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마지막에 본 것은 그날, 너는 무엇을 했는가
마사키 도시카 지음, 이정민 옮김 / 모로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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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전작 <그날, 너는 무엇을 했는가>를 처음 만난 건, 정확히 1년 전입니다. 휴가 기간 들른 서점에서 남성잡지에 '휴가용 소설들' 중 하나로 소개되어 킬링타임용으로 그 자리에서 바로 구매해서 집에 들고 왔습니다. 그렇게 1주일 휴가동안 정신없이(?) 쉬다가 출근 하루 전, 책상 귀퉁이에 누워 있는 책을 발견했습니다. 서점에서 사와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게 펼쳐들었는데, 새벽녘까지 한달음에 읽어버렸고, 결과적으로 완벽하고 시원한 여름휴가의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년 후, 우연한 기회에 서평단으로 미리 책을 받아 들었습니다. 전작의 붉은 표지만큼이나 인상적인, 화사한 보자기 같은 것으로 사람의 머리를 뒤덮어 감싼 이미지는 꽤나 강렬합니다. 아름답지만, 섬뜩합니다. 


'그녀의 시신이 발견된 건 크리스마스이브날 밤이었다' (p.5)


소설의 첫 문장입니다. 소설의 첫문장은 이후에 펼쳐질 이야기를 향하는 화살촉 같은 것이어서, 나의 독서습관 중 하나는 첫 문장이나 도입부를 긴 호흡으로 들이마시는 것입니다. 살인현장을 묘사하며 시작하는 듯 하다가, 이야기는 공간의 내외를 오가다 다시 현장을 비춥니다. 문장의 호흡은 역시 작가의 전작에서 만난 기시감을 들게 합니다. 상황에 따라 달리기도 하고, 머뭇거리기도 하는 문장은, 독자의 호흡을 쥐락펴락해가며 어느새 이야기 속으로 이끕니다. 역시나 미쓰야 형사와 다도코로 형사 콤비가 느슨하지만 촘촘하게 사건의 전말을 파헤쳐나갑니다. 그 호흡이 정말 독특하고 매력적입니다. 


읽는 내내 최근 종영한 드라마 <행복배틀>과 <마당이 있는 집>의 느낌도 어슴프레 떠오르며, 등장 캐릭터들의 행동과 대사를 따라 가며 이런저런 추리를 해봤지만, 여지없이 이번에도 미쓰야 형사의 독특하지만 고집스런 집념은 의외의 결과를 향하고, 이 뒷맛이 전작처럼 묵직하게 독자의 마음을 내리누릅니다. 가히 충격적 결말이라 할 만합니다. 아니,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렇게, 커버 이미지는 소설의 이야기 속 이미지에 점점 부합해간다 싶도록 적절한 선택이다 싶습니다.


'여름휴가용 소설'이라 불려도 될 만큼 충분히 매력적인 이야기와 캐릭터들, 설정이 맞물려 달려내는 맛이 상당히 시원합니다. 이 여름에 일독을 강력히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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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휴먼스 랜드 (양장) 소설Y
김정 지음 / 창비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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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창비X카카오페이지 영어덜트 소설상' 대상 수상에 빛나는(!) 작품을 미리 가제본으로 만나보았습니다. 김정 작가에 대한 별다른 전작 정보가 확인되지 않는 걸로 봐서, 첫작품으로 대상을 수상한 것으로 보이는데, 대단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구성과 이야기적 재미가 빼곡하게 담겨있습니다.

설정 자체는 그닥 새로울 것은 없는, 2044년과 2050년에 두차례 전지구적 재난을 거치며, 사람이 살지 않는 지구육지 57%를 '노 휴먼스 랜드'로 지정하게 되는데, 대한민국은 국토 전체가 '노 휴먼스 랜드'로 지정되었고, 2070년에 생태계 조사를 위해 파견된 조사단이 서울로 들어와 마주하게 되는 이상한 일들과 존재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조사단 내부와 외부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긴장의 완급을 조절하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카카오페이지'의 특성 상, 짧은 호흡으로 재미요소들이 치고 빠지면서 독자는 이야기 속에 흠뻑 빠져들게 하는 매력을, 작가는 최대한 살려 이야기를 전진시킵니다. 읽는 내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고, 등장인물의 다양한 군상들과 대화들로 캐릭터를 뽑아내면서 이야기 맛의 시너지 효과를 더합니다. SF영화보다는 스페이스 오페라 같은 느낌의 요소들이 다분합니다.


