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리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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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이야기꾼이 오셨다. 모두 일어나 맞이하라!
이름처럼 왕의 귀환에 다름 아닌 신작 <홀리>는 작가의 전작들에 사이드킥처럼 등장했던 홀리 기브니를 원탑 주인공으로 하고, 책의 제목도 그녀의 이름을 내세웠습니다. 이야기의 짜임새와 살아있는 캐릭터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쫀쫀한 문장들로 가득한, 역시나 천의무봉의 솜씨를 눈에 보이게 뽐내는 작품이었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이러면 지나친 자의식을 운운할 법도 한데, 뭐 스티븐 킹이니 뭔들! 데뷔 50주년의, 하지만 여전한 필력으로 세계의 독자들을 그야말로 들었다 놨다 합니다.

“아무 문제 없어! 우리가 해냈어, 로디! 개새끼를 잡았다고!” 에밀리는 흥분해서 갈라지는 목소리로 외친다.
- p.19

이야기는 2012년 10월 17일에 80대의 은퇴한 노교수 해리스 부부가 40대의 호르헤 카스트로 교수를 납치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2021년 8월 18일로 마무리되는 선형적 이야기구조로 되어있습니다. 중간 중간 시간을 건너뛰거나 다시 시간을 소환하며 숨겨진 이야기나 다른 시각을 제시하면서 극적 긴장감을 이끌어내며 나아갑니다. 사건이 벌어지고 그 사건의 범인(들)을 미리 알려주고 시작하는 방식이 풀어낼 수 있는 긴장감이라.

역시나 많은 작품들이 영상화된 작품들을 보유한 작가답게 페이지 페이지마다 펼쳐지는 장면들, 사건들, 인물들은 문자와 단어, 문장으로 종이 위에 인쇄되어 있지만 빛이 책을 반사해서 독자의 눈 뒤쪽에 상이 맺혀서 시신경으로 뇌에 정보로 전달되면 그 즉시 영상으로 펼쳐지듯 책을 읽어내는 속도대로 상영되고 있다 싶을 독서경험을 선사합니다.

“죽은 사람은 샬럿이었다.
그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달에게 자랑스럽게 선포했다시피 열렬한 트럼프 지지자답게 백신을 맞지 않았고 심지어 마스크도 쓰지 않았다.”
- p.36

그리고 몇 해 전 우리 모두에게 분리와 슬픔을 경험케 했던 코로나 팬데믹과 미국의 정치논쟁 또한 이야기의 한 축으로 관계들과 사건들에 직접 개입합니다. 그 덕분에 그 시간들을 통째로 통과해냈던 개인적인 이런저런 기억들도 들추며 이야기를 따라 가보는 독특하면서도 이야기를 더 가깝게 느끼며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의 전말이 공개되었을 때의 공포와 분노가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악마의 의인화.

600페이지가 가까운 그야말로 벽돌책이라 이걸 언제 다 읽나 생각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이내 기우였음을 직감했습니다. 읽어내는 페이지들이 뭉텅이로 넘어가는 걸 보노라니 남겨진 페이지들이 주는 긴장감과 위안의 양가감정을 느끼며, 홀리가 홀리하는 걸 지켜보는 즐거움은 배가되었습니다. 이야기의 후반으로 갈수록, 맛있는 순대국밥을 먹을 때 뚝배기의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할 때 느끼는 아쉬움을 맛보았습니다.
역시 이야기 맛집 사장님 스티븐 킹!


#홀리 #홀리기브니 #스티븐킹 #이은선번역 #황금가지
#도서제공 #서평단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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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클래스 topclass 2024.9 - 요즘 이사
톱클래스 편집부 지음 / 조선뉴스프레스(잡지)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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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이슈의 주제는 이사입니다. 되돌아보면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지금 이곳에 이르게 되었는지, 지금까지의 저의 삶의 공간은 어떤 여정으로 몇 번의 이사를 거쳐왔나 떠올려보니 정말 아득해집니다. 부모님의 사업실패와 업종변경, 진학, 군입대, 취업, 결혼, 가족형태의 변화 등 여러 가지 사건들이 그야말로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그 이사들은 대부분 경황없이 느닷없이 진행되곤 했고, 서류나 재정의 부분도 매번 새롭다가 금새 잊혀지는 휘발성 정보였던 기억입니다.

 

그래서 이번 이슈는 그렇게 각 잡고이사의 디테일에 서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코스요리로 셋업되어있습니다. 이사의 전반을 코디네이팅 해주는 이사 플래너, 이사 중이나 공간의 효율을 위한 공유창고, 이사의 실제인 이송 전문업체, 이사갈 집 혹은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소프트웨어를 갖추기 위한 인테리어, 각종 플랫폼 등 다양하고 꼼꼼하게 준비해놓은 코스요리 맛집 정도 되겠습니다.

