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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만들기 - 왜 우리는 교육을 받을수록 멍청해지는가
존 테일러 개토 지음, 김기협 옮김 / 민들레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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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통쾌한 책을 만났습니다. 미국교육도 정말 우리만큼이나 엉망인가봅니다. 작가가 이토록 성토하는 걸 보면 말입니다. 씁쓸한 현실을 뒤엎자는 선동이 허무맹랑하게만 들리지 않는 것은, 실제로 우리 교육의 문제점이 도저히 어떤 한 부분에만 메스를 대기엔 너무나 광범위한 암세포 덩어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책을 통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교육문제에 보다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행동을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도 작가가 말한바대로 강의실 안에서 최대한 게릴라전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건승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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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의 사회
장 보드리야르 지음, 이상률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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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지고 있는 몇 가지 개념들은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신화적 논리에 유린된, 조작되고, 한껏 부풀려진 허위이다. 그 몇 가지 개념들은 풍요와 행복, 그리고 평등이다.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풍요로움이란, 결국 쓰고도 남고, 버리고도 남을 만큼의 사물이다. 수량화 혹은 장부상에 기록되어있는 논리적인 연산들은 풍부함의 실제적인 증거가 된다. 또한 그것은 본래의 목적과는 상관없이, 그리고 어쩌면 사물의 질(質)에도 관계없이 ‘많아 보이면’ 되고, 상대적으로 무엇인가 특별한 상징적 의미로 ‘보여줄 수 있기만’하면, 그 값을 지불한 사람에게 충분한 보상을 한 것이 된다.

풍요는 행복함의 조건이 된다. 오늘날 가난한 사람이 스스로를 ‘나는 가난하지만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다’라든가 ‘가난은 결코 행복의 장애가 될 수 없다’고 감히 말하기란 힘든 일이다. 풍요는 빈곤과 나란히 놓여져 있을 때만 빛을 발하기 때문이며, 빈곤이 없는 풍요로움이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신화는 계량가능하고, 사물과 기호로 측정될 수 있는 물질적 복리, 안락이어야 하므로 행복에 대한 개인적 가치추구의 위에서 군림한다. 즉 사물과 사회적 성공 및 명백한 기호가치 앞에서의 평등으로 가치 추구의 본질이 바뀌어 버리는 것이다. 사물과 재화의 사용가치 앞에서의 평등이 보편적 평등이 되면서 행복과 평등의 신화는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등은 추상적인 것이다. 또한 사물의 사용가치 앞에서의 평등의 신화적 논리 속에는 보다 근본적인 차이와 차별이 존재한다.

세계의 현재는 바로 이 ‘소비’가 생활 전체를 사로잡고 있으며, 세계인의 거의 대부분이 이런 구조적 맥락에서 소비의 시대에 부합하는 활동을 하게 된다. 그것은 거의 무의식적인 활동이다. 그것이 문제다. 자신의 경제활동 혹은 사회활동을 시대 속에서 읽어낼 수 없다는 것. 그것의 논리를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 그것.
그러므로 소비활동은 일상을 지배하고 결국 개인은 사회의 논리에 세뇌 당한다. 소비하는 것이 우리 세계의 도덕인양. 강제된 의무가 아닌 권리의 향유인양. 그러므로 현대의 일상생활에서 대부분의 경우 소비는 유도된 소비형태를 보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현대의 논리이며, 구조이며,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소비사회의 계략은 인간의 욕구를 계속 유지․이동시킴으로서 그 자체를 보존한다. 욕구를 유지․이동시키는 소비의 계략의 과정은 추적의 결과, 엘리트층으로부터 다른 사회계층으로 주로 ‘위에서 아래로’의 갱신이라는 법칙에 의해 욕구를 이행시킨다. 그러므로 욕구의 생산과정 자체도 불평등하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번 확인해 볼 수 있다. 즉 소비의 전 영역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차이의 논리가 계속 그것을 되풀이하는 과정의 논리이지, 소비자 대중의 자연발생적인 욕구가 아니며, 전체적으로 풍요롭고 평등한 소득의 상승이 아닌 것이다.

즉 욕구의 무한한 재발(再發)이라는 사실은, 욕구라는 것이 사물에 대한 욕구가 아니라, 차이에의 욕구라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물이 계속적으로 그것의 양적인 면에서 충분하더라도 완전한 만족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완전한 만족과 행복과 평등이 약속되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가 노동을 하고, 경제활동을 하는 목적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간단히 말해서 ‘왜’ 힘겹게 일하고 ‘왜’부질 없는 뽐내기의 목적으로 물건을 구입해야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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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 가정 폭력과 여성 인권
정희진 지음 / 또하나의문화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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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흔히 따뜻하고 아늑한 곳으로 표현된다. 그곳에서 우리는 보호받고 정서적인 안정을 느껴야 한다. 이런 상징적인 ‘가족’이라는 이미지는 사회적으로 아주 오랫동안 고착되어온 전체적인 사고방식이다. 앞치마를 두른 다정하고 포근한 엄마, 씩씩하고 듬직하고 돈을 벌어오는 아빠, 귀엽고 예쁜 딸, 말썽꾸러기 아들. 대개 이런 도식화가 자연스럽다.

