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켄 리우 한국판 오리지널 단편집 1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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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장르 자체가 구미권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그 근간이 되는 과학 기술 역시 현대에 들어와서는 구미 중심으로 발전하다보니 SF의 중심은 영미를 중심으로 한 구미권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영미권을 제외한 다른 문화권에서도 훌륭한 SF 작가들이 많았지만 훌륭한 작가들이 있었지만 주류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백인 남성 중심 SF의 견고한 흐름에 균열을 내는 한 작가가 등장합니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온갖 상을 다 휩쓸어버린 천재 테드 창(姜峯楠, Ted Chiang)이 바로 그 작가입니다. 하지만 그는 지독한 과작(寡作)으로 그의 작품을 기다리는 팬들을 절망시킵니다. 30년 동안 불과 17편의 중, 단편만을 발표하였으니 말이지요.


이후 중국계 미국인 켄 리우 (刘宇昆, Ken Liu)가 등장하면서 구미권 중심의 SF 장르 주류에 동아시아적인 가치라는 새로운 흐름을 뚜렷하게 나타내게 됩니다. 그는 2011년 ‘종이 동물원 (The Paper Menagerie)’이라는 작품으로 메이저 3관왕(휴고상, 네뷸러상, 세계환상문학상)이라는 전무한 기록을 남깁니다. 테드 창과 함께 같은 동아시아계 작가로 묶이긴 하지만 작품에서 동아시아적 정체성이 드러나지 않는 테드 창과는 다르게 켄 리우의 작품에서는 동아시아적 정체성이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과작의 테드 창과는 다르게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장편 시리즈인 민들레 왕조 (The Dandelion Dynasty) 2부 “폭풍의 벽(The Wall of Storms)”을 기다리던 중 난데 없는 낭보에 환호를 질렀습니다. 그의 단편집이 황금가지 출판사에서 출간된다는 것입니다.


네.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켄 리우 著, 장성주 譯, 황금가지)”가 바로 그 책입니다. 이 책은 원서가 없습니다. 바로 “종이 동물원”을 통해 우리나라에 켄 리우를 소개하였던 장성주 번역가가 켄 리우와의 협업을 통해 작품을 고르고 번역하여 엮은 해외 어디에서도 출판된 적이 없는 한국 오리지널 단편선이거든요. (참고로 장성주 번역가는 재미없는 작품은 번역하지 않는다는 지론을 가진 번역가로 바로 “종이 동물원”을 통해 유영번역상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책을 처음 받아 들었을 때의 느낌은 ‘참 아름답다’였습니다. 책 표지를 장식한 요시마사 츠치야 (土屋仁応, 1977~)의 나무 조각상부터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 냅니다. 

퇴근하고 늦은 밤 읽기 시작했고 바로 새벽까지 다 읽어버렸습니다. 보통 작품집이라 하면 한 두 작품은 취향에 맞지 않거나 재미가 떨어지는 작품이 있는 법이지만 이 책은 (번역가의 지론처럼) 단 한 작품도 빠지는 작품이 없습니다. 




Memento Mori. 그렇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생에 그 끝이 있음을 압니다. 누구나 원의 영원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지만 시작과 끝이 분명한 호(弧)와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여기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녀는 죽은 자의 몸을 예술 작품을 만드는 일을 합니다. 호의 끝을 붙잡고 살아가지요. 그녀에게 한 남자가 다가옵니다. 그 남자는 호의 끝을 시작과 이어 영원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기술을 만들지요. 그녀는 그 남자와 함께 영원히 젊음을 누리며 살아가는 원(圓)으로 살아가려 하지만 결국 다시 호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첫 수록작인 ‘호(弧, Arc)’의 내용이었습니다.