 

집과 머묾에 대한 생각은 삶에 대한 고찰을 수반합니다. ‘어디에서 어떻게 살것인가라는 질문은 나는 잘 살고 있나’ ‘우리 사회는 잘 작동하고 있는가’ ‘나는, 사회는 이대로 가도 되는가와 같은 생각을 품게 합니다.”

- p.5

 

삶은 그렇게 의식주라는 베이스캠프를 기준으로 몸과 마음, 영혼이 여러 모양으로 자라나고 전진하도록 상호보완하는 것일진데, 그 중 집()은 현대사회에 특히 대한민국에서 모종의 민감게이지를 담당하고 있기에 집에서 집으로 이동하는 이사는 그 게이지의 레인지를 확장하거나 검증하는 그 무엇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탑클래스 다운 인터뷰이들을 포진시킨 이번 이슈는, 그래서 곧 마주할 가을하늘과 들녘을 기다리듯 더없이 풍성한 말과 생각의 향연이었습니다. <글로리>에서 <리볼버>까지 여전히 우상향 곡선을 그리는 임지연 배우, 전성기에서 시작해서 여전히 전성기인 레인, 정지훈 배우를 비롯한 4-50대의 정신세계를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쇼펜하우어까지 말입니다.

 

폭염과 열대야에 시달릴대로 시달린 육신과 영혼은 사람들과 책 속에서 계절의 변화를 마주해야 한다는 제 개인적인 지론에 가장 부합하는 컨텐츠, 가을맞이 <topclass>는 그렇게 소소한 정보에서부터 적어도 순수한 지적 양심을 장착하기에 더없이 좋은 선택이었다 싶습니다.

 

topclass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topclass #탑클래스 #요즘이사

#도서제공 #서평단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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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쓸모
로랑스 드빌레르 지음, 박효은 옮김 / FIKA(피카)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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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라는 어려운 숙제를 풀어 나갈 때, 철학은 쓸모가 있을까? 우리가 원하지만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을 마주할 때, 철학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까? (......) 철학의 쓸모는 두 가지다. 하나는 여러 질병으로 고통받는 우리에게 진단과 소견을 제공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스스로 건강하다고 믿는 우리가 실제로는 병에 걸린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 p.012


로랑스 드빌레르의 신작 <철학의 쓸모>의 원제 <Guérir la vie par la philosophie>는 ‘철학으로 삶 치유하기’입니다. 그 쓸모의 대상을 삶과 그 안에서 마주하는 여러 고통들이라고 보고, 그런 질병들에 대한 진단과 소견, 그리고 질병으로 인식하게 하는 용도로의 철학을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그 고통들을 ‘육체의 고통’, ‘영혼의 고통’, ‘사회적 고통’ 나누어 들여다보고 각각의 고통들에 속하는 하위 진단별로 철학자들의 처방전을 제시하는 것으로 철학의 쓸모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 외의 ‘흥미로운 고통들’을 통해 다양한 삶의 면면에서 고통으로 발전할 대상들의 예시와 예방법 등을 들려줍니다.

루크레티우스의 처방전 ‘자유롭게 사랑하기’에서 사랑으로 인한 영혼의 고통에 대해 이렇게 갈음합니다.


“에피쿠로스 철학의 치료법은 시도 때도 없이 사랑에 빠지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누군가를 사랄할 때, 오직 하나뿐인 사랑을 찾았다거나 평생 단 한 번만 사랑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유롭게 사랑하는 베누스의 당부다.” (p.165)


또 이런 처방전은 어떤가요? 밤낮없이 직장과 가정의 일들로 번아웃이 오고, 공황장애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니체는 ‘불성실한 일꾼 되기’라는 처방전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노동에 늘 너무나 많은 힘을 쏟는다. 그러나 노동에 있어 중요한 것은 노동에서 인간을 소외시키는 온갖 성실함을 거부하고 불성실한 일꾼이 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p.249)


일을 하는 나 자신을 잃어버리도록 학대하는 노동이 아니라, 스스로를 놓치지 않고 노동이라는 수단으로의 대상을 목적으로 착각하지 않음으로 노동보다 자신을 돌보고 성장하는 것을, 그렇게 불성실한 일꾼이 되라고 설파하는 니체, 늘 잊지 말고 다짐해야할 인생의 방파제 같은 처방전이다 싶었습니다.


이렇듯 <철학의 쓸모>는, 형이상학적이고 지상에 발 딛고 서있는 우리네 삶과 동떨어진 그 무언가로서의 철학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매일의 일상에 살갑게 동행하며 시도 때도 없이 마주하는 여러 어려움들에 다양한 기능을 장착한 맥가이버 칼 같은 도구로써의 철학을, 그 철학의 쓸모를 저자 로랑스 드빌레르는 하나하나 제시합니다. 그렇게 친절한 철학 사용설명서 덕분에 이 책의 페이지들마다 가득하게 밑줄들이 난무하게 되는 폐해가 속출하니, 책을 깨끗하게 보는 스타일의 저 같은 독자라면 큰마음 먹고 읽기 시작할 것을 미리 경고합니다.


