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의 그림자 속에서
알비다스 슐레피카스 지음, 서진석 옮김 / 양철북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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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것이 일어난 과거 속 그날들은 마치 안개에 묻힌 것 같아. 세상에 존재하는 우리 인간들, 또 우리가 겪는 모든 일은 전부 바람이 몰아오는 눈발이나 우두커니 잠자코 기다리는 고요한 안개에 싸여 있는 것처럼 보였어. 이제 다 지나간 일인데도 도무지 잊을 수가 없어. 더 뚜렷해지는 기억들도 있지만 더러는 빛바랜 사진처럼 잊히기도 해. 기억과 망각이 그 모든 것을 눈, 모래, 피 그리고 혼탁한 물과 함께 앗아가 버렸지.”
<p.5>

이제는 관용구가 되어버린 ‘오래된 미래’라는 말이 있습니다. 2011년에 리투아니아어로 최초 출간되었던 작가 알비다스 슐레피카스의 첫 소설이 마침내 대한민국에 도착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비로소 시작되는 고통과 죽음이 깊게 드리운 삶이라는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소설은, 전쟁 후의 고아와 과부들의 피폐해진 실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듯하다, 어느 순간 처연한 산문시가 되더니 그 슬픔의 계곡으로 더욱 깊게 독자들의 마음을 침잠시켜버리곤 합니다. 그렇게, 어둡고도 어두운 수천 겹으로 둘러싼 숲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듯 번민하느라 읽어내는 속도를 늦추기를 수십 차례하며 겨우 읽어내는 경험적 독서를 마주합니다.

“레나테는 평화로운 날을 꿈꾸고 있다. 엄마는 여름 들판에서 웃으며 예쁜 책으로 레나테에게 읽기 공부를 시켜 주고 있다...우울함과 공포가 번진다. 책의 책장은 혼자서 넘겨지고 말라붙어 주름진 살처럼 구겨진다. 그 후 모든 것들이 조각조각 떨어지고 엄마의 얼굴은 왁스처럼 녹아내렸다...”
<p.139>

전쟁이 끝나도 전쟁이 남긴 우울함과 공포는 오히려 삶에 번지고 삶을 갉아먹습니다. 레나테가 바라던 평화는 그저 일상이었고, 그저 가족과 함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더 뚜렷해지는 기억들로 현실을 악몽으로 만들어버리고, 추억 속의 엄마 얼굴을 녹아내리는 왁스로 꿈꾸는 평화는 더 이상은 꿈꿀 수도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 레나테가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장 가운데에 숨쉬고 있을테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장에서 숨죽이고 있을 것입니다. 이미 종전과 휴전의 상황에서도 여전히 남은 생을 견디어내고 떠도는 난민들의 행렬은 그칠 줄을 모릅니다. 어쩌면, 이 지구촌 어디에도 전쟁과 그 전쟁의 피해자가 사라지는 순간은 결코 오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이 책 <늑대의 그림자 속에서> 속의 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이자, 현재의 이야기이며, 또한 미래의 이야기입니다. 이 슬픔의 계곡은 그렇게 과거로부터 다가올 미래까지 깊어져만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추모의 시이자, 예지몽이며, 르포르타쥬이자 환상극입니다. 전쟁을 이야기하지만 전쟁을 비유하고 있는 책이다 싶습니다. 그걸 펼쳐내는 낯선 작가의 이 첫소설의 지연된 도착이 아쉽지만, 그럼에도 반갑고 반가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옹호하며, 인간성과 양심을 견지하는 이라면 누구라도 꼭 읽어냈으면 하는 책을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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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보다 Vol. 2 벽 SF 보다 2
듀나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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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SF 보다> 시리즈의 두 번째 단행본. 단편, 하이퍼-링크, 크리티크 등을 포함하되 하나의 주제로 엮어내는데, 이번엔 “벽”이 그 주제입니다.
처음은 문지혁 작가의 하이퍼-링크 <넘을 수 없는, 넘어야 하는>으로 시작해서, 여섯 편의 단편들을 거쳐 마지막에 심완선 작가의 크리티크 <벽을 둘러싸고 일어나느 세가지 일>로 마무리되는 독특한 구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문학이 무엇인지, 장르와 SF가 무엇인지 나는 아직 정확히 모르지만, 어쩌면 그건 끝없이 벽을 넘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아닐까? 사람과 방과 계단과 궁전을 넘어, 눈군가 우리에게 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기도하고 그리는 일. 우리에게 메타포가, 비유와 우화가, 문학이 그런 것처럼. 이야기는 벽이 되고 문이 되고 세계가 된다. 책은 벽돌이다.”
<p.12-13. 넘을 수 없는, 넘어야 하는 (문지혁) 중>

