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 청아출판사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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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고통을 껴안을 것이냐, 그것을 피할 것이냐. 운명의 손을 잡고 고통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질 것이냐, 운명의 손을 뿌리치고 순간의 안녕에 몸을 맡길 것이냐의 문제는 결코 간단치 않았다. 그렇게 때문에 나는 흑과 백의 갈등 속에서 고민해야 했고, 아직 아무런 결론에 다다르지 못했음을 솔직히 시인한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도 내 삶에 있어 어느 한 부분이며, 과업이라면? 다만 언젠가 이러한 갈등이 해소될 날을 기대할 뿐이다. 빅터가 고통의 사슬을 스스로 푼 것과 같이.

문제를 단순하게 만들려 해서는 안된다는 그의 충고대로 아직은 나는 계속 갈등할 수밖에 없다. 인생에 대해 그것도 자신의 삶에 대해 섣불리 결론 내릴 수는 없다. 삶은 그리고 내 삶의 이유는 아직은 한가지로 정의 될 수 없으며, 아직 발견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인종과 국적과 시공간을 초월하여 어느 곳에서도 나는 스승을 찾아낼 수 있다. 그들은 빅터와 같이 좋은 방법과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주고, 또 어두운 밤에 희미한 빛처럼 나를 인도한다. 예를 들면 어린왕자의 장미에게서, 또 여우에게 있어 황금들판, 생 떽쥐베리에게 있어 사막 위를 홀로 빛나는 작은 별처럼, 작은 사물들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 찾는 방법에 대해 알려 주기도 한다. 니체는 또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어떠한 ‘방식’에도 견딜 수 있다

기진맥진한 몸에, 잿빛 얼굴에,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가’ 하는 감탄을 하는 법을 잊지만 않는다면, 실로 살아 가야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마치 what a wonderful world가 울려 퍼지는 vietnam 전쟁과 같이, 인간은 어떠한 순간에도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그 아름다움이 인류에 대한 슬픔일지라도. 그리고 인간은 느낄 수 있고, 작은 것에 감동할 수 있고, 나아가서 자신의 의지와 선택에 따라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자유의지와 미래에 대한 기대로 충만한 빅터의 영혼을 아우슈비츠가 삼킬 수 없었듯이...

‘기대’에 대한 작지만 교훈적인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나라에 위대한 왕이라고 칭송받는 한 왕이 있었다. 어느 날 그 왕이 나들이를 하다가 꽃을 키우는 농부를 만나게 되었다. 위대한 왕은 그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그러나 왕은 그가 언제나 들을 수 있었던 대답이 아닌 전혀 다른 견해를 들어야만 했다. 농부는 “바로 여기에 있는 이 꽃들입니다” 라고 말했다.
위대한 왕은 분노하여 농부를 감옥에 가두었다. 어느 날 왕이 감옥에 갇힌 농부에게 찾아와 다시 물었지만 역시 대답은 같았다. 그리하여 더욱 분노한 왕은 농부에게 “그 꽃이란 것이 그토록 위대하다면 감옥에서 그 꽃을 피워보거라”하고 명령하였다. 농부는 묵묵히 조금의 흙만 있으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농부는 한줌의 흙을 받아 감옥 안의 작은 창 위에 모아놓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비웃었다. 몇 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농부는 한 줌의 흙에 조금의 물을 적시고, 햇빛을 정성스럽게 쬐어주었으며, 바람을 막아주기도 하였다. 어느 날 감옥 안의 작은 창에는 놀랍게도 작은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농부는 꽃을 피우리라는 과업을 선택하였고, 언젠가 꽃씨가 날아와 꽃을 피우리라는 믿음과 기대를 잃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그는 꽃을 피웠고, 꽃이 피어날 것이라는 믿음과 기대들 가짐으로 해서 감옥에서의 고통스런 순간 속에서 스스로 자신을 구원해 낸 것이다.

이 모든 진리와 교훈적인 이야기들을 뒤로하고, 그러므로 나는 흑과 백의 갈등 속에서 ‘갈등’하되, 언젠가 옳은 방향에 멈추어 서리라는 믿음을 잃지 않고 - ‘그 별’과의 약속을 잊지 않고 - 순간에 충실할 것이다.

