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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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서평 Ver. 1

이 책을 읽는동안 마음이 더워졌다. 그래선지 「작가의 글」 말미 '2009년 9월 김연수' 라는 활자가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작가 친필싸인처럼 여겨지기까지 했다. 
내 마음이 아렸기 때문인지 소설이 슬퍼서인지 인과관계를 따질 순 없다. 암튼 '세계의 끝 여자친구' 덕분에 읽는 내내 불쑥 불쑥 울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핑게거리를 찾아 엉엉 울고 싶은 순간이 있기 마련이니.
어찌보면 조용한 사내의 나직한 목소리 같은 이야기였는데 그 이야기들이 가슴팍에 닿는 순간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뭔가가 내속에서 펄떡거렸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주인공 '나'는 말한다. 인생은 서로 물고 물리는 톱니바퀴 장치와 같다고.
모든 일에는 흔적이 남기 마련이고 우리는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 최초의 톱니바퀴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나는 햇살이 작렬하는 한 여름 도서관 게시판에 '세계의 끝 여자친구'라는 시가 붙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시에 따르면 시인이 걸어가는 길의 끝에는 메타세쿼이아 한 그루가 서 있는데 거기가 바로 세계의 끝이며 그때 우리는 "불과 눈물이 서로 스미듯이, 혹은 달과 무지개가 그러하듯이" 나란히 메타세쿼이아 거친 둥치에 등을 기대고 앉게 될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사랑은 저처럼 뒤늦게/닿기만 하면, 닿기만 하면/흔적도 없이, 자욱도 없이// 삼월의 눈처럼" 사라진 다는 것이었다.
시를 보고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궁금해진 나는 '메타세쿼이아, 살아있는 화석'이란 책을 빌린다.
그리고 수요일 저녁 '함께 시를 읽는 사람들' 모임에 참석했다가 게시판에 '세계의 끝 여자친구'란 시를 붙여놓은 '김희선' 할머니와 시에 관해 이야기하게 된다. 
시를 쓴 시인은 국어선생이었던 '희선'씨 (할머니는 나에게 그냥 '희선'씨라고 부르라 한다)의 등단한 제자다. 시인은 아파서 병상에 눕게 되고 그를 찾아간 희선씨에게 시인은 '세상의 끝까지 데려가고 싶을 정도로 사랑했던 여자'에 대해 말해준다.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였고 차마 같이 도망가자는 말은 못하고, 둘이서 가장 멀리까지 가 본 게 고작 저기 호수 건너편 메타세쿼이아까지였던 것이다.
결국 시인은 죽고, 나와 희선씨는 시인이 메타세쿼이아 아래 묻어놓은 편지를 파서 수신인에게 직접 전해주기로 한다.
 

- '청춘의 문장들' 이후 '김연수'작가가 나에겐 편애하고픈 작가가 되었기에 소설 뒷부분 '작가의 말'까지 꼼꼼히 읽게 되었다.
작가의 말은 대략 이렇다.
이 부분에서 뭉글 피어오르는 의문때문에 나는 위 구절을 소리내서 따라 읽었음을 고백한다.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이라구?  음 그게 어디 쉬운가'
작가가 소설을 통해 제시하는 해답은 '불꽃'이다.
우리 안에서 타오르는, 하지만 바깥이 불꽃이 없었더라면 애당초 타오르지 않았을 '불꽃'말이다.
작가의 목소리는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 에서 사고로 트럭에 불붙은 모습을 바라보는 주인공의대사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세상에, 다른 차와 충돌한 것 같지는 않은데, 왜 저렇게 혼자 불이 붙었을까?" 
 불의 열기는 고스란히 내게 전해진다. 내 안에서도 뭔가가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다. p. 31〉 

작가는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를 쓰던 새벽에 숭례문 불타는 사진을 봤다고 말한다. 소설 속에쓰던 불꽃과 현실의 불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편지는 점점 짧아지고 우리는 더이상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졌어요. 사람이 서서히 눈이 멀어가는 것, 그게 아니라면 사랑하는 사람이 서서히 죽어가는 것, 그런 느낌과 아주 비슷해요. 마지막 편지에는 그냥 안녕이라는 말뿐이었어요' p.194〉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누구나 소통의 부재를 경험한다. 게다가 '삶의 우주'라 일컬을 만한 사랑이 하루아침에 와르르 무너지는 경험도 가지고 있다. 어쩌면 너무 고통스러워 차마 남에게 말할 수 없을 정도일지도 모를.
이 소설에 대해 평론가는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 는 말로 풀어낸다.

평소 나는 소설책 뒤에 실린 평론이나 해설을 어린이들의 '독서 후 활동'처럼 그닥 좋아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평론은 책에서 얻은 나만의 소중한 느낌을 고상하고도 현학적인 단어들로 흐트러놓는다는 반감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  헌데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 는 해설은 뭔갈 제대로 짚어준 기분이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읽으며 등장인물들의 아픔을 들여다보았다. 단지 독자로써 읽었을 뿐이지만 그 '책읽는 동안'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타자의 아픔을 알아가는 과정에 자신의 상처도 저절로 투영되기 때문일까. 그 고통의 공감이 우리들 서로를 소통케한다. 더불어 나 자신에게 감춰진 내면의 상처까지 위로받을 수 있다. 현실의 불꽃이 작가에게 옮겨갔고, 주인공 내면에 타오르던 불꽃이 독자인 나에게까지 전염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들 모두는 믿었던 세계가 무너져버렸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야기'함으로써 진정한 나를 되찾으려고 애쓴다. 타의에 의해 잃어버렸든, 나도 몰래 어딘가에다 던져두고는 잊어버린 자신의 정체성 같은 것들 말이다.
작가가 소설 속 서사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그 불꽃이란 것도 결국 각자의 아픔을 이야기함으로 나에서 우리로, 종국에는 우리 모두로 이어져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다는 '희망'아닐까. 이렇게 마무리하려니 꼭 공익광고캠페인 같지만 〈세계의 끝 여자친구 〉를 읽으며 끌어안은 '사랑' 과 '희망'의 메세지를 내쳐버리고 싶지 않으니 어쩌면 좋을까.
 

