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에밀 시오랑의 '역사와 유토피아'는 1950년대 후반 당시의 정치와 역사, 유토피아에 대한 도발적인 견해로, 1960년 출간되어 프랑스어권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작품이라고 한다. 내가 기억하는 몇몇 프랑스 작품들에 대한 난해함을 떠올리면 이 책 역시나 에세이라고는 하지만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정말 그랬다. 물론 저자는 루마니아 출신으로 후에 모국어를 버리고 프랑스어로만 작품을 썼지만.
'두 유형의 사회에 대하여'에서 저자는 타인을 거부하는 것이 삶을 진정으로 사는 것이며 타인을 받아들이려면 자신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인간은 비참한 족속으로 무기력해져야만 고귀해질 수 있으며 관용은 정열이 식은 것을 뜻함을 피력한다.
- 무위도식자들, 기생충들, 비열한 자들, 추잡한 자들만이 사회가 자랑스럽게 과시하는 부를 누립니다. P 26
아이러니함과 독설이 난무하는 내용이 어렵지만 어찌 재미있다. 그리고 나 스스로가 인간에 대한 고찰과 삶에 대한 고찰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읽으니 아쉬움이 크다. 그럼에도 시오랑의 에세이는 공감적이고 흥미롭다.
'러시아와 자유의 바이러스'에서는 러시아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이 역시나 세계사에 대한 충분한 배경지식을 갖춘 상태에서 읽었더라면 더 재미있게 읽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이 또한 너무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 기독교가 분열한 것은 교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민족적 정체성을 내세우려는 의지 때문이었다. p 52
- 민주주의는 줄것이 아무것도 없는 아름다운 약속이다. p 57
- 러시아 사상의 역사에서 혁명에 관련되었든 아니든 모두 혼미하고 지독해서 종잡을 수가 없다. 아직도 구제 불능 유토피아주의자들이다. 유토피아란 핑크빛 그로테스크다. 가능하지 않은 행복을 역사 과정과 연결하려는 욕구이고, 뜬구름 같은 낙천적 환상을 밀고 나가 그 출발점으로 되돌리려는 것이다. 없애려고 했던 냉소주의 자체가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괴물같은 마법의 성이다. p 62
- 관용이란 자유의 다른 이름이고 정신의 다른 이름이다. 정신은 한 개인에게도 위험하지만, 제국에는 더 위험하다. 정신은 제국을 침식하고 견고함을 훼손하며 가속적으로 약화한다. 하늘이 제국을 치려고 비웃으며 사용하는 도구다. p 65
- 로마제국은 한 도시에서 시작했다. 영국은 좁은 섬나라를 벗어나기 위해 제국을 건설했다. 독일은 국토에 인구가 넘치자 숨을 쉬기 위해 제국을 건설하려고 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경우는 유례없는 현상이다. 차지하고 있는 넓은 공간을 명분으로 영토 확장 계획을 변명한다. p 70
1957년에 쓴 이 에세이에서 시오랑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러시아가 무엇을 결정하고 시도하는가에 우리의 행로가 달려 있다. 러시아는 우리의 미래를 손에 쥐고 있다.'라고 썼다. 현재의 사태를 보니 반박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폭군들의 학교에서'는 권력욕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 우리가 전에도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다시 확인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우리는 존재하기 위해서 태어났다. 무엇을 배우기 위해서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살기 위해 태어났지,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서 태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식은 권력욕을 자극하고 충동해 우리를 가차 없는 파멸로 이끈다. 우리의 꿈과 시스템보다 성서의 인간 창조가 우리의 조건을 더 잘 보여준다. p 82
- 모든 인간은 정도가 심하든 그렇지 않든 질투를 한다. 정치인은 질투 그 자체다. 자기 옆이나 위에 누가 있는 것을 참지 못한다. 무엇인가 행동하는 것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질투심에서 촉발된다. 질투는 살아 있는 인간의 최고 특권이자 행위 법칙이고 원동력이다. p 84
- 행위가 질투심에서 나온다면 정치 투쟁의 최후 단계가 경쟁자나 적을 제거하기 위한 계산과 권모술수로 귀착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까? 생각의 방향이 같고 선입견도 같아서 당신 옆에서 같은 길을 걸어왔던 사람들을 제거하라. 그들은 필연적으로 당신의 자리를 빼앗고 없애버릴 궁리를 하고 있을 것이다. 경쟁자 중에서 제일 위험한 자들이다. 그들에게만 집중하라. 다른 사람들은 기다릴 시간이 있다. 내가 권력을 잡는다면 첫째 할 일은 내 동지를 없애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을 망친다. 폭군의 신용을 떨어트린다. p 85~6
- 카이사르의 가장 큰 실수는 측근들, 그를 가까이서 보았기 때문에 신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던 사람들을 경계하지 않은 것이다. p 90~1
페이지 수가 그리 많은 책은 아니지만 생각하며 읽어야 함에 더디게 진도가 나갔다.
에밀 시오랑이 쓴 역사와 정치, 그리고 유토피아에 대한 에세이집으로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도서이다. 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