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의 뇌과학 - 나조차 이해할 수 없는 나를 설명하는 뇌의 숨겨진 작동 원리
엘리에저 J. 스턴버그 지음, 조성숙 옮김, 박문호 감수 / 다산초당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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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끌려 읽게 된 책이다. 책의 띠지 속 '인간의 무의식적 행동과 충동을 파악하는 가장 독보적인 안내서'라는 문구는 이 책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우리는 때때로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과 행동 앞에서 당황하곤 한다. 예를 들어 무심코 내뱉는 거짓말이나 설명할 수 없는 불안, 낯선 장소에서 느끼는 익숙함 등과 같은 경우가 이에 속한다. 이 책은 바로 그 낯선 순간들 속에 숨어 있는 뇌의 진실을 들여다 본다. 저자는 무의식을 단순한 본능이나 억눌린 욕망으로 축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계를 자각하고 기억을 구성하며 자아를 형성하는 뇌의 총체적 작동 시스템으로서 무의식을 설명한다.


시각장애인이지만 꿈 속에서 볼 수 있는 이유, 외계인 납치처럼 생생한 환상의 실체, 다중 인격과 환청, 환각과 같은 기이한 사례들은 모두 무의식이라는 거대한 인지 네트워크가 현실을 어떻게 구성하고 재해석하는지를 보여 준다. 이 책은 신경과학의 최선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철학적 질문을 교차 탐구하며 무의식이라는 주제를 과학적 정밀성과 서사적 사례 분석을 통해 구조적으로 접근한다. 즉, 이 책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결정짓는 무의식의 메커니즘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자아 인식의 한계를 과학적으로 해명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


책은 서문에서 우리가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오해하는 지를 극적인 임상 사례를 통해 보여주는 데서 시작한다. 시각을 완전히 잃었음에도 스스로 멀쩡하다고 믿는 환자 ‘월터’의 이야기는 뇌가 외부 세계를 지각하는 데 실패했을 뿐 아니라 그 실패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존재함을 시사한다. 저자는 이를 통해 인간의 지각과 자아 인식이 단순한 감각 입력의 조합이 아닌 뇌 안의 복잡한 정보 처리 시스템과 자기 해석의 결과임을 강조한다.이러한 문제 의식은 곧 ‘블랙박스 모델’로 확장된다. 뇌의 내부 작동을 직접 들여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입력과 출력만을 바탕으로 무의식의 작동 방식을 추론해 나가야 한다. 실제로 연구자들이 사용하는 실험은 대부분 이러한 블랙박스적 접근을 따른다고 한다. 예컨대 의자의 질감이 협상 행동에 영향을 준다는 실험 결과는 무의식의 존재를 가리키긴 하지만 왜 그러한 인과관계가 발생하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는다.저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단지 인간 행동의 표면적인 현상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뇌의 신경 회로와 무의식적 정보처리 시스템 자체를 들여다보려 한다. 철학과 의학, 신경과학의 교차점에서 질문을 중심으로 탐구를 전개해 나가며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정, 선택, 인지 과정이 어떻게 뇌 속의 논리 시스템에 의해 구성되는 지를 분석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책의 1장은'뇌는 보지 않아도 ‘보는’ 법을 안다'라는 흥미로운 전제로 시작하여 우리가 인식하는 현실과 감각의 경계에 의문을 제기한다. 저자는 '시각장애인은 꿈속에서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무의식이 자각을 구성하는 방식에 대한 탐구를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소개되는 포르투갈 수면연구팀의 실험은 특히나 흥미롭다. 연구팀은 선천적 시각장애인을 포함한 참가자들에게 꿈의 내용을 묘사하게 했고 동시에 수면 중 뇌파를 측정하여 알파파 억제 현상을 관찰했다. 이는 시각 경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뇌가 꿈속에서 장면을 ‘그려내려는’ 활동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경학적 증거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활동이 곧 ‘시각’ 그 자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시각장애인은 청각, 촉각, 공간 감각 등 다른 감각들을 종합해 머릿속에서 장면을 재구성하며 그 결과물은 시각에 가까운 감각적 환상일 수는 있어도 시각과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처럼 뇌는 감각의 부재조차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만들어내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1장은 무의식의 본질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통찰로 나아간다. 저자는 인간의 뇌에 의식계와 무의식계가 함께 존재한다고 가정하며, 우리가 겪는 미묘한 감정, 선택, 착각, 심리적 왜곡의 대부분이 이 두 시스템의 상호작용 혹은 간극을 메우려는 보완 작용에서 비롯된다고 분석한다. 특히 무의식은 결코 수동적인 배경 장치가 아니라 감각의 빈틈을 메우기 위해 적극적으로 정보를 엮고, 논리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창조적 시스템으로 작동한다. 시각장애인의 뇌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시야를 만들어내거나 다른 감각을 동원해 세상을 재구성하는 것은 그 명확한 사례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꿈은 그러한 무의식의 활동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무대이다. 뇌줄기에서 무작위로 발생한 신호들은 수면 중 무의식의 지휘 아래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게 되고 그 결과 우리는 터무니없지만 일관된 판타지를 경험하게 된다. 결국 1장은 감각과 현실, 자아와 기억이라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개념들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가변적인지를 드러내며 무의식이 인간 경험의 본질을 형성하는 핵심 시스템임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이 책은 이처럼 우리의 자각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왜 때로는 그것이 현실과 충돌하는 지를 신경 과학의 시선으로 흥미롭게 파헤쳐 나간다.