나의 자유의지와 올바른 선택에의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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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도시 이야기 - 상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시오노 나나미 지음, 정도영 옮김 / 한길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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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살아가면서 수없는 선택들에 직면하게 된다. 만약 우리가 이탈리아로 침입해오는 야만인들에게 쫓기는 상황이라면, 이제 더 이상 발 디딜 한 뼘의 땅조차 남아있지 않다면,과연 어떠하겠는가? 설사 그곳이 상식적으로 보았을 때, 살아가는데 좋은 요건의 토지가 아니더라도 이미 그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베네치아의 지리적 특성은 곧 그들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에 영향을 주었고, 이것은 곧 베네치아 특유의 정치경제체계에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게된 결정적인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괴테의 말처럼, 베네치아에 사는 사람들이 그토록 독특한 인격으로 바뀌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베네치아가 다른 어떤 도시와도 비교할 수 없는 도시라는 것을 볼 때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베네치아의 원수 피에트로 오르세올로 2세의 정책을 살펴보면 베네치아가 모든 국가적 에너지를 ’교역’과 ‘외교’에 집중한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해상의 고속도로의 건설에서부터 비잔틴과 신성로마제국에 종속하지 않고 독립성을 유지한다든가, 비잔틴제국의 방위를 맡아 아드리아의 경찰역을 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베네치아는 중세의 ‘이코노믹 애니멀’답게 오직 장사에 국가의 존위를 결정지운 것이다.

중세를 온통 혼란스럽게 했던 교황과 황제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고, 비잔틴령 전역에서의 완전자유통상권을 얻은 것은 베네치아 상업의 비약적 발전 기틀을 확립한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유난히 경제적이었던 그들의 승리였던 셈이다.

이러한 역사가 주는 교훈으로 볼 때, 우리 나라가 여지껏 세계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뿐이다(참고로 나는 비관론자도 회의론자도 아니다). 그리고 문득 이 일본 섬나라 저자가 작은 갯벌나라 이야기를 두 권이나 써냈는지 그 저의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경제대국인 일본이 베네치아에게 배울 것이 또 있단 말인가? 베네치아도 그리고 일본도 우리의 정서와는 너무나 상반되어서 약간의 거부감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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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고라스의 바지
마거릿 버트하임 지음, 최애리 옮김 / 사이언스북스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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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과학의 역사는 다분히 남성적이다. 이렇게 내가 자신있게 단언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책에 있다. 마치 난 그 동안 거대하고 위험한 음모에 관한 모든 진실이 담겨진 금서를 우연히 발견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어 거칠게 책장을 넘겼던 것이다. 그 동안 내가 여성들은 과학이라는 학문에 적합하지 않다는 일반적 믿음과, 수학적 능력에 우리들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통념에 대해 적극적으로 논리적인 반박으로 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그 동안 과학의 역사에 무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뛰어난 여성과학자들도 과학이라는 고매한 학문의 여성혐오증적 발작증세로 인하여 과학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는 역사적 사실로 미루어보아, 과학사 속에 감추어진 금기의 진실을 알아낸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 있을 것이다.

남성주의적 과학역사의 허구성은 생각보다 비밀스럽지도 그다지 교묘하지도 않다. 그러나 상당히 노골적이고 또한 놀랍도록 체계적이며, 거시적 관점에서 볼 때 엄청난 인내력을 보여주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들은 히파티야와 마리아 빙켈만, 그리고 에밀리 뒤 사틀레 등등의 위대해져야 마땅했던 과학자들을 성(性)적 이분법으로 과학사에서의 그들의 역사적 업적들을 의도적으로 간과하였으며, 생물학에서 여성과학자들이 이룩해낸 수많은 업적들 또한 업신여기고 있다.

그들은 아마도 자신들이 만든 유리천장이 결국은 유리이므로 깨어질 수밖에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생각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녀들이 유리천장을 깨뜨릴 때에는 신념을 가지고 헬렌의 말을 되새기면서 새로운 과학을 만들기 위해 아프락사스가 될 것이다.

