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십 페이지 강보라 그늘 단편선 3
정현수 지음 / 그늘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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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종이 밖으로 나서려고 했어요. 그리고 이것이 바로 고등학생 강보라의 페이지가 비로소 넘어가기 시작한 순간이었습니다.”
-p.14

팔십 : 시간
페이지 : 공간
강보라 : 인물
그리고 그걸 창작하는 작가 혹은 거인, 또 그걸 지켜보는 독자.

표제작이자 첫 단편인 <팔십 페이지 강보라>는 이렇게 완벽하게 짜여진 틀에서 시작하는 시한부 소설 속 인물, 단발머리 강보라의 이야기입니다. 아무런 손 쓸 수 없는 독자는 그저 작가가 써놓은, 인물들과 사건들이 펼쳐내는, 이야기를 그저 쫓아갈 뿐이지만, 그렇게 마음으로 개입하고 상상하는 역할을 해냅니다. 그게 소설을 읽는 재미 중의 하나일겁니다.
스스로를 제한하고 실망하고 무기력하던, 하얀 종이 속 강보라가 관계를 맺고 이야기를 만들어보려 합니다. 비록 보라색 팬지꽃 한송이지만요. 그런데 어느새 그 주어진 팔십 페이지에 닿아버리고 또 그렇게 마지막일지도 모를 용기를 그 하얀 종이 위에 굵게 남기려 합니다.
아, 읽다가 저는 그만 주먹을 꼬옥 쥐고 말았습니다!
‘그래, 강보라!’


“그러나 금지된 구역에 대한 갈망은 점차 심화되어 결국 우울증, 사회 혐오 등의 심각한 부작용을 양산해 냈고 그제야 대표자들은 이주 프로젝트라는 대안을 마련한 것이다.”
-p.47

두번째 단편 <이주 프로젝트>를 읽노라니, 두개의 분리된 듯 이어진 세계들을 이동하거나 교류하며 펼쳐지는 인물과 사건들을 다룬 몇몇 컨텐츠들이 떠올랐습니다. 영화 <매트릭스>. <업사이드 다운>, <써로게이트>, 그리고 만화 <가치아쿠타>.
어떤 이유로든 우리는 다른 혹은 분리된 세상을 동경하고, 또는 그 곳으로 옮겨가기도 합니다. 동경의 이유가 보이지 않았던 이면과 만나게 될 때, 어떻게 될까 하는 상상력을 있을 법한 지구의 미래에 대입해낸 이야기는, 묘한 공감과 또 그만큼의 공포를 던져줍니다.
끊어진 초록색 배선을 연결하고 다시 끊어지는 것이 다행일지, 불행일지를 자꾸만 생각하게 합니다.


“… 그 말을 믿어 버리신 거죠. 당연히 진실인 것처럼.“
-p.88

마지막 단편인 <별 모양 지구>은 상식 혹은 지식의 상대성, 절대로 그런 건 절대로 없다는 이야기를 뒤집어 쓴, 상대적 가치를 지향하며 언제나 변함없이 기득권을 누리는 이들에 대한 우화로 읽힙니다.
어쩌면 그런 복지부동의 상대성 이익을 누리는 시스템 속에서 분연히 일어나서 팬지 씨를 심고 모종을 심는 강보라가 있는가 하면, 뱃속 아이를 위해 이주를 포기하는 미성이 되기도 하며, 그럭저럭 순응하고 이용당하고 마는 시몬이거나 그의 덕을 보며 살아가는 사이먼이 되기도 합니다.


이 단편집 <팔십 페이지 강보라> 덕분에 처음 만난 정현수 작가는 과학도 다운 물리적 법칙이 지배하는 시공간을 종횡무진하기도, 그걸 뛰어넘는 초현실적 소재들을 끌어와서는 독자들을 금새 동의가 되는 익숙한 상황으로 끌어들여 어리둥절하게 했다가, 어느 순간 주변을 돌아보게 하는 독특한 글쓰기를 만나는 반가움을 선물해줍니다.

