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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 1
R. F. 쿠앙 지음, 이재경 옮김 / 문학사상 / 2025년 8월
평점 :
바벨 1 (R. F. 쿠앙 作, 이재경
譯, 문학사상, 원제 : Babel,
or The Necessity of Violence: An Arcane History of the Oxford Translators'
Revolution)을 읽었습니다.

학원물이자 판타지 장르의 소설인데 흥미로운 지점이 많습니다. 판타지
학원 장르로는 아마도 많은 분들이 대표적인 작품으로 ‘해리 포터’시리즈를
떠올리실 텐데요, 그 결이 달라서 더욱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작가인 R. F. 쿠앙(Rebecca
F. Kuang)은 중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한 중국계 미국인 작가입니다.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외교학을 전공하고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중국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현대 중국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는데, 스물여섯 살의 나이에 네뷸러상과 로커스상을 석권하며 현대 영문학의
주요 작가로 자리매김한 작가이지요.
『바벨』은 19세기 초반 옥스퍼드 대학교 왕립번역원을 배경으로 한
역사 판타지 소설입니다. 중국 광둥에서 홀로 살던 고아 로빈 스위프트가 러벌 교수에 의해 영국으로 데려와져
바벨에 입학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계에서는 번역의 의미 손실을 이용한 '실버워크' 마법이 대영제국의 힘의 근원이며, 로빈은 같은 식민지 출신 친구들과 함께 번역 마법을 배우며 제국의 언어적 식민주의와 자신의 정체성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학문의 상아탑처럼 보이는 바벨이 실제로는 제국주의 침탈의 앞잡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벌어지는
지적 성장과 도덕적 각성을 그린 다크 아카데미아 걸작입니다.
바벨은 원래 1권의 소설인데 워낙 양이 방대해서, 국내에 출간될 때는 2권으로 분권해서 출간하였는데, 1권에서는 주인공 로빈 스위프트가 바벨에 입학하기까지의 준비 과정과 옥스퍼드에서의 학창 생활, 그리고 실버워크의 본질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그립니다.

주인공인 로빈 스위프트는 병으로 어머니를 잃고 혼자 남겨진 상황에서 러벌 교수를 만나 영국으로 떠납니다. 수년간의 집중적인 언어 교육을 받은 후 옥스퍼드 대학교 왕립번역원에 입학하게 됩니다. 이곳에서 식민지 출신들과 친구가 되어 함께 실버워크를 배웁니다.
실버워크는 번역 과정에서 발생하는 의미의 손실을 은막대에 담아 마법적 효과를 만들어내는 기술입니다. 이 기술은 대영제국의 산업혁명과 군사력을 뒷받침하는 핵심 동력이지만, 동시에
식민지의 언어와 문화를 착취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로빈은 바벨에서 학문적 성취와 소속감을 느끼지만, 점차 이곳이 제국주의적
침탈의 도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이복형과의 만남을 통해 바벨이 어떻게 외국 언어들을 이용해
식민지 침탈에 앞장서고 있는지 알게 되면서 내적 갈등이 시작됩니다.
이 책의 핵심 메시지는 언어적 식민주의와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것입니다.
작가는 번역이 단순한 의사소통 도구가 아니라 권력과 지배의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번역은 반역"이라는 명제를 통해 번역 행위 자체가 가진 정치적 속성을
드러내며, 학문의 중립성이라는 허상을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또한 식민지 출신 엘리트들이 직면하는 정체성의 딜레마를 깊이 있게 탐구합니다.
제국의 혜택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출신 공동체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는 복잡한 심리를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언어학에 대한 작가의 해박한 지식과 이를 판타지적 설정으로 승화시킨 창의력입니다. 실버워크라는 마법 시스템은 단순한 판타지적 장치를 넘어서 언어의 본질과 번역의 정치학을 탐구하는 철학적 도구로
기능합니다.
특히 로빈이 중국계로서의 정체성과 영국 사회에서의 위치 사이에서 느끼는 갈등은 현대의 다문화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입니다. 작가는 이러한 갈등을 피상적으로 다루지 않고, 언어적
정체성과 문화적 소속감의 복잡한 층위들을 세밀하게 분석합니다.
옥스퍼드의 고색창연한 분위기와 19세기 영국 사회의 계급적 특성도
생생하게 재현되어 몰입감을 높입니다. 작가 자신의 옥스퍼드 유학 경험이 바탕이 된 덕분에 학문적 엄밀성과
현실감이 뛰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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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주관에 따라 서평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