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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된 기억의 세계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민경욱 옮김 / 하빌리스 / 2020년 4월
평점 :
순간이동에 의한 여행이 보편화된 세계관에서 여행을 하기 위해 순간이동 장치를 이용하게 되는데 그 순간이동 장치가 오작동을 일으키면서 “나”를 복제하게 됩니다. 모든 신체적 조건이 동일하며 기억마저 공유하고 있습니다. 누가 “나”일까요? 바로 “펀치 에스크로 (탈 M. 클레인 著, 정세윤 譯, 구픽)”의 설정입니다.
기억은 언제나 백업받을 수 있고, 신체는 3D 프린터로 클론을 언제나 출력해서 쓸 수 있는 세계관의 세대 우주선 내에서 누군가 승무원 모두를 살해하고 모든 백업 기억을 지워버립니다. 프로토콜에 의해 출력된 클론들은 이제 모두 유한한 생명과 지워진 기억만으로 시스템을 복원해야 합니다. “내”가 범인일까요? 아니면 “나”는 희생자일 뿐일까요? 아니 애초에 “나”는 “나”일까요? 이 내용은 휴고상 후보에까지 오른 “식스 웨이크 (무르 래퍼티 著, 신해경 譯, 아작)”의 설정입니다.
기억은 신경세포의 연결을 통해 신호를 만들어내고 저장하고 복원함으로써 과거의 학습이나 경험으로부터 획득한 정보를 저장, 인출하는 능력을 의미하고 사고나 추론의 기본 바탕이 됩니다. 또한 기억은 과거의 정보를 바탕으로 미래의 일을 계획하기도 하고 스스로의 인성과 세계관을 만들어내는 기초가 됩니다. 즉 과거이자 미래이며 현재를 살아갈 수 있게 하면서 자아 정체성의 기본이 되는 능력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러한 기억은 참 매력적인 소재로 다가옵니다.
그렇기에 “토탈 리콜”, “메멘토”, “오블리비언”, “인사이드 아웃”이나 블랙 미러 시리즈의 에피소드인 “당신의 모든 순간”과 같은 영상물이나 토탈 리콜의 원작이기도 한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필립 K. 딕 著, 고호관 譯, 폴라북스)”, “테세우스의 배(이경희 著, 그래피비트북스)”, “굿바이 욘더(김장환 著, 김영사)”나 앞서 언급한 “펀치 에스크로”, “식스 웨이크”와 같은 SF 소설 등 대중 문화의 각종 작품들에서 기억을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H.M으로 알려진 헨리 구스타브 몰레이슨이라는 사람은 뇌전증을 치료받기 위해 ‘해마’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습니다. 뇌전증은 치료가 되었는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해마는 장기기억을 부호화하여 저장하는 부위인데 이러한 해마를 절제해버렸으니 새로운 장기기억을 형성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즉, H.M에게는 언제나 현재만이 존재할 뿐 과거와 미래가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H.M의 사례는 기억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는 희귀한 사례였습니다.
그런데 모든 인류에게 이러한 장기기억이 사라져 버린다면 과연 어떨까요? “분리된 기억의 세계(고바야시 야스미 著, 민경욱 譯, 하빌리스)”에서는 이러한 질문을 진지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은 알 수 없는 이유(작중에서 나중에 그 이유가 나오기는 합니다)로 모든 인류의 장기기억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혼란의 와중에 기억의 신규 생성이 막혀버린 상황에서 인류가 문명과 시스템을 유지하고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1부)과 외장메모리가 인간의 장기기억을 대체한 이후의 여러 이야기(2부)를 다룬 연작 소설입니다. 장기기억 없이 어떻게 시스템을 지켜내는지에 대한 분투를 다룬 1부도 재미있지만, ‘대망각’ 이후 기억과 자아정체성 문제에 대한 사고실험을 본격적으로 다룬 2부의 이야기는 정말 흥미진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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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