이렇게 살가운 접근방식으로 적어내린 덕에 이 책은 철학 입문서로 읽히기에도 손색없다 싶습니다. 물론 이런 다양한 철학자들의 처방전을 받아들고 그저 고개 한번 끄덕이는 것으로 끝낸다면 그 쓸모는 무쓸모로 다시 회귀할 뿐 일겁니다. 그러니 스스로의 고통을 인식하고 그에 따른 진단과 처방을 받을 수 있도록 철학을 삶의 곁에 항상 둬야 하겠고, 그런 개인 주치의 같은 책으로 이 책 <철학의 쓸모>를 감히 추천해봅니다.



#철학의쓸모 #로랑스드빌레르 #박효은번역 #피카출판사

#밑줄긋기 #철학입문서 #철학처방전 #철학진단서

#도서제공 #서평단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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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홀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정훈 옮김, 이중원 감수 / 쌤앤파커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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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한줄평 :
각박한 우리네 인생과 알게 모르게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타자들을 인식하고 이해할 마중물 같은 이야기!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경험은 신비로움이다.
그것은 근본적인 감정이며 진정한 예술과 진정한 과학의 요람이다.
그것을 모르고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는 사람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그 눈은 흐려져 있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책의 시작은 저 유명한 아인슈타인의 아포리즘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 책은 이론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의 저서입니다. 이론물리학으로 우주를, 블랙홀을 거쳐 화이트홀에 이르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과정을 ‘설명’하거나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그러므로 우주를 향한 마음을 준비한다면 카를로 로벨리의 이야기를 따라가기에 충분한 독자가 될 수 있습니다. 블랙홀이나 화이트홀, 우주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무쓸모라고 할 수는 없으나, 거의 무쓸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가능하기나 할까 싶은 마음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이렇게 단어와 문장들로 적어내리면서도 문득문득 떠오르긴 합니다만, 역시나 문득 떠올랐다 금새 가라앉고야 마는, 역시나 ‘습관성’ 기우입니다.
물론, 어떤 여행도 그러하겠지만, 이 책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 나서는 여행 또한 아는 만큼 재미있고 또한 아는 만큼 깊은 사유나 관심의 확장으로 나아갈 여지를 주기는 합니다. 당연하게도 말입니다. 허나 그러지 않더라도 충분히 즐겁고 흥미로운 여행이, 그리고 종종 몇몇 꼭지에서는 모험이라고 할 정도의 경험을 선사하는, 될 수 있습니다. 장담컨대!

“단테 역시 지옥의 문턱에 들어서기도 전에 가장 큰 난관(세 마리의 야수)에 부딪칩니다. 여느 나그네와 마찬가지로 그는 첫 걸음이 가장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익숙한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니까요.”
- p.49

그래서 이 여행에는 뒤러, 단테, 갈릴레오, 아리스토텔레스, 장자, 사포 등 전혀 무관할 것 같은 인물들이 깜짝 등장해서 반가움 혹은 의아함을 제공해주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이야기는 유유히 블랙홀을 거쳐 그 시간이 거꾸로 된 화이트홀에 까지 이르는 서사시에 다름 아닙니다. 그저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흩어져있고 무관한 풍경들이, 중간중간 졸다가 봤던 것 같은 차창 밖 풍경들처럼 기억에 남아있기도 하고 아예 통으로 놓쳐버리기도 하지만, 어느새 이야기는 아쉽게도(!) 도착지에 마침내 도착하게 됩니다.

“화이트홀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에도, 우리는 순수한 이성적 존재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해하려는 대상과는 다른 세계에 속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려는 별들과 다르지 않고, 우리는 그 별들의 인도를 받으며 나아가는 과정 그 자체입니다.”
- p.169~170

물리학은, 제가 아는 바로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학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시간과 공간을 점하고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 그 자체가 물리학의 대상이 되는 것이고, 그 티끌과 같을지도 모르는 우리네 각자의 인생에 몰두하느라 무관심했거나 감히 관심을 가질 수 없었던, 우리가 점유하고 혹은 공유하는 시간과 공간의 타자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것만으로도 물리학은, 그걸 수학으로 풀어내는 이론물리학은 그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화이트홀>은, 가끔 뉴스에서나 해외토픽으로 스쳐지나가 버리는 블랙홀, 화이트홀, 이벤트 호라이증 등은 그래서 우리네 인생에 가끔씩 소환해내고 우리 외의 타자들을 문득 떠올리게 해주는 용도로 사용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해주었습니다.