 ‘심신오행 (心神五行, The Five Elements of the Heart Mind)’는 최근의 연구 결과 중 하나인 공생 진화한 장내 미생물이 인간의 행동과 성격에 미치는 연구를 바탕으로 전통 의학과 결합한 스페이스 & 이세계 SF로 읽는 내내 뭐라 말할 수 없는 유쾌함을 선사해줍니다. (켄 리우의 작품이 유독 저에게 잘 읽히는 것은 테드 창 + 곽재식 스러움이 물씬 풍기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 중 가장 곽재식 스러운 작품이 바로 이 작품이 아닌가 합니다.)




단백질 접힘 (Protein folding)의 알고리즘은 분자생물학의 최고 난제 중의 하나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결승문자 (매듭문자, 結繩文字) 전통과 결합하여 이야기를 풀어낸 ‘매듭 묶기 (Tying Knots)”는 켄 리우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에 새삼 감탄하면서 짜릿한 쾌감을 맛보는 작품입니다. 




마지막 수록작인 ‘모든 맛을 한 그릇에 (All the Flavors)’는 영문판 종이동물원에 실려 있었지만 한국판에서는 빠져 아쉬움을 샀던 바로 그 작품입니다. 홀로 실크펑크(Silkpunk)라는 장르를 만들어내고 장르 내부에서 그것을 납득시킨 켄 리우의 실크 펑크로서의 첫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 바로 그 작품으로 삼국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동아시아 독자로서는 삼국지를 모르는 북미 독자들에 대해 연민의 정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면서 미국인이지만 ‘중국계’라는 이방인성을 가지고 있는 동양계 작가로서의 비애도 잘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10여년 전에 비해 SF 소설 판매량이 5.5배 증가했다는 소식도 전해질 만큼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00716/101990984/1) 최근 우리나라 출판계는 SF 문학 장르가 전성기라고 하는데 그 덕분에 우리나라에서도 드디어 해외 유명 작가의 오리지날 작품집이 출간되는 좋은 일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오랜 SF 팬으로서 반가운 소식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분들이 SF를 공상에 방점을 둔 공상과학소설로만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켄 리우도 머리말에서 이야기하듯 SF는 미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현재의 이야기를 단지 다른 도구를 활용하여 바라보는 관점을 다르게 할 뿐입니다. SF에서 주로 활용하는 방법이 바로 외삽(外揷, Extrapolation)인데 원래 외삽은 ‘실험이나 관측에서 도출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그 영역 밖의 값을 추정하는 과학적 예측 기법 혹은 방법론’을 의미하지만 SF에서는 ‘현재를 있는 그대로 기술하지 않고 현재의 과학 기술이나 체제, 사상, 역사를 보다 발전시키거나 아니면 방향성을 틀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법론으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이야기라면 차마 하지 못하거나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이야기라도 논리나 체제를 극단으로 끌어올리는 SF라면 이야기를 충분히 전개할 수 있을 정도의 상전이를 이끌어내어 관점의 새로움을 제시’하기 때문에 지금 현실을 더 자세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종이 동물원 (The Paper Menagerie)’에서 종이로 만든 호랑이가 살아 움직인다고 해서 허황되다생각하고 감동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있었을까요? ‘즐거운 사냥을 하길(Good Hunting)’에서 구미호가 나온다고 해서 말도 안되다 생각하고 과학 기술의 발전에 따른 전통의 쇠퇴와 열강의 침탈에 대한 비감을 느끼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미래 과학 기술의 휘황찬란한 향연도, 미래 기술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켜 러다이트 운동을 일으키자는 것도 아닌 단지 켄 리우가 전해주는 이야기 중심에는 사람과 그 사람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있을 뿐입니다.  




앞서 소개한 작품 이외에도 너무나도 훌륭한 작품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이제 책을 들어 켄 리우가 만들어 놓은 세상에 빠져들어 봅시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난 다음 아쉬어 하지 맙시다. “은낭전(The Hidden Girl and other stories)”과 두번째 오리지날 단편선 “신들은 죽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민들레 왕조 (The Dandelion Dynasty) 2부 “폭풍의 벽(The Wall of Storms)”까지 켄 리우의 작품은 계속 출간될 것 같으니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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