Hyper-link. 영화 <스타트랙>이나 <스타워즈>에서의 ‘워프’처럼 물리적 공간을 축지법처럼 건너뛰게 하는 것을 일컫습니다. 혹은, 인터넷 환경 등에서 특정 사이트로 연결되는 밑줄 쳐진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아마도 현실 세계에 발 딛고 있는 독자를 이번 주제 (이번에는 ‘벽’)로 넘어가도록 안내하는 글 정도로 보입니다. 카프카의 작품들과 ‘해리포터 시리즈’, ‘나니아 연대기’에서 만나는 벽들을 이야기하며 그 의미를 두드려보며 다음 소설로 독자를 이끄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나에겐, 우리에게 벽은 무얼까요? 뒤엉켜버린 실타래 마냥 천만가지 생각이 또아리를 틀기에 머리를 흔들어 날려버렸습니다.

그렇게, 이름 꽤나 들어본 SF 이야기꾼들, 듀나, 아밀, 이산화, 이유리, 정보라,의 단편들이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기고 빠르게 혹은 뒤척이며 흘러갑니다.

“석 달 동안 1,5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적사병으로 죽은 건 오히려 축복이었다. 먹여야 할 입이 줄어들었고 평균연령이 낮아졌다.”
<p.21. 아레나 (듀나) 중>

불안한 현재 혹은 미래는 각자에게 혹은 공동체에게, 디스토피아로 혹은 유토피아로 다가오며, 또 어떻게든 거기에 맞춰 인생은 살아집니다. 초고령화 사회의 어두운 전망을 오히려 축복으로 만들어버린 적사병이 그러합니다. 어쩌면 코로나 19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적사병 창궐로 쿼런틴되어 벽으로 폐쇄된 2033년의 한반도와, K-팝 아이돌 그룹을 떠올리게 하는 청소년 히어로들을 모아 훈련시키는 기업 K-포스를 둘러싼 이야기를 담은 <아레나>. 손이 작아 좌절에 빠진 손이 작은 피아니스가 차원의 마녀를 만나 4차원으로 업그레이드되는 벽을 뛰어넘는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 토끼 떼와 토끼 사냥꾼, 그리고 종교, 이성, 자연선택설, 진화로 둘러싼 벽 안쪽의 <깡총>. 지구 상에서 오로지 네트워크가 유효한 안전한 벽, 방패의 완벽한 통제로 둘러싸인 서울의 <월담하려다 접천>. 그들 사이에 놓인 벽돌이 자라서 벽이 되는 경험을 부부가 관계를 되돌아보는 사건을 담은 <무너뜨리기>. 어쩌면 아주 오래 전 인류의 태동기의 벽에 역사를 기록하는 <무르무란>까지.

“보세요! 아무리 어린 토끼라도 간단히 넘을 수 있는 벽을, 당신은 넘지 못하고 다만 이 앞에서 무릎을 꿇어버렸을 뿐이죠. 우리 교단이 이 장엄한 벽을 지은 이유를 이제 알겠나요? 당신처럼 무지한 자들이 감히 신성한 땅으로 도망치지 못하게끔 하기 위함입니다.”
<p.93. 깡총 (이산화) 중>
우리를 외부와 차단함으로 보호하기도, 우리 사이에 놓여 갈라놓기도, 진행을 가로막아 좌절과 도전을 허락하기도 하는 ‘벽’은, 또 그렇게 쌓아지고 무너지며, 뛰어넘고 멈춰서서, 우리의 존재를, 우리의 관계를, 우리의 의미를 확인하게 합니다.

“소설은 우리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동시에 전체로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상기시킨다. 벽을 두고도 격리와 적대, 혼란과 자아 상실, 어느 쪽으로도 빠지지 않는 길이다.”
<p.188. 벽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세 가지 일 (심완선) 중>

#SF보다 #SF보다_벽 #SF보다_서평단 #문학과지성사 #도서제공 #서평단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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칵테일과 레코드 - 70장의 명반과 140가지 칵테일로 즐기는 궁극의 리스닝 파티 가이드
안드레 달링턴.테나야 달링턴 지음, 권루시안 옮김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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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부부일거라 짐작했던 저자들은, 사실 남매지간이었고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토렌스 턴테이블로 엘피를 들으며 자라났다고 합니다. 어쩌면 그 성장배경이 이 책의 시작이 되었음에 분명합니다. 나의 어린 시절, 턴테이블 위에서 회전하는 엘피의 홈을 따라 춤추던 바늘이 전달하던 동서고금의 음악들이 가득하던 거실의 공간을 추억하게 했습니다. 알아들을 수도 없는 외국어들과, 때론 느려터진 더블베이스의 노곤함으로, 때로는 소음과도 같던 일렉기타의 과잉으로 뇌리에 남아있습니다.

