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차 쓰고 복수 좀 하고 오겠습니다 나비클럽 소설선
홍선주 지음 / 나비클럽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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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해놓고 퇴근해서 집에 가도 잠이 온다고?

그게 가능하다고? 응, 헨리야.

말 좀 들어보자, 어디 한번.

도대체가 말이다. 꼬박꼬박 월급 받는게 미안하고 막 그렇지 않냐고?

난 미안할 거 같은데…”

 - 20XX.05.01

근로자의 날에 사무실 대청소로 출근시켜 놓고 한다는 말이.


 “메일을 보내면 전화해서 잘 받으셨는지,

첨부파일은 잘 들어가서 제대로 열리는지

확인을 왜 안하세요?

보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받는 게 중요한거라고,

말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상대가 이해하는게 중요하다고

내가 몇 번이나 더 말해야 하나요?

네, 그렇게 말 안하고 듣기만 하면,

내 말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를

내가 어떻게 아냐고요?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16년 동안

그렇게 공부하셨는데 언제까지

더 교육을 받으실라고요?”

 - 20XX.12.24

크리스마스 이브날 퇴근시간을 한참 넘기며 2시간 째 설교 중



위의 두 장면. 과장없이 토시 하나 바꾸지 않고 저의 면전에서 다양한 포즈로 단검을 날리 듯 쏟아낸 X상사들의 대사들 중, 그나마 순한 맛 버전들입니다. 


직장생활은 뭐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다른 방도 없이 성실히, 최선을 다해서 해내야만 하는 과업이었습니다. 그럭저럭 제 역할도 하고, 롤모델 같은 선배들도 가끔 만났지만, 언제 어디서든 특정 비율의 또라이, 꼴통 상사는 상수로 존재했습니다. 그건 정말 과학입니다.



홍선주 작가의 신작 <반차 쓰고 복수 좀 하고 오겠습니다>는, 잊고 지냈던 혹은 다시는 떠올리고도 싶지 않은 이름과 얼굴들을 강제 소환해내는 무섭고도 귀여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습니다. 

아슬아슬하게, 혹은 아스라이.



꼰대나 라떼는 정말 애교스럽게 상사들을 미화한 거고, X상사를 조수석에 태우고 끊임 없이 쏟아내는 말들에 심장이 조여오는 거의 공황상태를 경험하다가, 잠시 잠든 사이에 정말이지 한적한 시골 국도길을 가다가 논두렁으로 급하게 핸들을 틀어서 사고를 내고 싶게 만들던 그 숱한 순간들은 정말이지 지옥의 존재를 믿지 않을 도리가 없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담긴 다섯 편의 이야기들은, 신라문구-대동물산-토닥-Cho’s Choice를 거치며, 시간 순은 아니고, 최혜주의 리딩 롤로 여기 저기 부서들의 알량한 그들이, 다른 모양, 같은 빡침 혹은 심드렁으로 뭐라도 해서 복수하거나 탈출하고픈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하나로 이어지지만 또 다르게 나뉘어 흐릅니다. 당연히 작가의 전작들에서 경험했던 발직하지만 정이 가고,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하게 되고야 마는 인물들과 이야기들이 종횡무진 직장과 삶을 직조해냅니다. 

앉은 자리에서 반나절만에 관통해버린 재미 하나는 완전 보장!


 “정성연이가 아직 세상사를 모르네. 내가 이 회사 직원이니까 어머님이 내 상사이신 거지, 만약 퇴사하면 그냥 친구 엄마일 뿐이다? 혹시나 나중에 너랑 절교라도 할라치면, 농담, 어쨌든 그러면 동시대를 사는 그냥 어떤 아줌마야. 그렇게 생각하면 거리낄 게 뭐가 있니? 안 그래?”

 -p.204, <회장님의 아들은 누구인가> 中



 “혜주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떴다. 이런 상황을 즐기는 자신이 너무 변태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최혜주에게 최고의 인생이란 바로 이런 순간이니까.”