우린 가족 안에서 행복해야한다고 배워왔다. 가족은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절대적이고 소중한 최고의 ‘가치’이다. 이런 ‘가족’의 의미는 점점 더 소중한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위기에 내몰린 현대사회가 지켜야할 마지막 보루로서. 그러나 과연 정말 그러한가?

가족 안에서는 항상 다툼이 있다. 그 다툼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다툼이 폭력으로 이어질 때, 그것은 다른 문제다. 그것은 위험하다. 그것은 굴욕적이다.

권력 관계는 항상 위계질서를 요구한다. 그리고 위계화된 가족은 흔히 성별로 분류된다. 아버지(남성), 어머니(여성), 아들(남성), 딸(여성)이라는 가족 구성원은 성별적 구분을 기준으로 다음과 같이 위계화 된다. 대장-아버지, 총무-어머니, 대장의 후임역할로서 내정된 아들, 마냥 귀엽고 예쁘기만한 총무보조-딸.

이런 위계질서의 문제는 가족 구성원들 간의 갈등이 발생했을 때, 그것이 합리적이고 협력적인 해결이 아닌 폭력과 명령 형태로 종결된다는 점에 있다. 위계의 피라미드 아래쪽에 있는 가족 구성원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억압이며, 폭력이다. 평상시에 아내와 딸은 가족 구성원으로서 완벽한 한 사람이었지만, 실질적으로 그녀들이 가족 내에서 당연한 권리를 요구하는 발언을 한다거나 불평을 하면, 그것은 곧 ‘정치적 혁명’이며, 가족이라는 안정된 기존 질서에 반하는 ‘쿠데타’로 간주되어 즉시 그녀들의 위치를 확인시켜주는 다음 행동들이 나타난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폭언, 신체적 폭행 등의 ‘폭력’인 것이다.

‘고통’이란 뜻의 의미는 누구나 다 안다. 그러나 그건 머리 속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만약 어떤 병 때문에 내 팔이 서서히 썩고 있다고 치자. 썩고 있는 그 순간 순간의 아픔이 곧 고통이다. 끊임없이 나오는 묽은 진물, 찢어지는 듯한 피부의 통증, 또 팔을 잘라내야만 한다는 공포. 이것이 혼합된 것이 바로 ‘고통’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잘라내기가 쉬운가? 결코 쉽지 않다. 일상도 그런 것이다. 일상에 뭔가 잘못된 것이 있음을 알더라도, 제 3자의 입장에서 그것의 해결방법이 명쾌하더라도, 당사자에게 일상을 변혁하기란 자신의 팔을 잘라내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폭력적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많은 여성들을 답답한 나머지 비난하고 무시할 어떤 권리도 우리에겐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어려움에 있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아 사회적인 경험의장으로 끌어내는 일이다. 그리하여 여성 개개인이 사회 전체적인 힘을 받게 될 때, 그 때가 바로 페미니즘이 승리하는 날이 될 것이다.