비상하려는 충동을 느낄 때에는 절대로 포복하라는데 동의할 수 없다.
- 헬렌 켈러 -

과학문화를 변화시키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두 성의 공동의 연대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일방적인 남성의 ‘지배’에서 여성의 ‘참여를 인정’하고, 진실로 ‘생산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기막힌 만남이었다고 여겨지는 브라헤와 케플러의 그것보다 더, 어쩌면 그것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결과를 양산해 낼 가능성이 매우 크다.

두 성(性) 공동의 연대가 중요한 이유는,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길은 한 가지 길일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그 동안 과학을 주도해왔던 다른 성은 수리물리학적인 방법론에 치우친 경향이 있으므로, 이제 또 하나의 성이 할 일은 다양성과 복잡성,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우주의 원리와 진리에 관해 되도록 많은 프리즘으로 그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아마도 과학에 있어서 여성과 남성이 연대한다면, 보다 더 그것에 근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기존의 남성 중심 지배주의적 과학이 미처 관심을 두지 않았던 - 그것이 설사 의식적이고 조작적이었더라도 - 다른 방면에서의 인류의 문제에 대해 해로운 인식의 방법으로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이다. 사회에 무책임하지 않은 학문으로서의 과학을 위해 이 기막힌 연대는 사회 전반의 문제들에 대한 적극적인 기여를 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과학적 여성에 대한 기존의 통념들을 과감히 부수고, 새로운 창조를 위한 발걸음을 옮기기 위해 우리 두 성(性)은 ‘진리의 횃불을 함께 들어야’ 한다. 이것은 더 이상 과거의 소극적인 권유도, 제안도, 충고가 아니라 인류의 존망에 대한 마지막 경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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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개정증보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김태언 외 옮김 / 녹색평론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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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그 미개한 곳에서 선진문화가 배울 것이라고는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가 주장하는대로 정말 그 미개한 문화로부터 우리가 배울 것이 있다면, 저자는 다만 지겨운 모더니티 때문에 복에 겨운 불평을 하는 것인가? 아니다. 라다크가 보여주는 것은 인간이 자연의 품에서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진리이다. 우리는 ‘진보’ ‘개발’의 패러다임 덕택에 본디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진정한 ‘풍요’와 ‘인간다움’을 잊고 살고 있다. 아직 ‘진보’ ‘개발’의 논리에서 조금 멀리 있는 라다크는 그들 나름의 전통적 생활방식으로서 우리를 계몽시킨다. 전혀 다른 의미의 계몽을.

우리의 삶이 디지털적 삶이라면, 라다크 사람들은 아날로그적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생활양식은 현대의 생활양식에 비해 훨씬 ‘인간적’으로 보인다. 그곳에선 모든 것이 여유롭고 평화스럽다. 선진문명에서는 결코 찾아 볼 수 없는 자연과의 긴밀한 유대, 타인과의 친밀함, 노동의 즐거움 등이 있다.

라다크는 단순한 연장 덕택에 일을 하는데 오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라다크 사람들은 넉넉한 시간을 보낸다. 일을 오래하는 데도 그들은 불행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천천히 여유롭게 일한다. 현대의 선진문명의 사람들처럼 귀에 핸드폰을 대고, 손으로 마우스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퀭한 눈으로 모니터를 쳐다보지 않는다. 그들은 한번에 한가지 일을 즐겁게 한다. 우리는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하며 퇴근 시간만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린다. 우리의 진짜 삶은 퇴근시간 이후에 비로소 시작된다. 반면 라다크 사람들은 분을 셀 필요도 없다.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지만 자기들 속도로 웃으며, 노래하며 일한다. 사실 일과 놀이는 그닥 구분되지 않아 보인다.

우리는 어떠한가? 누군가 웃으며 노래하며 일한다고 생각해 보라. 정말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상상이다. 물론 그가 코메디언이라면 웃으며 일하겠다. 물론 그가 가수라면 노래하며 일하겠다. 그러나 라다크 사람들은 일하며 스스로가 코메디언이 되고, 가수가 된다. 라다크의 삶과 문명화된 삶은 이렇게 질적으로 다르다.