 -p.275, <야밤, 회식 차량을 쫓는 경찰차> 中



남극 문자의 떡밥을 신선하게 회수하며 마무리하는 마침표 같은 도돌이표는, 이 소설선의 경쾌한 리듬으로 읽히며 ‘재미’의 최혜주가, 전장에 다름 아닌 회사라는 공간이라지만 로또 1등에 당첨되고도 기어이 다녀야 할 곳이라 설파하는 그녀의 진심(!)에 수렴하는 느낌이 들어 묘하게 끝맛이 개운하였습니다. 


연말연시에 휴대폰의 연락처를 정리할 때 늘 고민하는 이름들, 그래도 살아남아 있는 그 X상사들을 가끔 떠올려볼까 하다가, 그건 하지 말자, 굳게 다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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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곡미풍 -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
위화 지음, 백도라지 옮김 / 푸른숲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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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 이란 뜻의 ‘山谷微風 ‘

이 책은, 중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위화의 산문집으로는 처음 만나는 작품이었습니다.


제가 위화 작가를 처음 만난 건, 장이모 감독의 영화화 했던 <인생>의 원작자로 였습니다. 그렇게 찾아본 소설 <인생>은 그 질곡진 인생을 꾸덕꾸덕하게 문장으로 담아낸 필견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허삼관 매혈기>, <형제>에 담긴 인간사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읽고 나서도 내내 맴도는 이야기로 제게 남아있습니다. 



  “아들이 태어나고 나서 나는 매일 생생한 감각을 느꼈다. 

아들의 몸과 목소리가 늘 존재했고, 눈을 뜨고 있거나 아들에게 가까이 가면 바로 아들을 느낄 수 있었다. 

때로는 나 자신에 대한 느낌보다 훨씬 뚜렷했다.”

  -p.204


예의 작가의 작품들에서 드러냈던 생각이 어떻게 그의 삶의 주변부, 중심부를 두루 거쳐서 흘러나왔는지를 짐작케하는 이야기들로, 이 책을 추려져 있습니다. 


특히, 아들이 태어나 자라는 것을 지켜보며, 아버지가 되어 자식을 돌보고, 또 부모를 섬기는 아들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이러저러한 에피소드들과 생각들이 드러나는 부분들에선 묘하게 몽글한 감정이 들곤 했습니다. 아마도, 허구의 세계와 인물, 이야기를 지어내는 소설가의 삶을 저며낸 에세이들은, 그의 소설 작품과 불가분이게 겹쳐지고 함께 읽힐 수 밖에 없기 때문일테지요.


저의 만 30세가 되던 생일날, 첫 아이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더욱 제겐 선물 같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생전 처음 맞닥드렸던 상황들에서, 선물은 숙제가 되었습니다. 모든 걸 기억하고 기록하고 정말 최선과 최고로 하는 것이 뭔지를 참 많이, 그 짧은 순간들 속에서, 고민하며 지나온 기억입니다.

덕분에 둘째 때는 나름 수월(?)하기도 했고 많이 내려놓기도 했고요.




또다른 이야기는, 영화나 음악, 같은 문화에 대한 체험과 생각을 들려주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는데, 시대적으로는 거의 20년 정도 앞선 세대였고, 체제적으로도 다른 중국과 한국이었지만, 무척이나 유사한 분위기와 생각들을 겪고 느끼며 살았구나 했습니다.


  “아들은 고등학생이 되더니 영화를 좋아하게 되어 게임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하루는 가방을 메고 하교한 아들이 비디오 CD 한 장을 내밀더니 나와 천홍에게 말했다. 

“이거 좋은 영화니까 한번 보세요.” 우리가 영화 제목을 물어보니 알려주었다. 

“<제7의 봉인>이에요.”

  -p.92



가족이라는 작은 사회 속에서 나라는 존재를 스스로 인식하고, 그렇게 형제와 부모, 부부와 자식으로 확장되고 그 안에서 훌륭하게 만들어진 사회적 존재는, 그 울타리를 넘어서의 삶 속에서도 그렇게 살아질 수 있다고, 저는 대체로 믿는 편입니다.


Life goes on.

이 책의 여러 에세이 중, 제게 가장 각별했던 건 ‘바다를 보러 가다’ 였습니다. 어린 시절의 나, 그리고 형과 부모 세대와의 연결이 훗날의 관계나 사정이나 태도, 생각들은 달라졌지만 여전히 그 관계 안에 맴도는 삶이라는 향기를 속살거리듯 들려줍니다.