 <세계의 끝 여자친구 서평 Ver.2>

동시대를 산다는 것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동안 타자가 내게 선물이 될 수 있고, 마찬가지로'나'라는 존재도 타인에게 소통을 선물할 수 있음을 뜻한다. 언어를 매개로한 드넓은 문학 광장에서 말이다.
박경리 선생님이 쓰신 글중 '작가는 칠흑과 안개를 향해 왜냐고 묻는 사람이다. 왜라는 질문이 없으면 문제는 없거나 종결되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문학도 종결되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서술자의 목소리를 통해 끊임없이 '왜' 냐는 질문을 던지며 독자들에게 삶에 대하여 성찰해볼 기회를 선물하는 작가가 바로 김연수다.
여태까지 나는, 내가 읽은 소설이 내 삶의 그늘진 부분에 빛을 비춰 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 이유가 소설은 '허구'이고 인생은'논픽션'이라는 생각 때문인진 몰라도. 작가가 드는 '화두'에 대해 공감하는 것과, 거친 나무결 같은 현실에 발을 딛고 사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라 여겨왔다. 
그런데 <세계의 끝 여자친구>는 뭔가 내 피부에 맞닿아 있는 현실세계의 꺼끌꺼끌한 결처럼 내 속에 깊이 파고 들었다. 나는 그것을 도저히 마음으로부터 외면 할 수 없어졌다.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에서 혜미의 죽은 아들얘기를 읽다가 난 명치께를 계속 문질러야만 했다. 간호사가 핏줄을 제대로 찾지 못해 아이의 손과 발에 여러 번 바늘을 꽂아 뎄던 그 순간과 아이의 목에 주삿바늘을 꽂았던 그 시간들이 내 안에 들어왔다.
소설 속 주인공 '나'가 혜미를 '해피'라고 부르면 부를수록 그것은 인생이 '낫 해피' 임이 또렷해질 뿐이며, 또 그런 이유로 주인공이 '해피'라고 혜미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것은 내 귀에 '낫 해피'로 들리곤 하던 기이한 현상이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를 읽는 동안 나에게 반복 됐다.
우주의 90% 는 우리가 볼 수 없는, 하지만 우리에게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는 그런 불들로 채워져 있다. 우리는 그 총체적 우주의 일부이자 개인으로 존재하는 동시에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아직도, 여전히 타고 있는 내 마음 속 불꽃 :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어떤 연유로 '그 날 새벽에 타오르던 붉은 불꽃과 시커멓게 피어나던 검은 연기'를 떠올리게 됐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주인공이 우연히 읽었다는 이 편지는,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에서 여행책 론리플래닛에 이렇게 묘사되었다고 한 바 있는 무엇도 영원한 것이 없는, 스쳐지나가는 것들로 가득한 좌충우돌의 도시인 서울에서 가장 슬픈 편지가 될 것이다.



 "아버지와 아빠에게"라는 구절로 시작해서 "아빠, 나는 아빠가 보고 싶어. 지금은 이 마음 하나뿐이야.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 꿈속에서라도 한번 나와줘. 나는 아빠를 힘껏 끌어안고 놔주지 않을 거야. 떠나지 못하게 절대 놔주지 않을 거야. 그리고 아빠한테 말할 거야. '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 p. 114



'2009년 1월 용산참사로 숨진 윤용헌씨의 장남 윤현구군이 쓴 편지 중에서'라는 각주가 달려 있는 한 아이의 편지. 우리는, 도시는, 어른들은 대체 이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한걸까.

세계의 끝에서 다시 시작되는 우리의 이야기
영화나 드라마에서 '침묵'이나 '응시'가 대화사이를 대신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 잠시 '멈춰버린 시간'같은 찰라, 난 목소리 사이 공백에 대해 말한 소설 속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사람들의 인생이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의 공백, 목소리들 사이, 기침이나 한숨 소리, 혹은 침 삼키는 소리 같은데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던 <달로 간 코메디언> 여주인공의 그 말. 그래서 목소리 사이의 공백을 없애는 편집을 하다보면 이상하게 되게 외로워진다고 그녀는 말했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는 '활짝 핀 벚꽃나무 아래서 되려 슬퍼지는 그런 마음'(p.235)처럼 가슴이 시큰거리는, 그래서 더 아름다운 이야기의 결이 있다. 작가는 한치의 감정과잉 없이도 그 결을 눈부시게 살려내 독자인 나를 외로움으로부터 구원한다.
종종 눈앞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으로 가득차, 서늘한 현실속에 우둑하게 앉아 눈물로 얼굴을 덥히게 될 때 내 귀에 불쑥 이런 외침도 들린다. "쉽게 위안받을 생각하지 말고 삶을 끝까지 쫓아 가란 말이야!" 라는. 그 외침 덕택에 얇은 나비결 같이 불안하기만한 지금이, 실은 지나고 나면 되돌릴 수 없는 찬란한 오늘임을 명심할 수 있게 된다. 게다가 우리에겐 '이야기'가 있으니 더이상 고통스러울 것도 자신을 표현할 방법을 상실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시간의 영속성 속에서 세계가 붕괴와 탄생을 거듭하듯,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작가가 건네 준 이야기로 인해, 우리들이 서로 주고 받는 얘기들로 인해, 그 불꽃으로 인해 우리가 더 이상 외롭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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