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미초 이야기>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
-
가스미초 이야기
아사다 지로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가끔씩 큰 기대 없이 읽기 시작한 책이 가슴을 우르르 무너지게 만들 때가 있다. <가스미초 이야기>가 그랬다.
<가스미초 이야기>는 주인공 '이노' 의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만약 등장인물이 이노와 그의 친구들 뿐이었데도 이 책은 충분히 발랄한 '청춘물'이 되었을게다. 누구나 겪고 지나가는 청춘이란 부르기만 해도 아름답고 반짝거리는 이름이니까.
각 장들은 마치 서로 관련 없는 단편들처럼 방황하는 청춘들의 에피소드를 그리고 있다. 설익고 치기어린 청춘들이 겪는 사건들, 일련의 해프닝들은 독자들에게 저절로 자신들의 그 시절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런데 여기, 각 에피소드들 사이 사이 주인공 '이노' 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등장한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도. 가족들 각자의 개인사가 사뭇 비밀스런 분위기로 소개되고 있고, 그런 서로 다른 개인사를 지닌 가족 구성원들이 어떤 과정을 겪으며 '가족'이란 이름 안에 자신들의 몸과 마음을 담구게 됐는지가 한편의 영화처럼 독자들에게 상영된다. 오래된 축음기에선 오티스 레딩 노래가 흘러나오고 치매로 정신이 왔다 갔다 하시는 할아버지는 자신의 낡은 라이카 카메라를 윤이 나도록 닦고 있는 장면이 직접 본듯 가슴에 그려진다.
<가스미초 이야기>는 언뜻 보기엔, 주인공이자 서술자인 '나' 즉 '이노' 의 고등학교 시절을 주소재로 삼고 있는듯 하다. 허나 내내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이노'의 할아버지다. 이노의 할아버지는 아들이 해군에 갔다가 사망하는 아픔을 겪고, 아들 친구인 이노의 아버지 즉 사위에게 쇠락해가는 사진관을 물려주었다. 게다가 지금은 치매를 앓고 계신다. 이노와 친구들의 졸업 사진을 찍을 때 쯤엔 기력조차 쇠하신 상태다.
그 옛날 할아버지는 한 때 게이샤였던,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할머니를 엄청난 돈을 치르고 데려 오고, 친아들이 아닌 할머니의 아들을 끔찍하게 사랑하며 키운다. 사진사로서의 할아버지 모습에서나 인간으로서의 모습 둘 다에서, 삶의 지표로 삼을만한 고귀한 성품과 정신이 깃들어 있다. 허구의 인물임에도 할아버지의 아우라는, 구름 사이 한줄기 빛처럼 내 삶을 밝게 비춘다.
아들도 죽고,부인도 먼저 세상을 떠난 뒤 어느 날 아침, 할아버지마저 스튜디오 등나무 의자 위에서 그림 같은 모습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 모습을 보며 사위인 이노의 아버지는 어린아이처럼 꺼이 꺼이 통곡한다.
할아버지의 죽음을 대면한 독자로서의 '나'는 이노아버지와 함께 울다가 앞장에서 읽었던 사진에 관한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떠올린다.
눈발이 솜덩이처럼 날리던 크리스마스이브, 무덤 가에서 다가 오는 꽃전차를 촬영했던 날 저녁에 할아버지와 이노 아버지가 나누던 대화.
"자네 실력이 왜 형편없는지 아나?"
"기계에 의존하니까요. 그렇죠?"
"그게 아니야. 적어도 자네의 펜탁스는 내 라이카보다 좋은 카메라야. 노출을 재는 그 기계만 해도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천지차이겠지 ..... . 중요한 것은 여기야"
할아버지는 가슴에 손을 대고 말을 이었다.
"아름다운 경치도 좋지만, 경치엔 감정이 없지. 자네가 찍는 사진은 도구만 있으면 아무나 찍을 수 있어. 즉 자네는 따뜻함이 부족한 거야."
주인공 이노는 할아버지 장례식날 할아버지가 '색'에 관해 했던 얘기를 떠올린다.
'이 세상의 색깔은 전부 가짜다. 오른쪽 눈과 왼쪽 눈에 보이는 빨간색이 다른 것처럼, 색채는 보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르다. 따라서 컬러 사진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천연색'이란 말도 실체가 없는 귀신 같은 것이다'라고 했던.
마지막 에피소드 '졸업사진' 편에서 이노는 장례식 전날 밤 암실에서 자신과 친구 료지, 기치의 사진을 발견한 얘기를 한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사진이었다.
우리의 얼굴은 천사처럼 청징하여 방탕의 흔적은 한 조각도 찾을 수 없었다. 사진은 그러면서도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이 실물보다 더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있었다. 말 그대로 살아 있는 모습이었다.
우리 청춘의 천 분의 1초를 할아버지는 진심으로 촬영해주었다. p.263
책의 한구절을 빌려 말하자면, 청춘이란 중간고사가 끝난 후 바라보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공허하고 나른한 밤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장마가 끝나면 설익은 로맨스 따윈 쓰레기통에 처넣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여름이 정말로 찾아오는 건지도.
반드시 찾아오지만 어김없이 사라지고, 어설프지만 그래서 더 눈부신 청춘
<가스미초 이야기> 로 인해 잊고 살았던 청춘이 물안개처럼 기억속에 피어올랐고,
그래서 읽는 내내 가슴이 시큰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