댜길레프의 제국 - 발레 뤼스는 어떻게 세계를 사로잡았나
루퍼트 크리스천슨 지음, 김한영 옮김 / 에포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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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얼마 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프리 드 로잔’(로잔 콩쿠르)에서 한국인 발레리노 최초로 그랑프리(1위)를 차지했다는 기사를 접하며, 정말 여러 분야의 K-컬처가 세계를 주름잡고 있다 싶어지며 국뽕(!)이 차올랐습니다. 발레가 이렇게나 가까이 있는 듯 하지만 또 그렇게나 손 닿지 않는 곳에 있기도 하다 싶었습니다.


  “1909년에 발레 뤼스를 만든 사람은 러시아의 임프레사리오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댜길레프다…. 그 시절 사람들에게 발레는 ‘러시아 발레’를 의미했다.”

  -p.11, ‘서문’ 中


댜길레프의 발레 뤼스가 열어젖힌 발레의 제국이 어떻게 그 전성기를 구가했고 현재에 이르는 패러다임을 확립해내었는지를, 이 책 <댜길레프의 제국>은, 책의 두께만큼의 성실한 조사와 재미있게 읽히게 써내려간 작가의 필력 덕분에 어렵지 않게 페이지가 넘어가는, 뿌듯해지는 책이었습니다.


  “...그것이 결국 그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그는 뜻한 바를 어떻게 성취해야 하는지 알았고, 자신의 의지를 어떻게 실행에 옮겨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p.63


책의 초반에 펼쳐보이는 댜길레프의 영민한 경영자로서의 면모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다가 종국에는 깊게 끄덕이게 하는 성장 혹은 각성의 과정을 좇아갑니다. 무엇이 될 것이가에 대한 대답을 스스로의 인생 궤적으로 보여주는 댜길레프는 그렇게 뿌리로부터 다져진 토양 위에 러시아 발레 프로그램을 만들고 또 성장시켜내며 스스로가 되고자 했는 분명한 목표를 처절하고도 철저하게 이룩해냅니다. 이름하야, ‘댜길레프의 제국’...


물론, 그 과정에 굽이치는 역사의 격랑과 안무가, 무용수 등 여러 변수들이 좌절과 눈물을 안겨주기도 하였지만 끝끝내 극복해내고야 만, 우리의 댜길레프! 


  “하지만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던 마지막 시기까지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장기적인 위험을 감수하며 계속해서 젊은 인재들에게 투자하고 음악과 디자인을 실험했으며 그러는 내내 교활함과 판단력을 버무려 카드를 섞고 패를 돌렸다.”

  -p.257


영원한 건 절대 없어! 그렇게 승승장구할 것 같던 발레 뤼스도, 1929년 댜길레프의 돌연한 죽음과 함께 공식적인 마침표를 찍게 됩니다. 하지만, 그 화려했던 20세기에 남겨놓은 댜길레프와 그의 발레 뤼스의 족적은 이렇게 흘러흘러 수많은 발레트망을 만들어내었고, 그 중 하나인 저자의 손에 의해 다시 쓰여지기 까지 이른 것이다 싶습니다. 이렇게 흥미진진한 발레와 사람과 시간의 이야기로 풀어내게 해준 댜길레프의 추진력을 빼어닮은 결과물로 말입니다.

그리고, 저자의 애틋한 노력으로 쓰여진 ‘발레 전도서’는 책에 언급된 작품들을 유튜브로 검색해가며 하나씩 영상으로라도 만나보게 하는 호기심의 씨앗을 심어줬으니 그 결과는, 제게 한해서는 성공적이라 하겠습니다.