“음악은 침묵의 잔을 채우는 와인이다.” - 로버트 프립 ROBERT FRIPP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새로운 시대를 연 앨범 70장을 록, 댄스, 칠, 유혹의 4개의 챕터로 나눠 소개합니다. 그리고, 엘피의 A면과 B면에 칵테일을 각 한잔씩 배치해서 앨범 하나에 두 잔의 칵테일을 즐길 수 있도록 배치했습니다. 음반 소개와 함께 배치된 칵테일의 정확한 레시피는 맛있게 음반을 마시게 하는 마술주문에 다름아닙니다. 인용된 로버트 프립의 말처럼, 음악이 채우는 와인을 들이키게 하는 책입니다.

“발매일 : 1975년 / 아티스트 : QEEN / 앨범 : Night at the Opera
이 앨범은 각종 차트의 1위를 휩쓸었고, <Bohemian Rhapsody>는 고금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노래 중 하나로서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
SIDE A : 코로네이션 칵테일 / SIDE B : 보헤미안 칵테일”
<p.27>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로 또 한번 그룹 QEEN의 음악을 전 세계적으로 울려퍼지게 했던 몇 해 전을 기억하며, 읽어내리는 두가지 칵테일의 레시피를 들여다보며 그 향과 맛을 상상합니다. 이렇듯 음반을 찾아 칵테일을 즐겨도 좋고, 칵테일을 찾아 해당 음반을 즐겨도 좋을 듯합니다. <Bohemian Rhapsody>를 들으며 ‘보헤미안 칵테일’을 즐긴다니 상상만으로도 발을 까딱이며 홀짝거리는 공감각적 환상에 흐뭇해집니다. 이는 책 구석구석에 포진하고 있는 멋들어진 턴테이블과 엘피 사진들과 맛깔난 칵테일 사진들이 크게 조력합니다.
뿐만 아니라, 중간 중간에 ‘술이 있는 리스닝 파티를 여는 법’(p.11), ‘위스키 시음회를 여는 법’ (p.52-53), ‘간식거리! 오두막 주말 스프’ (p.181) 등의 팝업코너를 배치해서 각종 팁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70개의 앨범과 140개의 칵테일 소개가 마치면, 마지막으로 CHAPTER 5. BAR CODE을 만나게 됩니다. 남매 저자는 여기서도 본인들의 지식을 깔끔하게 담아서 칵테일 서버를 위한 상세한 팁을 제공하는 것으로 마무리합니다.

“엘피가 진짜다. 나는 늘 엘피 음반을 사지 않고는 그 앨범을 제대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었다. - 잭 화이트 ”

음악을 감상하는 것과 소유하는 것의 정체는 무엇인지, 현재의 리스너에게 그 질문은 사실 무의미하다 싶습니다. 다만, 저장된 데이터이든 서버에서 다운로드한 스트리밍 데이터이든 엘피나 씨디를 돌려서 듣는 음악이든, 과거의 일정 시점들과 일정 공간들에서 녹음된 음악이 현재 시점에 플레이되는 것은 어쩌면 시간 여행에 다름 아니며, 이 여행의 수단은 다양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그 시간여행에 동행하는 리스너의 손에 들려진 잔 속에서 음악과 공명하는 칵테일은 현재의 실존이며, 그 과거와 현재의 실존이 함께 향유되는 것의 즐거움은 체험하지 않고는 어쩌면 허상이고 거짓일 수 밖에 없다 싶습니다. 고로, 이 책의 마침표는 책 밖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한계점은 어쩌면 이 책의 운명이기도 합니다. 다만, 다시 찾아온 겨울이라는 집콕의 계절을 맞이하며, 아쉬운 대로 스포티파이나 애플뮤직에서 해당 음반을 스트리밍해서라도 듣고, 취향에 맞는 나름의 리큐어를 곁들여, 혼자 따로 또 같이 무드를 즐겨봄직 하며, <칵테일과 레코드>는 제법 괜찮은 시간여행 가이드가 될 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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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과 나 - 배명훈 연작소설집
배명훈 지음 / 래빗홀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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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지않아 그곳은 화성으로 통하는 관문이 될 예정이었다. 지구의 우주정거장에서 출발한 우주선이 종착지로 삼는 곳. 행성 표면과 궤도 사이를 오가는 수단은 작고 가벼운 로켓일수록 좋다. 반면 행성 간 비행은 좀 큰 우주선으로 하는 게 편리하다. 이렇게 구간을 나누어야 연료 낭비가 적어진다.”
<p.15. 붉은 행성의 방식 중>