책에서 말하는 무의식에 관한 이야기는 무척이나 흥미롭다. 책은 무의식이 뇌의 일부 기능이 아니라 뇌 전체가 작동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식이며,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삶의 대부분인 감정, 기억, 습관, 행동, 자아에 지속적이고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저자는 다양한 임상 사례와 실험 결과를 통해 무의식이 단순한 충동이나 억압된 욕망이 아니라, 복잡하게 조직된 인지 시스템임을 설명한다. 꿈, 환각, 다중인격 같은 비정상적 현상뿐만 아니라 일상 속 감정 반응, 습관적 판단, 자동화된 기억 반응 역시 모두 뇌의 무의식적 회로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것이다.


책의 후반부에는 이 무의식이 단순한 정보처리 도구가 아니라 특정한 목적과 방향성을 가진 기능 체계라는 점에 주목한다. 뇌는 끊임없이 외부 자극을 받아들이고 이를 기존 기억·지식과 결합해 삶의 서사를 구성한다. 때로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말 한마디, 스쳐 지나간 이미지, 특정한 분위기 속 감정이 무의식 속에 저장되어 선택과 반응, 사고 흐름에 영향을 미친다. 무의식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개인의 서사와 자아의 통일성 유지다. 인간은 자신을 이해하고 싶어 하며 세상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려 한다. 무의식은 이 자아의 안정성을 지키기 위해 기억의 공백을 메우고, 모순된 경험을 재구성하며, 때로는 사실을 조작해 이야기를 완성한다. 이러한 작용은 반드시 긍정적인 결과만 낳지는 않는다. 기억 장애 환자가 허구의 기억으로 과거를 채우거나 조현병 환자가 정부 음모나 외계 존재를 언급하는 것도 무의식이 자아 붕괴를 막기 위해 극단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는 과정일 수 있다. 이처럼 무의식은 정보의 누락이나 논리의 단절을 견딜 수 없어, 끊임없이 의미를 연결하고 해석을 생산한다.


결국 이 책은 인간의 심리와 행동을 설명할 수 없는 본능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작동하는 뇌의 무의식적 체계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무의식은 감각의 공백을 채우고 혼란스러운 경험을 조직하며 자기 이해와 타인과의 관계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 책은 그러한 무의식을 철저히 신경과학적 근거 위에서 분석함으로써 우리 자신에 대한 통찰의 문을 열어주는 안내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책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끊임없이 작동하는 무의식의 정체를 신경과학과 임상 사례를 통해 치밀하게 파헤쳐 무의식에 대한 흥미로운 사례와 이야기를 전달한다. 뇌는 기억의 빈틈을 메우고 자아의 연속성을 유지하며 혼란스러운 현실을 재구성하는 강력한 이야기꾼이라고 하면 딱 좋을 표현 같다. 그리고 이 책은 인간의 행동과 심리를 단순한 감정이나 본능이 아닌 뇌의 무의식적 작동 원리로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가 ‘나’라는 존재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음을 깨닫게 만든다. '왜 나는 그런 선택을 했을까', '왜 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할까'라는 물음에 이 책은 과학적이면서도 인간적인 답을 제시하여 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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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
슬그림(김예슬) 지음 / 부크럼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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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읽어도 기분이 좋아지게 만드는 책이다. 일상 속에서 스쳐 지나가기 쉬운 순간들을 포착하여 기분 좋은 상상의 이미지와 이야기를 전해주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짓게 만든다. 우리가 매일 걷는 길, 창밖으로 스며드는 햇살, 무심코 펼친 책장 속에서도 어쩌면 기분 좋은 상상과 에너지가 있음을 깨닫게 만든다.