  “지난 25년간 나는 극장에서 새로운 “운동”을 찾고자 노력해왔습니다. 우리 사회는 오늘날 위험하게 보이는 나의 실험들이 내일이 되면 없어서는 안 될 것들로 여겨질 것임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p.311, 죽음을 불과 몇 주 앞두고 댜길레프가 <타임스>에 보낸 편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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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 인생에서 중요한 모든 관계에 도움이 될 냉철하면서도 현명한 조언들
필리파 페리 지음, 방수연 옮김 / 알레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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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저의 취미 중 하나는 교우관계나 연애에 대한 상담이었습니다. 뭣도 모르던 시절, 이런 저런 제한적 독서를 믿고 그럭저럭 말로 상황을 모면할 솔루션을 제시해주면 또 곧잘 먹혔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내담자들과 보잘 것 없는 허영심과 근자감으로 취미 생활을 한동안 지속했던 기억입니다. 물론 입시의 부담감이라는 외부적 이유와 말빨이 딸린다는 내부적이고 실질직인 이유로 상담소는 그렇게 문을 닫고야 말았습니다.


이 책,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을 읽고서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그 학창시절 철없던 상담소장(?)의 시간이었고, 이 책이었다면 그 취미생활을 가장한 나름의 심리적 휴양지는 더 오래 영속할 수도 있었겠다 하는 즐거운 상상이었습니다.



  “나는 이 책이 당신의 초기 적응 방식과 신념 체계를 이해하고 도움이 되는 부분과 업데이트가 필요한 부분을 더 잘 인식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p.011


저자가 서론에서 밝혔 듯, 책은 다양한 고민상담의 이슈들에 답하는 형식으로 카테고리로 구분된 괜찮은 심리상담 지침서이자, 독자 개개인의 자기인식과 인간관계의 양과 질을 개선할 명쾌한 네비게이터가 될 만합니다. 


최근 <나는 솔로>라는 짝짓기 프로그램에 출연한 한 남자 출연자는 ‘내가 이렇게나 너를 사랑하고 이렇게나 열심히 너에게 어필하는데 어떻게 나에게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나를 선택하지 않느냐’는 일방적인 태도로 눈길을 끌었습니다. 경험의 부족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자기 객관화 혹은 자기인식의 결여가 가장 근본적인 문제의 이유로 보였습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내가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 그러기 위해서 내가 하는 행동은 어떠한지,를 분명하게 스스로 바라볼 수 없을 때의 상황에 좋은(?) 시뮬레이션이었다 싶었습니다.


  “나는 자극적인 사랑에 중독된 사람들에게 당신의 이상형은 당신에게 이상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종종 한다. 파트너를 고르는 것은 커튼을 고르는 것과 다르다.”

  -p.058, ‘집착은 사랑이 아니다.’ 中


서론에서 밝힌 이 책의 분명한 목적에 걸맞게, 다양한 관계문제를 챕터로 구분하고, 또 다양한 사례들을 거론하며 이에 대한 솔루션을 제시합니다. 그렇게 진행된 상담의 결과물로 중간중간 박스에 담겨진 ‘일상의 지혜’는 그것만으로 꽤 근사한 인간관계에 대한 아포리즘이자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감정을 관찰하되 내가 곧 그 감정이 되지는 말자. 감정에 완전히 압도되는 대신 감정을 관찰할 수 있도록 중립적인 부분을 조금이라도 유지하자.”

  -p.224, ‘스트레스와 불안 다스리기’ 中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책 읽는 것 만으로 삶이나 관계가 바뀌고 개선되지 않음을 압니다. 그것이 개별적 삶과 관계의 영역에 적용되고 시도될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임을 말입니다. 아무리 좋은 파트너나 멘토가 있다고 해도 내가 나 스스로 무언가를 해볼 마음이 없다면, 시도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호수에 비친 달 그림자를 쫓는 꼴’이 되고 말겁니다.



  “자기 인식과 삶에 대처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은 온종일 자기 성찰에 몰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내가 느끼는 감정과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p.283, ‘에필로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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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정의 상자
정소연 지음 / 래빗홀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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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살가운 SF소설이라니, 단편집이지만 다음 소설로 쉬이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동심원의 파문들이 자꾸만 마음 한켠에서 일렁이게만 하는 이야기들 앞에선 그렇게 속수무책이 되고야 말게 하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2024.10.20 <앨리스와의 티타임> 리뷰 中


3개월 여만에 '다시 만난' 정소연 작가의 이야기들은 처연하거나 뭉클하다가 또 안스럽도록 ‘살가운 SF’, 역시나 제겐 그러했습니다.

