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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작품
윤고은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10월
평점 :
“예술가란 족속은 자기에게 주어진 재능을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아 세속에서는 불구가 되었다. 대신에 그들은 비속한 세상의 성공을 포기한 대가로 더 큰 세계를 얻었다. 그런 그들을 예술가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들이 구차한 생활에 매몰될까 봐 재능에만 헌신할 환경을 제공해주는 사람을 후원자라고 부른다.”
<박종호 | 풍월당 대표>
“내가 로버트 재단의 전화를 받았던 시점은 올해 초였다. 그때 나는 1903호에 쉐이크쉑 버거를 배달하던 중이었다. 배달 일을 하면서 별의별 사람을 다 접했지만 그날 오후만큼 당혹스러운 적은 없었다. 그 무렵 나는 음식 배달 앱 ‘빨리’의 라이더로 한달 정도 일한 상태였다.”
<p.36>
생활고. 목구멍이 포도청.
자신의 본업을 지탱하기 위해, 지속가능한 본업을 위해 부업에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하는 이들을 알고 있습니다. 택배 일을 하는 소설가, 아파트 경비 일을 하는 설치미술가, 건설현장 노가다를 하는 목사, 사우나에서 세신사를 하는 가수. 너무 좋아해서 본업이 숭고한 신앙이 되어버린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안이지의 배달앱 라이더로 자신의 본업을 지탱하는 한 사람이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줄리아 데 메디치에, 라이너 마리아 릴케에게 탁시스 후작부인, 미켈란젤로에게 로마 교황청. 그런 예술가를 순수한 이유든 복잡한 이익계산이든, 너무도 간절한 대상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때로는 타협이 요구되고 스스로의 예술혼을 외면하고서라도 말입니다.
“그날의 폭염은 행인과 자동차, 키 작은 나무와 살아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몇 달러씩을 갈취하는 듯 포악한 것이었다. 그 한가운데 로버트 재단이 있었다. 느린 하품을 하는 모양새로 우두커니.”
<p.106>
‘윤고은’이라는 월드.
윤고은의 소설은 뭔가 동떨어진 현실감, 이라는 느낌을 때때로 마주하는 문장들에서 확인합니다. 인물이나 배경, 상황을 묘사하는 문장들을 보노라면, 군더더기 없음의 모범적 사례를 떠올립니다. 김소진의 소설들에서 느꼈던 유사 감정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윤고은의 소설을 읽다보면, 영미권 소설을 한글로 번역한 것 아닌가 싶은 황당한 생각마저 듭니다. 특히나, 이번 소설의 배경과 인물들이 미국과 미국인들이 다수 등장해서 인지, 제법 영어소설 원작이 있는 번역소설인가 싶은 착각을 몇 번인가 했습니다. 이러함이, 작가의 이야기 속으로 흠뻑 빠져들지 못하게 하는 이유이면서, 현실과 이야기 속 허구의 간극을 떠올리면서 오히려 중첩시키는 효과가 있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더 핍진성을 획득하는 기재가 된다고나 할까요? 로버트가 ‘개’라는 허무맹랑함이, 어느 순간 대수롭지 않은 주변의 일인 듯 이야기 속으로 포개져버립니다.
소설은, 이야기의 설정과 사건들은 제법 사회면이나 문화면 여기저기에서 만난 몇 건의 기사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술작품과 연해있는 퍼포먼스나 해프닝마저 예술작품에 수렴해버리는 경우, 생활고에 힘겨워하는 젊은 예술가들과 이를 후원하는 재벌기업의 이야기 등등. 거기에 설정의 마법 가루와 인물들 간의 케미스트리로 이야기에 탄력과 점성을 요령있게 부여하는 작가의 특기가 역시 깊게 드러나는 작품이었습니다.
“우리가 읽던 책의 모서리를 삼각형으로 살짝 접을 때, 밑줄을 긋거나, 메모를 하거나, 굳이 흔적을 남기지 않더라도 책 속의 말이 그걸 바라보는 이를 흔들 때, 책은 비로소 원본이 된다. 하나뿐인 진짜가 된다.”
<p.344. 작가의 말 중>
앤디 워홀이 공장에서 찍어내는 작품들이 예술이 되고, 미디어로 무한반복 재생되는 백남준의 그것들이 가지는 오리지날리티. 어쩌면 작가의 말에 언급된 ‘하나 뿐인 진짜’가, 희소성이라는 것이 ‘영 (zero)’에 수렴해버리는 작금의 SNS와 유튜브의 시대에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를 생각해봅니다. 더불어, 노트북 모니터와 저장장치에 담겨지는 활자들이라는 원본이, 편집자와 독자를 거쳐 하나뿐인 진짜가 되어 과정 속에 동참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질 수 있음에 뿌듯함 마저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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