외교부의 연구의뢰로 수행했던 배명훈 작가는 <화성의 행성정치: 인류 정착 시기 화성 거버넌스 시스템의 형성에 관한 장기 우주 전략 연구>를 통해 연작소설집 <화성과 나>의 실마리를 마주하였고, 이렇게 책의 옷을 입고 우리 앞에 도착했습니다. 외교학 전공자다운 면모는 이야기 곳곳에 명징하게 등장하면서, 독자를 자연스럽게 화성의 생활 속으로 순간이동 시켜버립니다. 시스템과 환경, 그 속에서의 삶을 현재진행형이라고 해도 무방할만하게 생생하게 묘사하니 속수무책으로 독자는 화성인이 되고야 맙니다. SF인줄 알았는데 르포르타주로 착각하고 읽혀지는 묘한 매력은, 작가의 전작인 <타워>, <빙글빙글 우주군> 등에서 느낀 부분의 연장선상에 존재합니다.


“그때 김조안이 눈을 떴다. 옆에 앉은 사람이 나라는 걸 실눈으로 확인하자마자 김조안이 몸을 날려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p.82. 김조안과 함께하려면 중>

그렇게 르포르타주로 읽어내다가, 어느 순간 뒷덜미를 훅 치고 들어오는 말랑말랑한 감수성. 이 순진무구한 SF 이야기 속의 로맨스라니! 화성에서 사람이 살면, 당연히 그곳에서도 사랑이 살아남고야 말거라는 뻔한 자연스러움이 이다지도 심쿵하게 해주는 능력에 다시금 배명훈 작가의 장기를 확인합니다. 다만, 그 간극을 오가는 덜컹거림이 살짝 아쉽지만, 이 정도로 펼쳐내는 문장의 간명함이 작가의 힘을 배가 시킨다 싶습니다.


“조외진은 군부가 장악한 지구 근처의 우주가 걱정스러웠다. 지상은 안 그런데 천상은 꽤 수월하게 군사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쿠데타고 뭐고 필요 없이 무기를 우주로 쏘아 보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사람들의 무관심 때문이었다.”
<p.147. 행성봉쇄령 중>

화성이라는 전혀 새로운 시공간에서의 삶은, 그야말로 전혀 새로운 삶 일진데, 하지만 여전히 정치가 있고 무관심이 있습니다. 지배가 있고 피지배가 있습니다. 그렇게 더할 나위 없는 화성의 삶을 투명하게 그려내는 작가의 문장들이 종횡무진하며, 그 이야기를 뒤좇다보면 어느 새 그 화성이 이렇게도 우리 바로 곁에 다가와 있는 도래할 현재로 여겨지게 합니다. ‘화성 거버넌스 시스템’을 고민한 작가의 취재와 상상력이 열매 맺는 순간입니다. 독자는 그저 손내밀어 페이지를 열어 열매를 따먹기만 하면 됩니다.


“SF에서 미래는 작가가 속한 시대와 완전히 분리된 시간이 아니다. 이 시대 SF 작가에게 자주 요구되는 자질은, ‘지금 이 순간’과 ‘미래의 어느 날’을 한꺼번에 담아낼 수 있는 큼직한 시간 개념을 고안해내는 재주다.”
<p.303. 작가의 말 중>
외교부의 연구의뢰로 고민한 질문들이 리스트업하고 그 질문들에 답을 꾸려가면서 씨줄이 지나가고, 작가의 상상력이 만든 사건과 사람들이 날줄로 지나가면서 <화성과 나> 속의 여섯 개의 이야기로 탄생했습니다. 어쩌면 우리 생에 만나게 될 그때의 ‘Life in Mars’에 도달했을 때, 이야기가 얼마나 겹쳐질지 챙겨보고 픈 마음이 굴뚝 같습니다.