전통적인 생활방식에서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별로 경험하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에는 평화가 깃들어 있다. 그들은 우리보다 ‘조금’ 가난하지만 우리보다 ‘훨씬’ 행복하다. 그들은 우리처럼 매년 유행따라 입을 화려한 옷도 없고, 매일 다른 메뉴의 다국적 음식들을 식탁에서 먹지도 못한다. 그들은 인터넷과는 너무나 멀리 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보다 더 건강하게 잘 산다. 그들의 이웃과 함께 휴머니티를 나누며.

이것은 우리들의 관점에서 보면 완전히 유토피아 그것이다. 누가 디지털이 우리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우리를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라고 했는가? 바로 과학기술을 맹신하는 사람들이며, 컴퓨터에 미친 광인들과 미래학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기술, 과학적 진보 없이도 라다크인들은 스트레스 없이 즐겁게 노동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에게서 배워야한다.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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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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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소설은 무엇인가를 한참동안 응시하는 예민한 시선으로 삶의 순간순간을 마치 스틸사진처럼 미세하게 포착해낸다. 또한 그녀의 소설 속의 사람들 대부분(물론 극단적인 방법으로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은 비극적인 삶의 운동 속에서도 각자의 쳇바퀴를 멈추지 않는다.

그녀의 이야기에는 감각의 모든 국면이 담겨 있다. 그 감각은 때로는 여섯 번째 감각이 되어, 읽는 이로 하여금 알 수 없는 감정이입의 상태로 만들어버린다. 그녀의 말에는 마술이 걸려 있다. 이 마술에 걸린 독자는 그녀와 함께 외딴 방에서 현실로, 현실에서 다시 외딴 방으로 돌아가길 반복한다.

이렇게 신경숙의 문체는 감각적이며, 여성적인 서정주의를 갖고 있다. 그녀의 언어에서는 여성이 느껴진다. 또한 망설임이 많고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소설 속 주인공들의 대부분은 신경숙식의 문체가 만들어낸 특별한 캐릭터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생생하게 표현된다. 주인공의 망설이고 머뭇거리는 수동적이고 소극적이며 자기 은폐적인 성격은 그녀의 언어가 가장 확실히 섬세하게 표현될 수 있는 가장 최상의 것이다.

그러면 신경숙식 언어는 다분히 여성적이므로 한계가 있는 것일까? 또 여성적인 언어와 감성은 남성들에게는 낯설고 이해하기 힘든 것이므로 남성독자들에게 글읽기의 부담을 주는 것은 아닐까? 그녀의 소설은 그러므로 독자를 규제하는가?

외딴 방에서 신경숙은 슬픔의 냄새를 풍긴다. 구체적인 사건, 일상적인 이야기들의 주변을 맴돌며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조용히 살짝 발을 내딛는 듯한 담담한 화법이 고통스러운 삶조차 슬프도록 아름다운 저녁 노을을 바라보는 듯하게 한다.

소설이나 문학을 읽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그야, 혹 “베스트셀러인데 당연히 한 두 권쯤은 읽어야하지 않겠냐”하는 사람들이 그 소설이나 문학을 어쩌면 그토록 간단히 읽어버리는지 난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이런 과시적인 책읽기에 대한 비판을 하는 나는, 그러나 교과서적인 책읽기에 길들여진 사람이다. 공부거리로 책을 읽는 버릇은 이미 오래전부터 길들여진 습관으로, 책을 읽으며 요약하고 주제를 파악하고 공식화해버리는 이 습관 때문에 문학은 나에게 어려운 텍스트인 것이다.

문학은 삶과 따로 노는 지식이 아니라 그 자체이기 때문에, 문학소설을 읽을 때는 창조적이어야 하고, 비유적인 사고를 해야하고, 감응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도식적인 책읽기를 행해왔던 나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낯선 책읽기이며, 어려운 책읽기이다.

그렇지만 문학을 읽는 것은 다른 사회과학서들 혹은 이론서들, 교과서를 읽는 것과는 또다른 차원의 지식과 경험, 그리고 감동을 주는 것이므로 우리는 문학을 읽어야 한다. 특히 그것이 낯설고 또 힘든 사람은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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