  “지금, 부모님이 또 바다에 가자고 하니, 그때 우리가 아버지에게 바다에 데려가달라고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은 부모님이 우리에게 데려가달라고 한다.

그리고 바다는 여전하다.”

 -p.184


그렇게 어떤 그리움과 그 추억들은, 

색이 바래기도 다르게 기억되기도 하지만 

내내 각자의 마음 한켠에 

여전히 남겨지는 듯 합니다. 


문득. 바다가 보고 싶어 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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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 위의 만찬
이용재 지음 / 푸른숲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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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공학도가 음식 평론가가 된 사연이 궁금해서 펼쳐든 이 책은, 아마도 미국 거주 시절에 모아둔 AMC 등의 극장에서 봤을, 영화표들이 빼곡한 페이지를 거치고 나면, 영화 속 음식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58편의 이야기 숲에 진입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숲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거나, 모험의 즐거움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우선은 제가 이미 감상했던 영화들, 얼추 38편, 속 음식 이야기를 먼저 만나보기로 하고 페이지를 찾아 나섭니다.


책은 4개의 챕터로 나눠서, 영화들을 칸칸이 담아 내놓습니다. 1부 욕망과 허기, 2부 권력과 기만, 3부 불안과 위로, 4부 공감과 우정.


영화에 따라 지금 다시 이야기를 듣노라니 그 장면 장면들이 남긴 명징했던 기억이 실타래 처럼 펼쳐져, 문장들과 머릿 속에 영상이 생각의 공간을 점해가며 입맛을 다시며 글을 읽게 되는 체험을 하기도 했고, 때로는 영화에 그런 음식과 장면이 있었나 싶게 낯설어 다시 OTT에 들어가 찾아보게 하기도 했습니다. 


  “150여 분 동안 영화 속 음식에 자비 없이 쥐락펴락 당하고 나니 나도 황해 정식이 먹고 싶어졌다.”

  -p.20, 처절하게 생동하는 비극적 먹방 <황해> (2010) 中



  “대접의 가장자리에 세게 부딪혀 거의 박살이 난 달걀의 흰자와 노른자를 간신히 가른다. 달걀이 소리 없이 절규한다.”

  -p.244, 달걀을 깨는 손 <디 아워스> (2002) 中



또 그런가 하면, <헤어질 결심>에서 볶음밥 제대로 만들기 라든가, <마이클 클래이튼>에서 냉동실 바게트 활용법 같이, 실생활에 유용할만한 간단 레시피나 생활의 팁들을 영화 속 음식 이야기에서 확장해서 독자들에게 넌저시 공개해주는 마음씨도 읽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은, 이 책에서 펼쳐낸 영화와 음식들의 이야기 숲을 헤쳐나오면서 드는 생각들.


첫째, 인간사를 두르고 있는 세가지를 의식주 (옷, 음식, 집) 이라고 한다면, 작가가 책의 곳곳에서 불만을 토로하는 것 처럼, 장면 속 음식들에 대해서 유독 인색한 영화들이 있습니다. 각종 영화 시상식의 수상분야에서 의상상, 미술상은 있어도, 푸드 스타일리스트에게 주는 음식상 부문은 없는 게 의아하게 여겨졌습니다. 물론, 미술상이 음식에 대한 부분을 커버할 수도 있을테지만.


둘째, 이 책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라세 할스트롬 감독의 <초콜릿>, 가브리엘 엑셀 감독의 <바베트의 만찬>, 이안 감독의 <음식남녀> 같은 영화들은, 영화에서 음식이 빠지면 안되는, 음식이 영화와 인물 관계의 뼈대와도 같은 영화들에 대한 기억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책에서는 이런 음식 영화들(?)은 최대한 배제(?)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셋째, 과연 영화에서는 어떤 음식 이야기로 작가는 울분을 토하거나, 아쉬워하거나 맛있고 유용한 음식 팁을 제시할까를 생각하며, 이 책에 언급되었지만 제가 아직 못 본 영화들을 찾아볼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어쩔 수 없이, 앞으로 영화를 볼 때면 음식들이 신경이 쓰일(?) 것이 분명해보입니다.