항성 간 초광속 이동 기술을 독점한 카두케우스 사의 존재를 공유하는 우주시대를 살아가며, 시간과 공간과 인연과 이별을 토로하는 속살거리는 ‘카두케우스 이야기’의 아홉 가지 이야기들.
그렇게 작가는 이러저러한 인물들을, 광대한 우주에 덩그러니 남겨진 감정의 크고 작은 소용돌이를 애써 외면하며 각자의 비상점에 이르러 마침내 마음의 소실점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게 만듭니다.


“그리고 당신도. 앞으로도 우주비행은 안 하는 편이 좋아요. 기회가 와도, 도약하지 마요.”
-p.79 <한 번의 비행> 中

21세기 이 지구마을 어느 구석에서나 일어나고 있을 법한 사는 이야기들이 더 넓은 우주로 옮겨졌을 뿐, 상대성이론과 양자물리학의 시간과 공간으로 관계의 변수를 추가했을 뿐, 오롯이 우리들의 이야기로 치환되어 있어서 마음이 쉽지 않은 페이지들과 문장들을 여럿 마주했습니다.


“그렇지만 수진아. 나달에 찾아온 가을은 너무나 아름다웠어.”
-p.105 <가을바람> 中

이야기 속의 인물들이 ‘비매품’인 우주여행이라는 허상을 향하듯, 지금 여기의 사람들이 목을 매고 생을 투자하며 상실해가고 있는 것들이 자꾸만 생각났습니다. 항성 간 이동을 하는 동안 느리게 흐르는 시간이, 남겨진 사람들과의 어마어마한 시차를 만들고 또 마음의 거리를 만들고야 마는 그 ‘비매품’ 때문에 이별하고 포기하고 좌절하고야 마는 그들이 지금 여기에도 똑같이 존재합니다. 그 아름다운 시간을, 그 순간들을 놓쳐버리는 사람들,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을 송두리째 갈아넣고 살아가는 사람들 말입니다.


책의 전반이 ‘원미래’를 담은 이야기라면, 후반에 자리하는 ‘무너진 세상에서 우리는’의 다섯 이야기는 ‘근미래’ 혹은 요몇년 사이의 우리네 삶을 절단면으로 들여다보는 듯 했습니다. 특히 표제작 <미정의 상자>는 가까스로 벗어난 ‘코로나 펜데믹’ 이야기라 더욱 그러했습니다.


“역학조사 결과에 따라 자가 격리 대상자와 자가 격리 권고자가 나뉘었다. 미정은 자가 격리 대상자였고, 유정은 자가 격리 권고자였다. 유경과 미정은 한집에서 공간을 나누어 생활했다.”
-p.263 <미정의 상자> 中

자가 격리, 진단검사, 음성, 양성, 확진자, 동선파악…. 그새 어색해져버린 단어들을 눈으로 확인하며, 얼마 전의 우리의 시간을 휘몰아치듯 지나간 그 때를 떠올렸습니다. 계획했던 모든 것들이 쓸모없이 사그라들어버린 그 때. 하루가 멀다하고 죽음의 소식들이 전시되던 그 때. 얼굴 맞대고 두런두런 거릴 수도, 죽음을 앞둔 이과 마지막 인사조차 거절당했던 그 때를 말입니다. 그 때의 불가항력의 안타까움과 간절한 희망을 다시 떠올려보노라니, 지금의 스스로를 돌이켜볼 마음이 생겼습니다.


