‘ 역시 작가 스스로를 모델로 한 인물이다.
즉 배경은 첸나이.
주인공은 인도인을 상대로 일본어를 가르치는 강사.

어느날 첸나이에 백 년에 한 번이라고 할 정도의 큰 홍수가 몰려오고 홍수가 지나고 난 뒤, 홍수에 쓸려와 쌓인 거대한 진흙더미에 사람들이 몰려든다.

‘나‘는 홍수가 지나고 첫출근길에 다리 위에서 홍수 뒤의 장면을 바라보게 된다.

그런데 이 소설.
분위기가 범상치가 않다.
회사의 중역을 비롯한 돈 좀 있다는 사람들은 개인 날개를 가지고 날아서 출퇴근을 한다.

그리고 홍수에 밀려와 쌓인 진흙에서 발굴 되는 것(?)들도 기상천외하기 짝이 없다.
일본에 있던 시절 ‘나‘의 전남편이 단골로 가던 바에 키핑해둔 술병, 인어의 미이라...
수십 년 전에 (아마도 죽어서) 사라졌던 누군가의 친구, 연인이 젊은 시절의 모습 그대로 살아서 나오기 시작한다.
(심지어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현실과 비현실, 과거와 현재의 장벽이 슬그머니 사라진 풍경을 두고 ‘나‘의 사연, ‘나‘가 가르치는 회사 직원 데바라지(?)의 사연도 함께 한 올 한 올 풀려나오기 시작한다.

기상천외한 상상력도 상상력이지만 그걸 능청스럽게 풀어놓는 솜씨에 허를 내둘렀다.
적어도 내가 읽은 중에서는 가장 탈일본적인 일본문학.
세상에나 이런 보물을 만나게 되다니... 흐흐흐~

이국적인 첸나이를 배경으로 상상과 현실을 능청스럽게 뒤섞은 이야기를 읽다 보면 떠오르는 단어.
남미문학.
백 년 진흙은 남미문학의 특징인 마술적 사실주의를 일본문학으로 해석해낸 하나의 (그것도 뛰어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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