끝으로, <백 투더 퓨처 2>를 중3 때 봤다는 걸로 봐서, 저와 비슷한 연배일 듯한 작가가 들려주는 영화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그 수많은 어둠 속에서 조마조마해 하던, 혹은 세상 시름 다 잊고 숨이 멎도록 웃어제끼던 영화들이 선물해준 시간들을 떠올렸습니다. 그 소중한 추억을 우리에게 허락해준 영화들, 그 뒤에서 고군분투 해주었던 사람들의 꿈들이 무척이나 고맙고 또 고마웠습니다.


이번 연휴엔 군침 도는 영화나 한편 낄여 봐야겠습니다^^



PS. <디 아더스>를 몇 번이고 빨리 감기와 되감기를 하며 달걀 깨는 장면을 찾아봤는데, 결국 찾지 못했는데 다시 보니 <디 아워스>여서 혼자 한참을 웃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두 영화 모두 니콜 키드먼이 주연으로 출연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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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를 넘어 - 칼 세이건 이후 우주와 인간의 새로운 이야기
세라 알람 말릭 지음, 고현석 옮김 / 흐름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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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처음 구체적으로 우주를 인식하고서 가장 처음 욕심을 부린 것은 다름아닌 천체망원경 이었습니다. 아마도 어린이 월간지에서 멋진 우주와 별자리 기사를 보며, 그것을 눈에 기꺼이 담아낼 방법이라 여겼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현미경 보다는 천체망원경을 좋아했지만, 결국 현미경 밖에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미세 생물들에의 호기심보다는 그 끝모를 우주를 향한 끝모를 동경이 턱없이 커져만 갔던 기억.

이 책에는 ‘칼 세이건 이후 우주와 인간의 새로운 이야기‘라는부제가달려있습니다.그리고 원제는 ‘간략한 우주의 역사’ (그리고 그 안 우리의 위치)‘ 정도로 번역될 수 있을텐데. 저 유명한, 하지만 제목은 알지만 시작만 수십 번 하는 여러 책들 중 하나인,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의식한 번역서 제목일거란 짐작을 해봅니다.

“우리가 별을 바라보는 이유는,
그곳에 우리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칼 세이건 (Carl Sagan) / p.4

책에서 처음 만나는, 본문이 시작도 하기 전에, 차례 앞에 위치하는, 문장입니다.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 싶은 부분이지요. 그렇게 입자 물리학자이자 암흑물질 전문가인 저자 세라 알람 말릭은, 칼 세이건 이후의 우주를 바라보는 시각을, 인류사를 관통하고 발견해낸 이론들을 섭렵하며 또 그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미답의 우주를 바라보며, 우리들 중 누군가의 목소리로 들려줍니다.
“우주는 말이야….”

“본능적으로 관계를 갈망하는 사회적 종인 우리에게 이 거대한 우주에서 홀로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전망은 더욱 불안하게 다가올 수 있다. 또한, 이런 가능성은 우리 존재의 의미를 한층 더 심오하게 만든다…(중략)… 설령 우리가 혼자가 아니더라도 이 창백한 푸른 점 위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거의 틀림없이 어디에도 견줄 만한 사례가 없을 것이다.”
-p.276

그렇다고 그저 에세이로 감상적인 우주론을 들려주는 것을 넘어서는, 분명한 존재론적 의미에서 우주인이자 지구인인 우리 인류를 돌아보고 내다보는, 공감을 초월하는 든든한 이론적 기반에서 드러나는, 뜨거움을 넘어서는 새파란 열기(!)가 문장 구석구석에 스며있음이 책 읽는 내내 느껴집니다.

사랑해마지 않는 영화 <인터스텔라>는 우주를 향한 인류가 마주한 것이 ‘시간’이었다면, 최근 개봉한 영화 <프로젝트 헤일 메리>의 지구를 지키기 위해 떠난 우주에서 인류가 마주한 것은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이 책 <코스모스를 넘어>는 그 시간과 존재 모두를 이야기한다 싶습니다. 여전히 흘러서 결국 마주할 미지에 대한 고백 같은.