일상은 언제나 제일 마지막에 변화한다. 팔을 잘라내는 것은, 참다못해 가장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최후의 수단일 때가 많다. 그렇지만 우리는 팔을 잘라내는 것을 더 이상 미루고 있을 수만은 없다. 팔이 썩어 들어가 결국 다른 신체부위로 ‘전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하루빨리 ‘썩은 부분’을 도려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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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기
반다나 시바 / 솔출판사 / 199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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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위기는 진행중이다. 더 이상 환경위험 따위는 새로운 논쟁거리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알 고 있는 듯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지 않고 또 그 앎 자체의 신뢰도와 타당도에 대해서조차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으며, 환경과 관련하여 새로운 주제와 다른 차원의 이데올로기적 담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지금의 상황이 ‘위기’라는 주장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면, 이 시대의 가장 믿음직스럽게 여겨지고 있는 ‘과학’에 관해서 20세기 현대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는 토마스 쿤 ‘패러다임’ ‘정상과학’ ‘과학혁명’ 등의 주요 개념들과 과학발전의 모형을 제시한 학자로 쿤은 과학발전이 누적적이기보다 혁명적이라는데 요지를 두고 있다.
의 주장대로, 이제는 구패러다임을 폐기시켜야 할 때이다. 구패러다임이 ‘남성주의적인 과학’ ‘환원주의’ ‘폭력 지향적인’ ‘획일적이며 기계적인 인식방법’ 등이라면, 신패러다임은 ‘여성적인 원리의 생태주의’ ‘다양성에 기반한’ 그리고 ‘비폭력적인 사회의 지향’등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패러다임의 폐기에 있어서 전제되어야만 될 것은, 지금까지도 잘 먹혀들고 있는 구패러다임의 문제점들과 비포용성들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생태학적 입장에서 볼 때, 고수확의 품종 씨앗은 ‘기적의 종자’라고 불리는 것과는 달리 자원 낭비적이다. 물과 비료가 많이 요구된다는 것 이외에도, 씨앗이 해충과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렇게 도대체 생태학적으로 볼 때에 경제적이지도, 생산적이지도, 효율적이지도 더구나 기적적이지도 않은 이러한 방법들은, 경제학적 입장에서는 이것이 이윤창출에 있어서는 ‘경제적’이고, ‘생산적’이고, ‘효율적’이며, 게다가 ‘기적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생태학적 입장에서 자연을 볼 필요가 있다. 자연환경 위기의 시대에서 생태학에서 배우는 것만큼 더 좋은 방법은 아무 것도 없다. 녹색혁명기술 때문에 가장 비옥한 인도의 토양이 죽어가고 있고, 농경지가 사막으로 변하고 있으며, 해충제는 생명의 네트워크를 교란시키고, 토양을 중독 시키고 있다. 그것뿐인가, 인류의 중요한 지적 재산인 여성을 소외시키고 있으며, 가장 경험적 지식이 풍부한 프로페셔널 농부들과 부족민, 또한 미래의 싹인 어린이들까지 죽음의 그림자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환원주의적 과학지식은 생태학적으로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남성 과학자와 전문가들은 생태학에서 배우는 것이 지식이 퇴화하는 지름길인양 치부하고 있다. 그러나 생태학적 입장에서 다시 배운다면, 그것은 환원주의의 모순성에서 길을 잃었다가 다시 올바른 길로 돌아오는 것이다 본문 중 p79
.그리고 과학적 진리가 입증가능하고 중립적이기 때문에 정당화된 신념이며 따라서 보편적이라고 주장하지만, 생태학적 입장에서 볼 때, 환원주의적 진리는 허위다. 그것은 다만 허울좋은 명분의 ‘진보’로 잘 포장되어 있을 뿐이다. 사실 제3세계를 포함한 인류 대다수(여성과 농부, 어린아이들)의 희생에 따른 결과물인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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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트위스트 1 밀레니엄 북스 19
찰스 디킨스 지음, 박영의 옮김 / 신원문화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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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빈민자에게는 저주받을 카인의 표식이며, 낙인의 자국이 좀 더 보는 사람들(빈민과 자신을 분류하려는 자들)로 하여금 편하게 바뀌었을 뿐인 신구빈법. 세계복지국가의 모델이 되었던 영국의 복지제도조차도 초기에는 구빈 활동의 전반적 조사를 한 결과, 빈민이 너무 많고 재정이 부족하여, 일할 수 있는 자에 대한 너그러운 이해가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판정, 실로 두 발로 걸어다닐 수 있는 인간이라면 모두가 노동능력이 있다고 가정한 뒤 법 집행을 실시한 것이다.

여기서 상기해야할 찰스 디킨즈 소설이 갖는 두 가지 특성이 있다. 바로 대중성과 예술성이다. 내가 어릴적 보았던 만화 이야기로서 올리버 트위스트는 대중성을 대표하고, 지금 대학인이 된 이후에 문학으로서 다시 접해야 하는 올리버 트위스트는 바로 예술적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크리스마스 때면 꼭 빠지지 않던 레파토리 크리스마스 캐럴 역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익히 알려진 소설이지만, 크리스마스 캐럴의 스크루지는 영국산업혁명 이후의 시민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금전 이외에는 아무런 목적이라고는 없는 한낱 물질주의의 화신으로 표현된다.

빈민들은 시대가 요구하는 죄인이 되었고, 그 죄인들은 가난하다는 이유로 인권을 무시당하고, 멸시받았으며, 숨쉬고 사는 동안은 어른이고 어린 아이고 할 것 없이 모두 힘든 노동을 해야만 했다. 구빈법이 처음 제정되었던 본질적인 의미는 퇴색한 채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건 없건 간에 모든 사람들이 일해야만 했으며, 어떠한 정부보조도 기대할 수 없었다.

부양할 가족이 없는 어린아이의 경우는 더욱 비참했다. 그들은 어떠한 보살핌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착취당하고 폭행 당하는 작은 일꾼에 불과하였다. 그들 중의 상당수는 태어나서 한 달이 채 지나가기도 전에 죽었고, 겨우 살아 남은 아이들은 경매되기도 하였으며, 도제생활이라는 그럴듯한 제도에 묶인 채 인권유린을 당하고 있었으니, 그때의 처참한 상황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가 이러한 시기에 태어난 것이 거시적 측면에서(그가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는 면에서) 행운인지 불행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처했던 어려운 상황이 훗날 그에게 작품의 영감을 불어넣은 것만은 분명하다 할 것이다.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어린아이들은 웬일인지 말하는 투가 매우 어른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디킨즈가 어린아이일 적에 아마도 그렇게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올리버에게 자신이 몰랐던 유산이 있었다는 사실과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고마운 신사숙녀분들이 있었다는 점은 아마도 찰스 디킨즈 그가 어려운 시절에 그러한 희망을 가졌을 거라는 추측을 하게 한다.

그의 소설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문체는 매우 복잡한 의미들을 가지고 있고, 상당히 사회 비판적이다. 때로는 그의 독설에서 풍겨 나오는 증오라든지 분노라든지 체념의 말투들이 허탈한 웃음으로 이끄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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