이 책은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따뜻한 시선으로 독자들에게 익숙한 풍경 속에 감춰진 감각들을 다시 일깨운다. 고양이가 말을 걸고 커튼 사이로 은하수가 흐르며 책 속 물고기들이 잉크처럼 번지는 장면들은 이제는 없을 꺼라 생각했던 내 안의 상상력을 다시 흔들어 깨우는 듯하다. 바쁘고 지치는 일상 속에서 잠시 이 책을 펼쳐 그림과 짧은 글을 읽고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의 시간을 선사한다.


이 책은 특별한 사건이나 변화 없이도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충분히 괜찮은 하루를 만들 수 있음에 주목한다. 그렇기에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평범한 하루 틈 사이에서 발견되는 작은 기쁨과 상상의 순간들을 통해 우리가 놓치고 있던 감각을 되살리고자 한다. 프롤로그에서 제시되는 집 앞, 산책길, 자주 찾는 카페, 책상 앞과 같은 장소는 너무나 일상적인 공간들이다. 이런 일상적인 공간과 익숙함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으며 그 속을 찬찬히 들여다 볼 때 고양이의 눈빛이나 커피 향, 택배 도착과 같은 소소한 순간들이 하루를 환하게 밝힐 수 있음을 일깨운다. 그렇기에 이 책을 통해 잠시라도 상상의 세계로 건너가 봄으로써 익숙함을 낯설게 바라보는 시선, 소소함에서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감각을 키울 수 있지 않을까.


 하루의 기분을 색으로 표현한 이 짧은 글은 순정 만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감성적인 일러스트와 함께 어우러지며 더욱 특별한 인상을 남긴다. 하늘빛의 자유로움, 연보랏빛의 고요함, 분홍빛의 설렘. 저자는 우리의 감정이 매일 조금씩 다른 빛으로 피어난다고 말하며 그 다채로움을 따뜻하게 포용한다. '꼭 마음에 드는 색이 아니어도 괜찮아.'라는 문장은 특히나 좋다. 내 마음이 완벽하지 않아도 어쩌면 흐릿하거나 어두운 색일지라도 지금 이 순간의 나를 감싸고 있는 이 감정이 가장 솔직한 진심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섬세하게 감정을 담아낸 문장과 따스한 느낌의 그림이 어우러져 단순한 위로를 넘어 시각과 감성 모두를 자극하며 더 가까이 다가온다. 그리고 그 안에 자연스레 나의 하루를 투영하며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본다.


책으로 가득 찬 방안에 누워 마음에 쏙 드는 책 한 권을 골라 떠나는 소풍과 같은 시간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라서 이 장면의 그림과 글은 더 깊숙이 다가왔다. 그리고 책을 통해 뭉게구름처럼 피어나는 상상과 바람처럼 념겨지는 책장, 그 안에서 마주하는나만의 고요한 여유야말로 일상의 틈에서 나에게 크나큰 힐링의 시간이라 더더욱 이 책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 책은 거창한 위로나 메시지를 전하지는 않는다. 대신 늘 반복되는 일상, 지나치기 쉬운 감정, 그리고 평범한 공간 속에서 문득 피어나는 따뜻한 상상에 집중한다. 저자는 우리의 현실을 억지로 벗어나게 하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의 삶에 조금 더 다정한 시선을 갖게 만든다. 그렇기에 이 책은 특별한 사건 없이도 기분이 나아지고 이유 없이도 웃음이 번지게 만든다. 책장을 덮고 나면 지금 이대로의 하루도 충분히 의미 있고 그 안에는 작고 부드러운 기쁨들이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무언가를 기다리지 않아도 괜찮고 특별한 무대가 없어도 행복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고 나니 오늘 하루는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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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내 여행자-되기 둘이서 3
백가경.황유지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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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시인과 평론가가 함께 썼다는 점에 끌려 읽게 된 책이다. 이 책은 문학이라는 도구를 통해 기억과 공간,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성찰한 에세이이다. 열린책들의 <둘이서> 시리지의 세번째 책으로 시인 백가경님과 문학평론가 황유지님이 공동 집필하였다. 두 사라은 각자의 시선과 언어로 사회적 참사, 역사적 공간, 그리고 잊혀진 고통의 현장을 다시 찾아가 그 의미를 되짚는다. '관'이라는 키워드는 공간이자 연결의 지점이며 관통은 그 안을 직접 지나며 경험하고 사유하는 과정을 뜻한다. 제목에 사용된 '-되기'는 들뢰즈 철학에서 빌려온 개념으로 타자의 자리에 직접 놓아보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이 책은 단순히 사회적 사건을 기록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인천의 성냥공장과 동일방직, 의정부의 뺏벌, 안산과 이태원, 광주 등 한국 현대사의 아픔이 쌓인 장소를 직접 가 걸어보고 개인적인 기억과 집단적 기억에 대해 말하고 해석해낸다. 또한 이 여정은 도시 공간을 사회 구조 속에서 분석하고 문학적 언어를 통해 치유와 연대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일로 이어져 깊은 울림을 전한다.