“우주는 시작도 끝도 없는 끝없는 탐구의 장이다.”
-조르다노 브루노 (Giordano Bruno) / p.309


#코스모스를넘어 #세라알람말릭 #흐름출판
#도서제공 #서평단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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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십 페이지 강보라 그늘 단편선 3
정현수 지음 / 그늘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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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종이 밖으로 나서려고 했어요. 그리고 이것이 바로 고등학생 강보라의 페이지가 비로소 넘어가기 시작한 순간이었습니다.”
-p.14

팔십 : 시간
페이지 : 공간
강보라 : 인물
그리고 그걸 창작하는 작가 혹은 거인, 또 그걸 지켜보는 독자.

표제작이자 첫 단편인 <팔십 페이지 강보라>는 이렇게 완벽하게 짜여진 틀에서 시작하는 시한부 소설 속 인물, 단발머리 강보라의 이야기입니다. 아무런 손 쓸 수 없는 독자는 그저 작가가 써놓은, 인물들과 사건들이 펼쳐내는, 이야기를 그저 쫓아갈 뿐이지만, 그렇게 마음으로 개입하고 상상하는 역할을 해냅니다. 그게 소설을 읽는 재미 중의 하나일겁니다.
스스로를 제한하고 실망하고 무기력하던, 하얀 종이 속 강보라가 관계를 맺고 이야기를 만들어보려 합니다. 비록 보라색 팬지꽃 한송이지만요. 그런데 어느새 그 주어진 팔십 페이지에 닿아버리고 또 그렇게 마지막일지도 모를 용기를 그 하얀 종이 위에 굵게 남기려 합니다.
아, 읽다가 저는 그만 주먹을 꼬옥 쥐고 말았습니다!
‘그래, 강보라!’


“그러나 금지된 구역에 대한 갈망은 점차 심화되어 결국 우울증, 사회 혐오 등의 심각한 부작용을 양산해 냈고 그제야 대표자들은 이주 프로젝트라는 대안을 마련한 것이다.”
-p.47

두번째 단편 <이주 프로젝트>를 읽노라니, 두개의 분리된 듯 이어진 세계들을 이동하거나 교류하며 펼쳐지는 인물과 사건들을 다룬 몇몇 컨텐츠들이 떠올랐습니다. 영화 <매트릭스>. <업사이드 다운>, <써로게이트>, 그리고 만화 <가치아쿠타>.
어떤 이유로든 우리는 다른 혹은 분리된 세상을 동경하고, 또는 그 곳으로 옮겨가기도 합니다. 동경의 이유가 보이지 않았던 이면과 만나게 될 때, 어떻게 될까 하는 상상력을 있을 법한 지구의 미래에 대입해낸 이야기는, 묘한 공감과 또 그만큼의 공포를 던져줍니다.
끊어진 초록색 배선을 연결하고 다시 끊어지는 것이 다행일지, 불행일지를 자꾸만 생각하게 합니다.


“… 그 말을 믿어 버리신 거죠. 당연히 진실인 것처럼.“
-p.88

마지막 단편인 <별 모양 지구>은 상식 혹은 지식의 상대성, 절대로 그런 건 절대로 없다는 이야기를 뒤집어 쓴, 상대적 가치를 지향하며 언제나 변함없이 기득권을 누리는 이들에 대한 우화로 읽힙니다.
어쩌면 그런 복지부동의 상대성 이익을 누리는 시스템 속에서 분연히 일어나서 팬지 씨를 심고 모종을 심는 강보라가 있는가 하면, 뱃속 아이를 위해 이주를 포기하는 미성이 되기도 하며, 그럭저럭 순응하고 이용당하고 마는 시몬이거나 그의 덕을 보며 살아가는 사이먼이 되기도 합니다.


이 단편집 <팔십 페이지 강보라> 덕분에 처음 만난 정현수 작가는 과학도 다운 물리적 법칙이 지배하는 시공간을 종횡무진하기도, 그걸 뛰어넘는 초현실적 소재들을 끌어와서는 독자들을 금새 동의가 되는 익숙한 상황으로 끌어들여 어리둥절하게 했다가, 어느 순간 주변을 돌아보게 하는 독특한 글쓰기를 만나는 반가움을 선물해줍니다.

P.S: 저녁 먹고 분리수거 갔다가 오는 길에, 잠시 멈춰 고개를 천천히 올려 하늘을 마주해봤습니다. 가느다란 눈썹달이 어여쁘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꽤 괜찮은 밤, 선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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