"그렇게 자아를 초월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 굳이 남에게서 무엇을 빼앗으려 하지 않지. 그건 나에게서  빼앗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누구를 다치게 하지도, 무언가를 파괴하지도 않지. 그렇게 사람이 만들어 내는 모든 종류의 문제가 자연히 사라지는 거야. 폭력, 절도, 전쟁, 기후문제까지. 플론은 사람들을 고통과 슬픔, 외로움과 두려움에서 영원히 해방시킬 거야." (p.192)


작가는 '플론'이라는 독특한 식물을 메인 설정으로 집어넣음으로, 인간이 초래한 전지구적 위기의 대안이 비인간이라는 설득을 또다른 플롯으로 진행시킵니다. 하지만, 이 설정을 통해 지구를 구원할 주체는 인간 스스로여야 한다고 강하게 역설하고 있으며, 제대로 이야기의 흐름에 올라타서 설득력을 더합니다.

사실, 이런 결말이 조금 진부하게 비칠 수 있는 약점이 있지만, 달려온 이야기의 속도감이 무리없이 독자를 엔딩에 이르도록 재미를 밀어부치는 글빨(!)이 상당한 신인작가의 발견이다 싶습니다. 김정 작가님의 차기작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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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로 가는 길 - 선진국 한국의 다음은 약속의 땅인가
조귀동 지음 / 생각의힘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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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봐서는 이탈리아 여행 안내서 같습니다. 하지만, 저자의 전작들을 살펴보면 그저 기분 좋게 이탈리아의 도시와 자연을 바라볼 마음은 싹 사라지고, 그 너머의 역사를 통해, 우리나라가, 우리의 정치가 나아갈 방향성에 이탈리아를 오버랩시키려고 그러는거 아닌가? 하는 의심으로 발걸음을 떼기 시작합니다.
이탈리아로 향하는 여정은 총 7개의 챕터로 이루어지는데...

1. 미국도 독일도 스웨덴도 아닌 이탈리아로의 길
2. 노무현 질서의 등장과 모순
3. 촛불연합의 붕괴와 상위 중산층의 정당 민주당
4. 무능의 아이콘 윤석열 정부
5. 회색 코뿔소가 온다: 노인.지방.외국인
6. 공동구매형 사회의 붕괴
7. K-포퓰리즘의 어설픈 등장

차례에 언급된 각장들의 제목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한국전쟁의 폐허를 딛고 마침내 이루어낸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공의 명과 암을 들여다보면서, 대한민국을 규정하고, 2002년 등장한 노무현 정부에서 현시점 2023년의 윤석열 정부의 대한민국까지를 관통하며, 우리나라의 현위치와 방향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규정한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복잡다양한 변수와 상수들, 상위 중산층, 노인-지방-외국인, 공공재 공급 방식의 붕괴, 그리고 포퓰리즘이라는 현상적 정치까지 세세하고 꼼꼼하게 저자의 시각으로 훑어내며,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사회'가 되버린 한국을 비판하고 조언합니다.
어쨌든, 선진국이 되어버린 대한민국의 상황에서, 저자는 미국, 독일, 스웨덴, 이탈리아에 모델링해본 결과, 이탈리아에 제일 가깝게 봤고, 어떻게 대한민국이 '이탈리아형 선진국'으로 가는 악순환이 어디에서 어떻게 발생했는지 살펴보고, 그 악순환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사회계약'을 새로 써서 '무엇이든 바꿔낼 수 있는 사회'이자, '무엇이든 결정할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갈지를 모색합니다.

*우선 제공받은 사전서평단용 책자는 1장과 2장만을 포함하고 있어서 리뷰가 제한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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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하면 유쾌한 할머니가 되겠어 - 트랜스젠더 박에디 이야기
박에디 지음, 최예훈 감수 / 창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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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시트콤을 보듯 술술 읽히는 글맛이 제법입니다. 저자 본인의 이야기를 잘 들려주려고 애쓴 결과다 싶습니다. 87년생 박에디는 스스로 주문을 걸듯 "잘하면 유쾌한 할머니가 되겠어"라고 선언하듯 자신의 이야기를 유쾌하게 담았습니다. 경쾌하지만 가볍지만은 않습니다. 아프디 아픈 자기를 찾아가는 여정을 속속들이 담아낸 트렌지션 실용편이라 할만 합니다.

박에디는 가족, 친구들에게 커밍아웃하며 그들의 소중함을, 스스로의 확신을 선물받습니다. 생존하되 웃음을 포기하지 않기로 작정하며, 폭력적 상황에서도 배시시 웃고 썩소를 가벼웁게 날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심과 반복을 번복하며 한없이 침잠하다가도, 박에디는 스스로를 믿고, 지지하는 동지들을 만나고, 앞으로 나아가서 마침내 동그란 에디가 됩니다. 그렇게 젠더된 도리를 다하기로, 경험할 수 있는 세상 모든 경험을 다 하고 가리라, 그 삶을 가시화하리라 굳게 다짐합니다.