“어떤 위기나 재난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고, 세계는 결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어떤 상실은 돌이킬 수 없지만, 우리는 결국 더나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천천히, 망설이고 의심하며, 그러나 확실하게 한 걸음씩. 이 믿음을 말하고 싶었다.”
-p.367, 작가의 말 中


정소연 작가의 문장들과 이야기들은, 다시 힘을 내고, 또 나아갈 마음가짐을 정비해보게 하는 든든하고도 거절할 수 없는 제안에 다름아니다 싶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들은 가끔씩 펴보며 면역력을 키우는 약 같은, 우리들의 사진첩이나 일기장 속 숨겨둔 누구나의 추억같은 살가움이 내내 뭍어나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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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제공 #책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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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기름
단요 지음 / 래빗홀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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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작품 <피와 기름>으로 단요 작가를 처음 만났습니다. 아마도 필명으로 보이는 작가의 이름이 주는 묘한 뉘앙스 만큼이나, 책 속에 펼쳐지는 이야기는 묘한 구석이 다분했습니다.

400페이지가 넘는 짧지 않은 이야기를, 가능하지 않음이 분명한, 요약이란 것을 해보자면… 우혁이라는 인물이, 필연일 것만 같은, 도유와의 우연한 만남들과 그 만남들이 이끄는 사건들을 통과하면서 그 안팎을 들여다보는 이야기, 정도가 될 수 있겠습니다.


“요새 어쩌고 사냐?”
-p.11 (소설의 첫 문장)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첫 문장이 유명한 소설들인 <두 도시 이야기>, <안나 카레니나>, <이방인>, <설국>이나, 마지막 문장이 유명한 소설들인 <위대한 개츠비>, <1984>,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의 문장들 만큼이나, <피와 기름>의 처음과 마지막 문장은 꽤나 제게 인상적인 여운을 남겼습니다.

“...나는 그러고 살기로 했다.”
-p.414 (소설의 마지막 문장)

따로 떼어놓으면 뭐 대단할 것 없는 두 문장들이, 작가가 창조한 인물들이 그 창조된 세상을 통과하며, 혹은 살아내며, 변모해가는 것을 초근거리에서 지켜볼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독자의 입장에서,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돌이켜보면 달리 보였습니다. 그믐에서 진행했던 박장살 (박소해의 장르살롱)에 남겨준 작가의 답변글을 통해서 저의 그 주관적 혐의는 그렇게 또아리를 틀고 생각에 생각을 엮어내기도 했습니다.

“이제 뭘 하지?”
-p.51

“이제 뭘 하고 살지?”
-p.413

사는 것. 만나고 엮어가는 것. 복잡한 사상과 우연의 사건과 그 편린들이 확장해내는 것은 그렇게 또 ‘모든 것은 삶으로 수렴한다’는 단순한 문장으로 이야기를 다시 요약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종교와 윤리나 철학 같은 제법 굵직한 지식으로 조적해낸 세계관을 낱낱이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직관적으로 흘려읽을 수 밖에 없는 미천함을 탓하며, 좀 더 넓고 깊이 있는 읽기에는 실패했다는 아쉬움은 내내 남겨질 듯 합니다.

“나는 인간에게 풍요와 자유를 안겨다 줬다. 심지어 나를 욕보일 자유마저도. 그런데 무엇이 문제일까? 왜 이들은 가지지 못한 것으로 끊임없이 불행해하고, 그러면서도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눌 줄 모를까?”
-p.411