P.S: 저녁 먹고 분리수거 갔다가 오는 길에, 잠시 멈춰 고개를 천천히 올려 하늘을 마주해봤습니다. 가느다란 눈썹달이 어여쁘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꽤 괜찮은 밤, 선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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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의 문법 - 르네상스의 천재 피코 델라 미란돌라, 그리고 언어의 숭고한 힘에 대하여
에드워드 윌슨-리 지음, 김수진 옮김 / 까치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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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현지에서 출간된 이 책 <천사들의 문법 : 르네상스의 천재 피코 델라 미란돌라, 그리고 언어의 숭고한 힘에 대하여>의 원제는 ‘천사들의 문법 :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 언어의 마술적 힘을 찾아서’ 정도로 해석될텐데, 우선 오랜만에 르네상스의 시대로 순간 이동하는 묘한 쾌감 혹은 설레임을 안겨준 책이었습니다. 그럼, 시간이동!


에드워드 윌슨-리의 천사들의 문법을 읽으면서 계속 떠오른 생각은 하나였습니다.
이 책은 단순한 전기가 아니라, 언어로 세계를 이해하려 했던 한 인간의 집요한 기록에 가깝습니다.


‘그에게 언어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세계를 해독하는 방식’
책의 초반부를 읽다 보면 이런 감각이 분명하게 전달됩니다. 많은 독자들이 공통적으로 짚는 부분인데, 이 책은 단어 하나를 설명하면서도 그 뒤에 놓인 세계관까지 함께 드러냅니다.


‘그의 여정은 이동이 아니라, 지식의 경계를 넘는 과정”
중반부에 이르면 이야기는 더욱 흥미로워집니다.
한 학자의 삶을 넘어, 르네상스 시대를 가로지르는 지적 탐험처럼 느껴집니다. 필사본과 언어, 종교가 뒤섞인 시대의 공기가 생생하게 살아 있어, 독자는 자연스럽게 그 시대 한가운데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의 탐구는 학문이라기보다, 자신을 증명하려는 몸부림에 가까웠습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그의 집요함은 더욱 또렷해집니다. 이 지점에서 이 책을 단순한 지식서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야기로 읽히는 듯 합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덥으며, 제 안에 맺히는 말은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세계를 해석할 권리를 갖는 일’ 일수도 있겠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에드워드 윌슨-리는 과거의 한 학자를 통해 지금의 우리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는 듯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언어로 세계를 이해하고 있는지.

쉽게 읽힐 수는 없지만, 기어코 읽고 나면 조용히 오래도록 곁에 남겨질 책이다 싶습니다.
지식이란 어쩌면, 결국 세계를 다르게 바라보게 만드는 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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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읽지 않습니다
김상원 지음 / 황금가지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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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가 ‘점’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요? 무한대의 밀도로 응축된 ‘점’ 하나가 ‘빵’ 하고 터져서 이처럼 광활한 우주로 펼쳐졌다고요? 그것도 무려 138억 년 전에? 맙소사, 이게 말이 됩니까?” -p.7 


빅뱅이론, 다중우주론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더니, 문학출판사에서 근무하는 편집자의 시선으로 익스트림 줌인으로 들어간, 300여 페이지의 SF장편소설을 표방하는 이 책 <아무도 읽지 않습니다>. 책 제목 자체가 무슨 테제 같습니다.


어리둥절 하다가 보면, 어느새 페이지 넘겨가는 속도가 뺨을 스치는 바람이 느껴질 듯 제법 경쾌하게 내달립니다. 그런데, 읽는 내내 이상한 기분을 줍니다. 재미있어서 계속 넘기게 되는데, 동시에 ‘이거 웃어도 되는 이야기 맞나’ 싶은 뒤통수 쓸어내리게 되는 기분.


설정만 보면 전형적인 SF 같습니다. AI가 글을 대신 읽고, 대신 평가하고, 결국 대신 쓰는 세계. 그런데 읽다 보면 이게 미래 얘기라기보다 이미 시작된 변화처럼 느껴집니다. 긴 글을 끝까지 읽기보다는 요약을 찾고, 맥락보다 결론을 먼저 확인하는 습관들. 낯설지 않아서 더 묘하게 불편합니다.


 ‘텍스트힙’이란 단어가 등장하는가 하면, ‘교보문고 번따’라는 묘한 유행과 거부감이 공존하는 지금은, 출판물은, 문학서적들은 과연 인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시대에 도달했으니, 그저 SF라기엔 묘한 기시감 혹은 계시록 같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이런 이야기를 전혀 무겁게 끌고 가지 않는 김상원 작가의 리드믹한 문장과 이야기 구조는 분명 눈에 뜨이는 지점이었습니다. 문장은 가볍고, 전개는 빠르고, 중간중간 피식 웃게 만들고, 멍하게 문장과 문장 사이에 멈춰 서게 만듭니다. 