책은 ‘관’과 ‘통’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삶의 구조와 시간을 관통하는 것들에 대해 말한다. 관은 연결의 공간적 형태다. 상자, 건물, 지하도, 수도관 등 다양한 형태로 도시 곳곳에 존재하며 인간의 삶을 물리적으로 지탱하는 동시에 사회적 관계망을 은유한다. 반면, 통은 시간의 흐름, 정서적 연결, 그리고 고통의 감각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관이 공간의 층위를 구성한다면 통은 그 공간을 지나간 이들의 서사와 정서를 담는 시간적 층위이자 감각의 흐름이라 하겠다. 특히 '산 자의 발아래에는 많은 죽음이 있다'는 문장은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가 단지 현재의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과거의 고통과 상흔이 켜켜이 쌓인 장소임을 강조하는 듯하다. 땅 아래 감춰진 역사와 죽음은 단지 과거가 아닌 현재의 사회 구조와 정서적 결핍을 드러내는 중요한 증표가 아닐까. 최근 반복된 사회적 참사들인세월호, 이태원, 광주 이후 우리 사회가 제대로 된 애도를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며 우리가 잊고 있던 그 장소와 그 이야기를 하나씩 일깨운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는 한국 사회가 이태껏 외면하거나 미뤄왔던 공동의 애도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고통스러운 죽음 앞에서 사회는 얼마나 침묵했으며 우리는 그 고통을 어떻게 소화하거나 외면해왔는가? 저자가 도시의 ‘관’을 따라 걷고, 그 ‘통’을 통해 고통을 기억하며 기록하는 행위는 바로 이 부재한 애도의 자리를 채우기 위한 문학적 실천이 아닐까. 저자는 장뤼크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 개념을 인용하며, 우리가 바라는 공동체가 반드시 완성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공동체란 언제나 불완전하고, 그 안에는 타자를 배제하는 구조적 양면성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저자는 ‘완성되지 않을 공동체’ 즉, 서로의 고통을 기억하며 연결될 수 있는 열린 공동체를 요청한다. 이는 단지 철학적 사유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고통을 인지하고, 감당하고, 애도할 수 있는 사회적 가능성에 대한 문학적 제안이기도 하다. 결국 이 책은 도시와 기억, 죽음과 고통을 관통하면서도 그 관통의 끝에서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기억할 수 있는 지를 묻는다.


책은 다양한 장소를 방문하며 공동체의 기억을 되짚고개인의 서사를 교차시켜나간다. 이 중 나에게 가장 깊이 있는 울림을 전하는 장면은 안산과 세월호, 그리고 기억교실을 다룬 대목이다. 저자는 참사 이후 1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안산을 방문하게 된다. 긴 시간 동안 마주하지 못했던 두려움과 죄책감은 4.16기억교실을 직접 찾으며 깊은 감정의 토로로 이어진다. 텅 빈 교실, 2014년 4월에 멈춘 달력과 시계, 아이들의 이름이 적힌 책상과 액자, 부모의 편지, 친구들의 메모들. 이 공간은 단순한 추모를 넘어 우리 사회가 이태껏 끝내 하지 못했던 애도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기억교실에서 느낀 감정들을 자신이 겪은 교실의 기억과 연결시킨다. 폭력적이었던 학창 시절, 경쟁 중심의 교육 시스템, 부모와 사회의 끊임없는 ‘더 멀리 가라’는 요구들 말이다. 그 기억들과 단원고 학생들이 남긴 교실은 교차하며 '교실'이라는 공간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은 더 이상 단순히 학습의 공간이 아니라, 억압과 슬픔, 그리고 때로는 추모와 연결의 장소이기도 하다.