#화성과나 #배명훈연작소설집 #레빗홀 #레빗홀클럽2기 #도서제공 #서평단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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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작품
윤고은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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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란 족속은 자기에게 주어진 재능을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아 세속에서는 불구가 되었다. 대신에 그들은 비속한 세상의 성공을 포기한 대가로 더 큰 세계를 얻었다. 그런 그들을 예술가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들이 구차한 생활에 매몰될까 봐 재능에만 헌신할 환경을 제공해주는 사람을 후원자라고 부른다.”
<박종호 | 풍월당 대표>

“내가 로버트 재단의 전화를 받았던 시점은 올해 초였다. 그때 나는 1903호에 쉐이크쉑 버거를 배달하던 중이었다. 배달 일을 하면서 별의별 사람을 다 접했지만 그날 오후만큼 당혹스러운 적은 없었다. 그 무렵 나는 음식 배달 앱 ‘빨리’의 라이더로 한달 정도 일한 상태였다.”
<p.36>

생활고. 목구멍이 포도청.
자신의 본업을 지탱하기 위해, 지속가능한 본업을 위해 부업에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하는 이들을 알고 있습니다. 택배 일을 하는 소설가, 아파트 경비 일을 하는 설치미술가, 건설현장 노가다를 하는 목사, 사우나에서 세신사를 하는 가수. 너무 좋아해서 본업이 숭고한 신앙이 되어버린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안이지의 배달앱 라이더로 자신의 본업을 지탱하는 한 사람이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줄리아 데 메디치에, 라이너 마리아 릴케에게 탁시스 후작부인, 미켈란젤로에게 로마 교황청. 그런 예술가를 순수한 이유든 복잡한 이익계산이든, 너무도 간절한 대상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때로는 타협이 요구되고 스스로의 예술혼을 외면하고서라도 말입니다.


“그날의 폭염은 행인과 자동차, 키 작은 나무와 살아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몇 달러씩을 갈취하는 듯 포악한 것이었다. 그 한가운데 로버트 재단이 있었다. 느린 하품을 하는 모양새로 우두커니.”
<p.106>

‘윤고은’이라는 월드.
윤고은의 소설은 뭔가 동떨어진 현실감, 이라는 느낌을 때때로 마주하는 문장들에서 확인합니다. 인물이나 배경, 상황을 묘사하는 문장들을 보노라면, 군더더기 없음의 모범적 사례를 떠올립니다. 김소진의 소설들에서 느꼈던 유사 감정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윤고은의 소설을 읽다보면, 영미권 소설을 한글로 번역한 것 아닌가 싶은 황당한 생각마저 듭니다. 특히나, 이번 소설의 배경과 인물들이 미국과 미국인들이 다수 등장해서 인지, 제법 영어소설 원작이 있는 번역소설인가 싶은 착각을 몇 번인가 했습니다. 이러함이, 작가의 이야기 속으로 흠뻑 빠져들지 못하게 하는 이유이면서, 현실과 이야기 속 허구의 간극을 떠올리면서 오히려 중첩시키는 효과가 있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더 핍진성을 획득하는 기재가 된다고나 할까요? 로버트가 ‘개’라는 허무맹랑함이, 어느 순간 대수롭지 않은 주변의 일인 듯 이야기 속으로 포개져버립니다.

소설은, 이야기의 설정과 사건들은 제법 사회면이나 문화면 여기저기에서 만난 몇 건의 기사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술작품과 연해있는 퍼포먼스나 해프닝마저 예술작품에 수렴해버리는 경우, 생활고에 힘겨워하는 젊은 예술가들과 이를 후원하는 재벌기업의 이야기 등등. 거기에 설정의 마법 가루와 인물들 간의 케미스트리로 이야기에 탄력과 점성을 요령있게 부여하는 작가의 특기가 역시 깊게 드러나는 작품이었습니다.


“우리가 읽던 책의 모서리를 삼각형으로 살짝 접을 때, 밑줄을 긋거나, 메모를 하거나, 굳이 흔적을 남기지 않더라도 책 속의 말이 그걸 바라보는 이를 흔들 때, 책은 비로소 원본이 된다. 하나뿐인 진짜가 된다.”
<p.344. 작가의 말 중>

앤디 워홀이 공장에서 찍어내는 작품들이 예술이 되고, 미디어로 무한반복 재생되는 백남준의 그것들이 가지는 오리지날리티. 어쩌면 작가의 말에 언급된 ‘하나 뿐인 진짜’가, 희소성이라는 것이 ‘영 (zero)’에 수렴해버리는 작금의 SNS와 유튜브의 시대에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를 생각해봅니다. 더불어, 노트북 모니터와 저장장치에 담겨지는 활자들이라는 원본이, 편집자와 독자를 거쳐 하나뿐인 진짜가 되어 과정 속에 동참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질 수 있음에 뿌듯함 마저 들었습니다.

#윤고은장편소설 #은행나무 #불타는작품
#그믐북클럽 #도서지원 #서평단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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