그래서 더 위험(?)한 소설이기도 하다 싶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읽다가, 나중에야 그 장면들이 자꾸 다시 떠오릅니다. 웃었던 포인트가 사실은 꽤 날카로운 질문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읽지 않는 시대를 다루는 소설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계속 읽게 됩니다. 그리고 다 읽고 나면, 책보다 오히려 우리를 떠올리게 됩니다. 요사이 어느 정도 도래한 ‘책태기’에 돌입한 나를 돌아보게도 합니다. 


소설을 쓰고 ‘음악을 만드는’ 작가는 이번 작품으로 처음 만났습니다만, 꽤 정확한 타이밍에 적절한 방식의 이야기를 잡아내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직 완전히 변해버리기 전, 우리가 어딘가 어긋나기 시작한 지점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래서 더 선명하게 남습니다. 다음 작품은 또 어떤 이야기로, 어떠한 변화가 끝까지 밀려간 세계를 보여줄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비틀어 보여줄지, 자연스럽게 기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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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이데아
이우 지음 / 몽상가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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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다소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초반에 흐름을 잡기까지 시간이 조금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계속 읽게 되는 작품이었습니다.

전개가 빠른 편은 아니지만,

인물들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쉽게 멈추기 어려웠습니다.


특히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흔들리는 모습이

답답하게 느껴지면서도 공감되었습니다.

과한 선택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돌이켜 보면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이 작품이 인상적이었던 점은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읽고 나니

서울이라는 도시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의 욕망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구조처럼 느껴졌습니다.


강한 재미를 주는 유형의 작품은 아니지만,

읽은 이후에도 계속 생각이 남는 책이었습니다.


#서울이데아 #이우 #몽상가들 

#도서제공 #서평단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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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수가없다 스토리보드북
박찬욱 지음, 이윤호 그림 / 을유문화사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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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없이 박찬욱의 신작은 개봉일 극장에서 였습니다. 입봉작과, 기괴함과 비범함이 종횡하던 이전 몇몇 영화들을 제외하고는 감독의 신작들은 그렇게 극장에서 만나는 것이 습관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깐느박, 이라 불리기 휠씬 전부터.


원작소설 <엑스>을 각색하는 것이 아니라, 코스타 가브라스 영화 <엑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의 판권을 사서 리메이크한 것으로 알려진 박찬욱 감독의 근작 <어쩔수가없다>는 그야말로 현재 진행형으로 읽혀질 소름돋는 이야기를, 각양각색의 캐릭터를 통해 투과, 굴절하며 이경미 감독과 협업한 인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래서 영화의 스토리보드북을 처음 받아들고서는, 인터셉터 하듯이 다음의 장면들이 어떻게 설계(!)되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책을 듬성듬성 펼쳐 들어갔습니다.


두번째 희생자, 차승원을 분재하는(?) 씬

조용필의 ‘고추잠자리’가 시끄럽게 깔리는 세 인물의 몸싸움씬

영화의 도입부, 화목하지만 왠지 서늘했던 마당 바베큐 씬


어찌보면 당연할테지만, 오선지와도 같은 비어있던 다섯 컷의 공간이 전부인, 딱 짜여진 양식의 스토리보드에 이런저런 정보들과 화면구성, 인물과 카메라의 움직임 등을 가지런히 담아내면, 어느새 평면에 세겨진 영화의 지도가 되고, 또 그렇게 여전히 2D의 스크린으로 빛과 소리에 담아 뿌려지면 스토리보드에 정보들이 의도된 연출을 통과해서 영화가 되는 그야말로 마술이 됩니다.

리원이가 패턴화된 그림으로 악보를 그리고 자신만의 악보를 보고 첼로를 연주하는 것 처럼.


영화사 이름 처럼 ‘모호’했던 구조와 이야기가 평면의 스토리보드북을 거쳐, 영화로 창조(!)되는 과정을 이렇게 MRI의 파단면으로 검진하듯, 이 책으로 다시 불러내보는 영화 <어쩔수가없다>는, 다시 OTT에서 불러내서 책을 실시간으로 펼치며 들여다보는 재미, 그 어쩔수없는 유혹의 손길을 기분 좋게 내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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