1992년 10월 28일 휴거설의 다미선교회 사건과, 1999년 12월 31일 노스트라다무스, 하나님의 교회 종말론 사건과 관련된 개인적인 경험들과 오버랩 되었던, 새천년파 에피소드도 꽤 충격파가 컸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 펼쳐지는 현기증나게 하는 이야기의 전개는, 독자의 수준(?)에 따라 다양한 층위의 재미로 읽을 수 있게 해주는 이 소설만의 독특함이다 싶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만화경같은 이야기 말입니다.
그만큼 쉽게 읽으려면 이야기의 속도만큼 쉬리릭 읽어낼 수도 있지만, 신학적 지식과 윤리학, 사회학의 레이어에 접근해낸다면 느리더라도 깊이 있는 이야기 속으로 다이브도 가능한 소설, <피와 기름>. 아마 근래에 읽은 소설 중 굉장히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임에는 분명해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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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의 엄격함 - 보르헤스, 하이젠베르크, 칸트 그리고 실재의 궁극적 본질
윌리엄 에긴턴 지음, 김한영 옮김 / 까치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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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이 책을 읽는 동안, 장애물 달리기의 트랙에 세워진 수없이 많은 허들과도 같은 주석의 숫자들을 모른 척하면서, 혹은 나중을 기약하며 읽기를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하며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습니다.
그만큼 명쾌한 문장과 모호한 문장이 만나고, 그 속의 날 것의 생각과 숙성된 생각이 부딪혀 만들어내는 파열음과 섬광 같은 무언가 순수한 에너지 같은 탄성이 분출되어 마침내, 어떻게 보르헤스와 하이젠베르크와 칸트가 씨줄과 날줄처럼 시간과 공간을 오가며 독자들을 이끌어내는지 오롯이 체험할 수 있는 독서는 마무리되었습니다.


“결국 보르헤스가 그의 글 전체를 통해서 보여주듯이, 그에게 시적인 약속을 배반하는 듯 보였던 말의 불명료성을 적절히 이용하면 그 자체로부터 다른 구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자아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었다.”
-p.53


“...또한 어렸을 때 독일어를 익히기 위해서 읽었던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에서부터 보르헤스가 잠깐 행복을 느낀 그날 오후의 흐름을 붙잡아서 영원으로 변질시키기를 바랐던 때와 같은 시기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세상에 풀어헤친 바로 그 원리에 이르기까지 문화와 과학의 은밀한 맥락들을 유려하게 흐른다.”
-p.192~193


“우주에는 궁극인이 있어야 하며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본 아인슈타인의 믿음에 자극을 받은 하이젠베르크는 시공간의 작은 편린들 사이를 기계론으로 중재하려고 하면서 안개상자 내부에 전장의 경로처럼 찍힌 점들 간의 보이지 않는 공간 속으로 깊이 뛰어들었다.”
-p.287~288


“칸트는 현대 물리학으로 가능해진 극한적인 측정을 접할 수 없었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인과적 사슬을 깨고 세밀하게 분석해 들어가다 보면 반드시 한계점이 나타난다. 분석이 거기에 놓인 이율배반의 어느 한쪽에 안착하기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추론이라는 것을 할 수 있게 해주는 휴리스틱적 가정을 우리가 기정사실로 취급하는 한 그 이율배반은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p.356~357


긴박감 넘치는 한편의 영화 예고편과도 같은 짧지 않은 서론을 통해 저자인 윌리엄 에긴턴이 보여주고자 했던 이야기는, 그렇게 문학과 양자물리학과 철학이라는 전혀 다른 우주가 하나의 더 커다란 우주에서 만나고 있음을 4부작 미니시리즈로 태어난 듯 합니다.
서론(프롤로그), 제1부 시간의 편린 위에 서다, 제2부 신이 아닌 존재, 제3부 우주에 끝이 있을까?, 제4부 자유의 심연, 그리고 에필로그까지.


“보르헤스의 단편들, 하이젠베르크의 발견, 칸트의 체계는 이러한 환상에 깔린 전제, 앎과 존재의 완벽한 일치는 더 깊이 조사하면 스스로 파괴된다는 것을 드러낸다.”
-p.371


어려운 이야기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방식의 탁월함이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해서 자꾸만 그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는 이 책 <천사들의 엄격함>은, 그런 이유에서 철학과 과학과 문학의 통섭을 통해 더 나은 우리로 향하는 길을 넌저시 제시하고 있는 인상을 받습니다. 곁에 두고 이따금씩 아무 페이지라도 펴서 아무 문장이라도 읽어내리다 보면, 좁디좁은 이슈에 매몰되어 찰나와 같은 인생을 덧없이 소비하는 현대인들, 특히 작금의 대한민국을 살아내는 이들에게 필요한 혜안이 무엇인지 설파해주는 구석이 다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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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igorOfAng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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