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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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내 나이 5-6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곧 동생을 출산할 엄마를 도와 외할머니는 우리 집에 왔고, 나는 외가댁에 보내졌던 것이.

터덜거리는 시내버스를 타고 또 한참을 걸어서 들어간 시골 깡촌. 1년에 서너 번 명절 때나 가서 외사촌들이랑 어울려 놀거나 자고 온 적은 있었지만, 명절이 아닌 그곳엔 무뚝뚝한 큰 외삼촌, 그때까지 제대로 얼굴을 본 적 없던 큰 외숙모, 그리고 내내 곰방대에 담배를 채워 뻐끔뻐끔 거리시던 외할아버지만 계셨다. 그나마 살뜰하게 나를 챙겨주시던 외할머니는 우리 집에 가계인 상황이니, 그 두려움과 막막함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아마도 한 달 정도였던 거 같은데, 일 년은 족히 되는 듯 길고만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그런 기억이 남겨진 나에게, 어쩌다 맡게 된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는 개인적으로도 남다른 구석이 있는 이야기였다.


나의 기억 속에서도 그랬거니와, 얼마나 많은 '하지 말아야 할 것들'과 '해야 할 것들'에 대한 리스트 업고 반복으로 며칠 전부터 쇄뇌될 정도였는데,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힌다. 그렇게 소녀도 무정해 보이는 아빠와 차를 타고 뒷좌석에 누워 뒤 창을 통해 하늘을 보며 답답한 마음에 이러저러한 상상으로 닥쳐올 상황을 대비한다.


"아빠." 내가 말한다. "나무 좀 봐요." / "나무가 뭐?" / "아픈가 봐요." 내가 말한다. / "수양버들이잖아." 아빠가 목을 가다듬는다. (p.11)

"세상에, 아빠가 네 짐도 안 내려주고 가버렸구나!" 아주머니가 말한다. (p.21)

... 딸을 챙겨본 적이라고는 없는 아빠 같으니라고! 다정한 엄마도 육아와 출산으로 소녀에게 손을 뻗을 여력조차 없다.


그렇게 낯선 공간과 친척 어른들 사이에 맡겨진 소녀. 그 소녀의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마치 극장에서 3시간 넘는 4D 영화 한 편을 보듯, 소녀의 안과 밖을 섬세하게 보여주며 온몸으로 소녀가 되는 체험으로 이야기를 따라간다.

뭐 사건이랄 것도 없는 일상들에 작은 파문들이 일며, 알게 되지만 더욱 조심스레 마음을 말을 손에 꼭 쥐고만 있을 것 같던 소녀가, 어느새 마음을 열고 입을 열어, 따로 돌아가는 것 같던 세상과 손을 잡는 법을 배워나가는 과정을, 작가는 매끈하지만 제한된 문장들로 금세 빌드업 해낸다. 그리고, 지루함에서 애틋함을 지나, 손에 심장을 쥐고 달리는 마음에까지 이르른다.

뿐만 아니라, 무슨 사건이 일어날 듯, 조금씩 조여오는 무언가에 대한 실마리가 조금씩 윤곽을 나타내며 나아가는 미스터리 같은 구성이, 자칫 느슨하고 지루할 만한, 이 '긴 단편소설'을 찰진 이야기로 만드는데 한몫 해낸다. 무엇보다 소녀의 눈에 보이는 섬세한 마음 씀이 감정을 가득 보듬는다.


"... 그래서 가끔은 다른 사람을 믿으면서도 실망할 일이 생기지 않기만을 바라지. 하지만 가끔은 실망하고."...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꼬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p.70-71)


<맡겨진 소녀>를 읽고 그저 하루, 이틀을 보내며, 거실을 오가면서 무심결에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책 표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소녀가 되었다가, 칸셀라 아저씨가 되었다가, 또 칸셀라 아주머니가 되어 가슴에 쥐가 난 듯 울컥울컥하게 되더라. 그래서, 다시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아무 장면이나 쭈욱 훑어 읽으면 괜스레 미소 짓거나, 전속력으로 목장을 가로지르듯 심장 박동 수가 올라가는 기분이 드는 이야기, 심장의 박동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주먹으로, 머리카락으로 오가며 뜀박질해대는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 그래서 가끔은 다른 사람을 믿으면서도 실망할 일이 생기지 않기만을 바라지. 하지만 가끔은 실망하고." - P70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꼬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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