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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얼굴
이충걸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4월
평점 :
“그때 노란색 트레일러가 반대편 도로에서 이쪽 차선으로 방향을 틀며 돌진했다. 나는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는 동시에 브레이크를 밟았다. 마찰 계수를 잃은 뒷바퀴가 중앙 가드레일에 살짝 부딪치더니 핸들이 완전히 90도로 꺾였다. 변속 레버를 잡아당기자 차체가 다시 절반 돌면서 반대편 차선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그 광경을 침묵 속에서 보고 있었다. 정면으로 마주친 트레일러가 급커브를 틀었다. 뒷부분이 내 차로 기울며 측면을 때리고, 그 반발로 뒤따라오는 SUV에 부딪친 뒤 다시 튕겨나오는 과정에는 작은 화면에 몰린 픽셀처럼 놀라운 명료함이 있었다.”
<p.10>
예전에 즐겨 읽던 월간 <GQ>의 편집장 시절의 에디토리얼을 제외하고는 처음 접하는 작가 이충걸이 만든 세상에 첫발을 내딛자마자 마주하는 것은 자동차사고. 그 사고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균열과 상실입니다.
자동차 사고와 같은 순식간에 생사의 경계를 체험하는 사건을 실감나게 그리는 문장들에 예전 그의 에디토리얼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의 ‘실감’은 물질적인 생생하다의 느낌보다는 사고 피해자가 느끼는 ‘주마등’, 즉 정신적이고 심리적 서술을 담은 그 문장과 단어들입니다.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진 않았던 개인적인 체험에 비추어볼 때, 그 몇 초간 벌어지는 사건의 현장에 육신은 속절없이 나뒹굴고 있지만 그 머릿속의 이미지를 포함하는 다량의 정보들과 감각기관들은 과거와 미래, 그리고 무한한 시공에 순간 노출되는 듯했던 기억입니다. 사고현장과 구급차 그리고 응급실에서 수술실로 이동하는 그 과정들에 무기력하게 움직여지는 나의 육신을 내려다보는 듯 한없이 객관화된 채로 이루어지는 그 영겁 같다가도 순식간에 치러져버리는 기억과 편린이 초반부에 펼쳐지는데 읽는 동안 몸의 여기저기가 아리고 서늘해지는 듯 했습니다. 그리고 통증을 잊게 만드는 약성분이 온몸의 체액을 따라 돌면, 자꾸만 깊고 깊은 잔잔한 깊이를 알 수 없는 강바닥을 향해 빠져드는 긴 잠에 사로잡히고 길고 긴 꿈과 같은 과거와 재회하게 되었던 기억들을 소설은 문자로 다시금 재연해냅니다.
자신의 이야기, 아이와 그 친구 이야기, 계절이야기, 사소한 풍경 이야기... 미술과 영화, 음악과 패션에 관한 대화와 묘사들이 예전 잡지 <GQ>의 페이지 여기저기를 들춰보듯 늘어뜨려 놓으며 이야기가 흩어지는 듯 하다가도 하나의 사건으로 하나의 시간으로 하나의 관계로 모아내고, 다시 멈추어선 채로 골똘히 생각에 잠겨들다가 그렇게 또 이야기를 흩어내며 나아가는 묘한 구석 가득한 이야기를 만났습니다.
“6월이 되자 구강 주위에 살이 달라붙었다. 눈을 번갈아 찡그리고 혀를 엉킨 근육 사이로 넣어 침을 바르려고 했지만 톱밥 만지는 느낌밖에 없었다. 간호사들은 수시로 피를 뽑았다.”
<p.73>
이 소설의 특이점은 시선이 오간다는 것입니다. 엄마의 시선이었다가 아이의 시선이었다가, 그래서 엉뚱하게 이야기를 짓다가 다시 해체해서 그 시선으로 조정하느라 초반 한동안은 조금 애를 먹긴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러함의 이유가 이야기를 더 풍성하고 깊숙하게 독자를 이끄는 기술(!)이다 싶게 여겨졌습니다.
요즘 제 책상 한쪽에 뉘어져 있는 책이 한권 있는데, 루마니아 출신 포토그래퍼인 미하엘라 노로크의 사진집 <아틀라스 오브 뷰티>라는, 50여 개국 500명의 여성들의 얼굴을 담고 있는 사진집입니다. 다양한 국가, 다양한 인종, 다양한 표정들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사진들인데 들여다보고 있으면 편안해지기도 하고 어떤 생각으로 저 표정들을 짓고 있을까 호기심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때마침 이 소설과 사진집을 오가며 읽고 있자니 묘한 마음이 더 해지는 독서 경험이었습니다.
“삐뚤빼뚤해진 인생이 보자기로 꿰매지자, 자동차 사고는 덮개에 덮여 잘 떠오르지 않았다. 천국의 갈망은 잦아들고, 집으로 가고 싶은 희망도 스러졌다...
내가 행방불명되었던 기간 동안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 누구도 나의 부재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어떤 의미로 나의 고립 상태는 일종의 참호가 되어주었다. 대인 관계가 얄팍하다는 것이 지금처럼 위로가 된 적도 없었다. 세상이 계속 돌아가는 동안 나 혼자 고통받지는 않았다...“
<p.338>
그래서 이후의 이야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책의 마지막에 도달하니 그 궁금증이 먼저 들어왔습니다. 허나 이내 그렇게 살아왔으니 또 그렇게 살아가리라 여기는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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