나로서는 그저 유쾌할 것만 같더니, 위기가 찾아왔으니... 오디세이라 할만한 성확정수술과 성별정정을 거치는 과정은 숨이 멎기도 하고 심장이 급 쿵쾅대기도 했습니다. 세상에 차고도 넘치는 선량한 차별주의자들 사이에서 내 삶을 오롯이 나로 산다는 것의 험난함을 유쾌한 할머니가 되기로 한 박에디도 피해 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결국 성공해내고 이렇게 산뜻하게 한 권의 책으로 묶어냅니다.

그리고, 따스하게 두 손을 내밀며, 동지들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 징그럽게 계속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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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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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내 나이 5-6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곧 동생을 출산할 엄마를 도와 외할머니는 우리 집에 왔고, 나는 외가댁에 보내졌던 것이.

터덜거리는 시내버스를 타고 또 한참을 걸어서 들어간 시골 깡촌. 1년에 서너 번 명절 때나 가서 외사촌들이랑 어울려 놀거나 자고 온 적은 있었지만, 명절이 아닌 그곳엔 무뚝뚝한 큰 외삼촌, 그때까지 제대로 얼굴을 본 적 없던 큰 외숙모, 그리고 내내 곰방대에 담배를 채워 뻐끔뻐끔 거리시던 외할아버지만 계셨다. 그나마 살뜰하게 나를 챙겨주시던 외할머니는 우리 집에 가계인 상황이니, 그 두려움과 막막함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아마도 한 달 정도였던 거 같은데, 일 년은 족히 되는 듯 길고만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그런 기억이 남겨진 나에게, 어쩌다 맡게 된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는 개인적으로도 남다른 구석이 있는 이야기였다.


나의 기억 속에서도 그랬거니와, 얼마나 많은 '하지 말아야 할 것들'과 '해야 할 것들'에 대한 리스트 업고 반복으로 며칠 전부터 쇄뇌될 정도였는데,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힌다. 그렇게 소녀도 무정해 보이는 아빠와 차를 타고 뒷좌석에 누워 뒤 창을 통해 하늘을 보며 답답한 마음에 이러저러한 상상으로 닥쳐올 상황을 대비한다.


"아빠." 내가 말한다. "나무 좀 봐요." / "나무가 뭐?" / "아픈가 봐요." 내가 말한다. / "수양버들이잖아." 아빠가 목을 가다듬는다. (p.11)

"세상에, 아빠가 네 짐도 안 내려주고 가버렸구나!" 아주머니가 말한다. (p.21)

... 딸을 챙겨본 적이라고는 없는 아빠 같으니라고! 다정한 엄마도 육아와 출산으로 소녀에게 손을 뻗을 여력조차 없다.


그렇게 낯선 공간과 친척 어른들 사이에 맡겨진 소녀. 그 소녀의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마치 극장에서 3시간 넘는 4D 영화 한 편을 보듯, 소녀의 안과 밖을 섬세하게 보여주며 온몸으로 소녀가 되는 체험으로 이야기를 따라간다.

뭐 사건이랄 것도 없는 일상들에 작은 파문들이 일며, 알게 되지만 더욱 조심스레 마음을 말을 손에 꼭 쥐고만 있을 것 같던 소녀가, 어느새 마음을 열고 입을 열어, 따로 돌아가는 것 같던 세상과 손을 잡는 법을 배워나가는 과정을, 작가는 매끈하지만 제한된 문장들로 금세 빌드업 해낸다. 그리고, 지루함에서 애틋함을 지나, 손에 심장을 쥐고 달리는 마음에까지 이르른다.

뿐만 아니라, 무슨 사건이 일어날 듯, 조금씩 조여오는 무언가에 대한 실마리가 조금씩 윤곽을 나타내며 나아가는 미스터리 같은 구성이, 자칫 느슨하고 지루할 만한, 이 '긴 단편소설'을 찰진 이야기로 만드는데 한몫 해낸다. 무엇보다 소녀의 눈에 보이는 섬세한 마음 씀이 감정을 가득 보듬는다.


"... 그래서 가끔은 다른 사람을 믿으면서도 실망할 일이 생기지 않기만을 바라지. 하지만 가끔은 실망하고."...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꼬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p.70-71)


<맡겨진 소녀>를 읽고 그저 하루, 이틀을 보내며, 거실을 오가면서 무심결에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책 표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소녀가 되었다가, 칸셀라 아저씨가 되었다가, 또 칸셀라 아주머니가 되어 가슴에 쥐가 난 듯 울컥울컥하게 되더라. 그래서, 다시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아무 장면이나 쭈욱 훑어 읽으면 괜스레 미소 짓거나, 전속력으로 목장을 가로지르듯 심장 박동 수가 올라가는 기분이 드는 이야기, 심장의 박동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주먹으로, 머리카락으로 오가며 뜀박질해대는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 그래서 가끔은 다른 사람을 믿으면서도 실망할 일이 생기지 않기만을 바라지. 하지만 가끔은 실망하고." - P70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꼬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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