특히 인상 깊은 장면은 ‘기억교실’의 게시판에서 발견한 박노해 시인의 시 <길 잃은 날의 지혜>와, 여전히 가방에 매달고 있는 작은 노란 리본에 관한 이야기다. 저자는 리본을 보는 순간마다 세월호 참사를 단지 기억하는 것을 넘어 지금도 옳은 일을 위해 고민하고 애쓰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믿음에 마음이 든든해진다고 고백한다. 애도는 잊지 않는 일이며 기억은 곧 행동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문학이 어떻게 사회적 실천이 될 수 있는가를 진지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저자는 마지막으로 시가 있어야 할 자리에 대해 말한다. 낭독회에서 읽은 시, 교실 게시판에서 발견한 시, 그리고 누군가의 일상 속에서 조용히 머물다 가는 시. 그것은 눈물과 함께 고통을 감내하며 존재하는 자리이며 세월호 참사 이후 남겨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공간이다. 저자는 304명의 아이들이 만들어 준 그 교실 안에서, 우리가 함께 고민하고 배우며 살아가야 할 이유를 묻고 있다.


결국 이 책은 사회적 재난의 현장을 단순히 기억의 대상으로만 삼지 않고 있다. 그 장소를 직접 찾아가고 그 속에서 감당되지 못한 상처와 불완전한 애도의 현실을 기록함으로써 애도가 개인의 감정 차원을 넘어 공동체가 책임져야 할 과제임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곳곳의 장소에서 우리 사회가 감당하지 못했던 애도의 공백을 드러내며 그 부채를 어떻게 사유하고 회복할 수 있을 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렇기에 ‘관내여행자-되기’란 결국 자신이 속한 공간을 다시 살피고 그 안에서 지속적으로 책임의 감각을 유지하려는 시도에 가깝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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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는 파도 파도 파도
이정록 지음, 윤정미 그림 / 창비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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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부터 동시가 지닌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이정록 시인의 다섯번째 동시집으로 이번 작품에서도 평범한 일상을 소재로 하여 어린이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세상에 대하여 유쾌하게 담아내고 있다. 시인은 다양한 사회적 단면을 단백하면서도 비플어진 시선으로 포착하며 복잡한 현실 속에서도 동심이 가진 힘을 놓치지 않고 있다. 이 책에 실린 총 53편의 동시는 단순히 재미를 주는 것을 넘어서 어린이가 세상을 이해해가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감정과 성장의 순간들을 섬세하게 담아낸다. 동시에 어떤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힘을 길러주는 메시지를 포함하는 교육적인 가치 또한 가지고 있어 참 좋다.


이 책에 실린 <강아지>는 시인의 유쾌한 동시 세계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시인은 '손!'하면 '발'을 내미는 강아지의 행동을 단순한 웃음을 넘어 인간과 동물 사이의 교감과 일상의 정서로 잘 포착해 내었다. 짧은 시 속에서 손발이 잘 맞는다는 익숙한 표현을 재치 있게 활용하며 동시만의 언어 유희와 따뜻한 시선을 담아내어 읽을수록 더 재미가 있다.


그렇다고 이 책에 담긴 동시 모두가 재미있는 작품만을 담은 건 아니다. <중심>이라는 작품에서 시인은 가족 안에서의 중심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따라가며 존재와 부재의 의미를 섬세하게 담아내고 있다. 처음에 우리 가족의 중심은 나였다가 강아지 초코를 입양한 후 중심은 초코로 옮겨가고 초코의 감정과 상태에 따라 가족의 분위기도 달라진다. 초코가 아프면 눈물샘의 중심이 되고 초코가 꼬리치면 햇살도 춤을 춘다는 표현에서는 초코와의 일상이 얼마나 가족 깊숙이 스며들었는 지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초코가 세상을 떠난 후 남겨진 깨물어 놓은 리모컨이 빈집의 중심이 되었다는 마지막 구절은 단순한 사물하나로 상실의 공허함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시 전반에 흐르는 담담한 어투는 감정을 억지로 끌어올리지 않으면서도 초코의 부재로 인한 슬픔을 더욱 깊이 전달한다.