#화이트홀 #카를로로벨리 #쌤앤파커스 #화이트홀 #블랙홀 #우주 #과학
#이론물리학자 #물리학의시인
#시간이거꾸로된블랙홀 #시간은흐르지않는다
#도서제공 #서평단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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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뉴어리의 푸른 문
앨릭스 E. 해로우 지음, 노진선 옮김 / 밝은세상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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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만난다는 것은 낯선 누군가의 인생을 만나는 것이기도 하고, 낯선 세계의 문을 여는 것이기도 하며, 그렇게 그 낯선 누군가와 함께 낯선 세계를 모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책이, 책이 담은 이야기가 독자에게 선보이는 경험은 참으로 마법과 같은 시간을 선물 받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재뉴어리의 푸른 문>은 완벽하게 부합하는 특별한 경험을 선물하는 이야기입니다.


개인적으로 책을 읽는 첫 의식은 책 표지를 여러모로 감상하는 것으로 시작하곤 합니다. 알폰스 무하의 작품들의 뉘앙스를 풍기는 이미지는 앞면은 물론이고 책등을 거쳐 뒷면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고 또한 여러 가지 요소들을 포함하는 예고편 같은 느낌입니다. 그리고 이 책의 원제 <The Ten Thousand Doors of January>는 ‘재뉴어리의 만개의 문’ 정도로 번역될 텐데, 번역된 이 책은 ‘만개의 문’을 ‘푸른 문’으로 바꿨습니다. 점입가경, 이미지와 문자 정보가 제법 이야기를 만나기 전부터 군침을 삼키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앞날개에 있는 처음 만나는 작가 앨릭스 E. 해로우의 소개를 보고는 왜 이제야 만나게 된 건지 의아할 정도로 대단한 이력의 작가다 싶었습니다. 그만큼 기대감 또 상승!


이야기는 크게 재뉴어리와 그 주변을 통해 재뉴어리의 정체성과 환경, 관계들 그리고 삶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주며 달그락달그락 독자의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전반부와, 본격적인 재뉴어리의 환상적인 모험을 따라가며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펼쳐보이는 후반부로 구성됩니다. 읽는 내내 이상하리만큼 최근 극장에서 봤던 영화 <가여운 것들>이 문득문득 떠오릅니다. 남다른 태생, 관심과 관리의 대상인 주인공이 우연하고도 저돌적인 여정을 떠나서 낯선 상황과 사람들을 만나며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집으로 돌아와 새로운 나로 살아가기 시작한다, 는 스토리라인. 또한 <오즈의 마법사> 속의 도로시의 여정도 떠오릅니다.


문과 문지방과 문의 이쪽과 저쪽. 문으로 나눠진 세계와 관계와 시간은 문지방 위에서의 갈등과 고민 그리고 이 세계와 저 세계를 마주한 선택이 매번 재뉴어리를 괴롭히기도 하고 새로운 힘을 얻기도 합니다. 그 문이 책에서 비롯된다는 설정도 그 이야기를 펼쳐내는 묘사와 대화들을 담은 문장, 정말로 작가가 문장을 가지고 밀당을 벌이는 능수능란함이 이 이야기의 종횡무진의 속도감을 한없이 하드캐리 합니다. 물론 이 능수능란함을 이미 다른 작품들의 번역으로 독자들의 신뢰가 두터운 노진선 번역가의 솜씨로 제대로 옮겨놓았음도 미더운 구석이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이 허리까지 올라오는 파도 속에서 서로 얼싸안고, 그들의 눈이 길 잃은 배를 마침내 집으로 인도하는 등대처럼 환히 빛나는 걸 지켜본 사람이라면 사랑의 존재를 결코 부인할 수 없었으리라. 사랑은 두 사람 사이에 걸리 작은 태양 같았다. 열을 내뿜고, 그들의 얼굴을 붉은빛과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태양.’

- p.246~247


‘아빠는 날 버리지 않았어. 날 데리고 가려고 애썼지.’ 그런 생각이 작은 태양처럼 눈 뒤에서 이글거렸다. 눈이 심하게 부셔서 편안하게 바라볼 수 없는 태양처럼.

- p.361


짧지 않은 이야기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에 이르러서야 그야말로 어떻게 지나왔나 싶게 금새 읽힌 듯 푹빠져서 읽어버리고야 말았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단일이야기로 마무리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내내 마블영화 시리즈의 쿠키영상을 기다리듯 그 다음 이야기가, 다른 인물들의 소식이, 그리고 문에 대한 궁금증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내놓으면 좋겠다는 조바심이 넘나듭니다. 그리고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단편들과 장편들이 국내 독자들에게 소개될 날을 고대하고 있는 저 스스로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니, 버텨야 해....

그러면, ...문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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