표제작인 <파도>는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다. 시인은 파도를 통해 '바다, '땅', '책'이라는 외부 세계를 차례로 탐색하며 마지막에는 그 시선이 나에게 이른다. 이 흐름은 끊임없는 탐구 끝에 자아로 향하는 자기 성찰의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반복되는 '파도 파도'라는 구절은 리듬감을 형성함과 동시에 어린이가 맞닥뜨리는 삶의 물결과 그것을 넘어서는 과정을 은유한다. 특히 마지막 연에서 '나는 / 끊임없이 / 파도를 넘는 수평선'이라고 말하는 부분은 시적 화자가 단순히 파도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는 존재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수평선이라는 이미지는 끝없이 확장되는 가능성과 미래를 향한 의지를 상징하는 듯하다. 자기 안의 파도를 인식하고, 그 너머를 꿈꾸는 이 시는 이 책의 전체적인 주제인 어린이가 겪는 내면의 변화와 성장 를 강하게 드러낸다. 이렇게 이 책을 통해 시인은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하면서도 어린이 독자에게 부드럽고도 힘찬 응원의 메시지를 전한다.


결국 이 책은 시련과 혼란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어린이의 성장 이야기를 그려낸다. 표제작 <파도>처럼 어린이는 자기 안의 파도를 인식하고 이를 넘어서며 수평선 너머로 나아간다. 시인은 이러한 여정을 통해 어린이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과 내면의 단단함을 따뜻하게 응원한다. 또한 이 동시집은 가족, 친구, 동물, 자연 등 다양한 존재와의 연결 속에서 어린이가 어떻게 세상과 조화롭게 관계를 맺어가는지를 따뜻한 시선으로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책에 담긴 동시들이 유쾌하고 건강한 웃음을 잃지 않는 동심의 언어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이 책은 어린이에게는 위로와 용기를 따스하게 전하고, 어른에게는 잊고 있던 동심과 따뜻한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만들며 이 책을 읽는 모두를 웃음 짓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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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쇼핑몰 3 -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시리즈 <킬러들의 쇼핑몰> 원작 소설 새소설 21
강지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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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쇼핑몰> 1권과 2권은 독특한 설정과 긴박한 전개, 그리고 인물 간의 긴장감 있는 구도로 이야기 자체가 주는 몰입감이 아주 컸다. 전작에서 이미 강지영 작가 특유의 스타일리시한 미스터리와 액션, 스릴러가 성공적으로 결합된 서사를 경험했기에 시리즈의 완결편인 이 책에 대한 기대는 클 수 밖에 없었다. 이 책은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킬러들의 쇼핑몰〉의 원작 소설 시리즈를 마무리하는 이야기로 피로 물든 조직 머더헬프를 중심으로 한 마지막 국면을 다루고 있다. 전편에서 축적된 반전과 스펙터클을 기반으로 한층 더 정교해진 서사와 감정적 밀도를 통해 시리즈의 정점을 찍는다고 할까. 주인공은 삼촌의 실종 이후, 인터넷 쇼핑몰 창고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조직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은 단순한 액션 이상의 무게를 가지며 몰입감을 더한다. 그리고 책 전반에 깔린 느와르적 분위기와 다층적인 복선, 예측 불가능한 인물의 등장과 전개는 이번 첵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하며 마지막 이야기로서의 완결성과 몰입도를 동시에 확보하고 있다고 본다.


책의 시작은 주인공 정지안의 중학교 시절에 대한 회상으로 시작된다. 교복을 맞추던 날, 삼촌 정진만과 나눈 짧은 대화는 일상적인 장면 속에서도 이들이 살아온 세계의 비범함이 드러난다. 지안이 자신이 운이 좋다고 말하던 과거는 이미 어딘가 어긋난 세계에 그녀가 발을 딛고 있었음을 암시하며 이후 벌어질 혼란과 불확실성에 대한 예고로 보인다. 그리고 이 회상은 곧 현재로 전환되며 이 책의 중심 서사는 본격적인 위기 상황으로 진입한다.


지안이 외출한 사이 삼촌 정진만은 총성과 함께 실종되고, 비밀조직 ‘머더헬프’의 시스템은 마비 상태에 빠진다. 이 공백 속에서 새로이 등장하는 예사롭지 않은 두 인물은 눈길을 잡아 끈다. 이번 책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수전과 그림책은 사건의 성격을 단순한 실종이나 범죄를 넘어, 정보 통제, 정체성의 혼란, 조직 내부의 균열로 확장시킨다. 특히 ‘그림책’이 제작 중인 웹툰에 머더헬프의 현재 상황이 예고되어 있었다는 설정은 이야기의 현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를 흐리며 서사에 독특한 긴장감을 부여하는 듯하다. 이렇듯 이야기의 시작에 과거의 평범한 일상과 현재의 극단적 비상상황을 교차시켜 배치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인물 간의 관계, 세계관의 규칙, 사건의 전조를 직관적으로 감지하게 만든다. 또한 기존 시리즈에서 축적된 인물 서사와 독자 경험을 전제로 정보의 공백과 단서의 누적, 긴장과 불신, 신뢰와 배신이라는 내세우며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시킨다.


삼촌 정진만이 사라졌다. 편의점 전투 후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정지안은 삼촌의 실종과 함께 피로 물든 작업실, 총성과 탄환만을 마주한다. 조직 '머더헬프'는 마비됐고, 갑작스레 나타난 옐로코드 수장 수전과 웹툰 작가 지망생 ‘그림책’은 지안을 중심으로 사건의 실체를 파고든다. 문제는 그림책이 이미 이 모든 상황을 예견하듯 웹툰으로 만들어왔고, 정진만이 그 대본 작업에 수년간 협력해왔다는 사실이다. 지안은 혼란과 배신감 속에서 삼촌의 자리를 대신해 머더헬프를 지키며 조직을 노리는 내부 혹은 외부 세력과 맞서야 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이야기의 전환점은 지안에게만 전달되어야 할 선물에서 시작된다. 폭발 직전의 위기 상황, 그림책의 돌발 행동, 민혜의 재등장, 그리고 진만이 남긴 은신처의 열쇠가 하나씩 나타난다. 이렇게 각종 퍼즐 같은 단서들이 드러날수록 지안은 자신이 알고 있던 삼촌과 조직의 진실이 얼마나 거대한 비밀로 둘러싸여 있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이 책은 시리즈의 마지막 권답게 전편에서 쌓아온 서사의 긴장과 복선을 하나씩 회수하며 진실에 다가간다. 동시에 정지안이라는 인물이 외부의 위협은 물론 내부의 불신까지 넘어서 성장해가는 과정을 중심에 두고 누아르적 세계와 심리 스릴러의 밀도를 동시에 구현해내고 있다. 과연 지안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책에 새로이 등장한 수전과 그림책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이들의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통해 확인해 보길 추천해본다.


이 책은 인간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어둠,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욕망과 생존의 본능, 가족이라는 유대 사이의 긴장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다. 이야기는 주인공 정지안이 삼촌 정진만이 남긴 비밀스러운 쇼핑몰, 겉으로는 평범한 상점이지만 실상은 살인 도구와 서비스가 거래되는 조직의 핵심 거점을 지키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혼돈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지안은 도덕과 범죄, 현실과 허구가 얽힌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선택을 강요받는다. 그리고 그 선택의 반복은 단순한 생존을 넘어 스스로의 역할과 책임을 자각해나가는 성장의 서사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녀는 위협과 불신 속에서도 주체성을 잃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간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강인함이란 단순한 ‘강한 캐릭터’가 아니라 불완전한 세계를 견디는 태도와 방향성을 가진 인간상이어야 함을 깨닫게 만든다.


특히 이 작품은 폭력과 부조리가 일상화된 사회를 배경으로 인물들이 그 안에서 어떻게 감정을 통제하고, 또 어떤 방식으로 현실에 맞서 싸우는지를 날카롭게 그려내었다. 그리고 주인공이 마주하는 선택의 순간들은 삶과 죽음, 윤리와 생존의 경계를 가르며 독자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결국 이 책이 우리에게 전하는 핵심 주제는 생존과 선택, 인간 내면의 어둠, 그리고 책임과 성장이라고 생각한다. 위기의 상황에서도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을 외면하지 않고 내면의 혼란을 뚫고 나아가는 주인공의 여정은 무너진 세계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를 조명한다. 그렇기에 어둠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서사의 밀도는 이 책이 단순한 액션 스릴러를 넘어서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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