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건축의 이유 - 집 현관에서 대도시까지, 한 권으로 떠나는 교양 건축 여행
전보림 지음 / 블랙피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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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실무를 위해 런던에 살았던 5년의 시간 동안 나는 그저 수단이고 배경인 줄 알았던 건축과 도시가 내 삶의 방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p.6>

 

저자는 그렇게 영국 런던의 삶을 반추하고 돌아보며 기록을 누적했고 그 공간, 삶의 공간과 그 공간에 연이어있는 건축이라는 대상이 어떠했는지, 그러함이 어떻게 익숙한 생활공간과 대화하는지를 단단한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일상의 언어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건축 서적이지만 삶을 나누는 에세이이기도 합니다. 누구든 자신이 관심 있는 색깔의 안경으로 자신의 세계를 우리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게 저자에게는 건축이었습니다.

 

지난 저의 시간을 돌아보면 아파트 형태의 성냥 곽 같은 공동주택에서의 시간이 거의 30년이 된 듯 합니다. 그렇다고 이전의 주거형태가 공동주택이 아니었던가 생각해보면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낮은 담들로 나름 시야와 대화를 공유했고, 공동 진입로이자 연장된 앞마당 개념의 골목을 공유했으며, 통반장 혹은 마당발 홍반장들의 언론조성으로 공지사항은 어김없이 전파되는 공동주택에 다름 아닌 단독주택 혹은 그 세입자로서의 시간을 보냈으니 말입니다.

 

또 어떤 시기에는 커다란 마당 같은 공터를 중심으로 공유하며 둥글게 대문들을 공터로 향하게 하는 구조의 작은 단위의 마을 같은 공동주택에서 살았던 기억도 있습니다. 우물이라는 것도 있었고, 빨래터라는 것도 있었고, 커다란 버드나무 아래 널따란 평상에서 밤이 맞도록 두런두런 말도 안되는 상상을 이야기하던 기억도 있었습니다. 모두가 아버지 어머니였고 모두가 형제 자매였던 그 시간들. 사실 그때는 만들어진 건축적 상황에 삶을 맞추어 살았고 살면서 관계의 연결을 통해 건축물의 확장 혹은 수정이 동반되는, 어쩌면 살아있는 유기체로서의 건축 공간에서의 시간이었다 싶기도 합니다.

 

도시는 설계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경영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도시에 관한 법 또한 그러한 관점에서 만들어야 한다.”

<p.300>

 

지방 소도시 출신인 저는 그 고향의 변화 없음과 느려터진 일상의 시절이 지금에서야 그립기도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닥 좋아하지 못했습니다. 문화재 개발제한을 위한 건축물에 대한 고도제한이 존재하는 나지막한 시내와 대부분의 초록의 산들과 오래된 왕들의 무덤이 섬처럼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그 곳.

나이가 차고 서울로 떠나오면서 본격적인 시티라이프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지하철 환승역에서 펼쳐지는 육상경기를 방불케 하는 러너들, 깎아지른 듯 도로 양옆에 즐비한 고층빌딩들, 굉음을 발산하며 내달리는 외국산 자동차들과 실갱이를 벌이는 도로 운전자들의 고성이 쩌렁쩌렁 울려퍼지는 도시의 심포니까지. 그렇게 3-4평 정도의 학고방 같던 여인숙 건물을 개조한 신촌 월셋방의 기억과 이제야 재건축을 시작한다는 70년대 지어진 14평의 신혼 아파트의 추억까지. 도시는 무지랭이 촌놈에게 생명력 넘치는 만화경을 펼쳐보여 주었습니다.

그 혼잡함 속의 질서가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건축 설계와 그 경영에 기인한 것이었다 싶습니다. 저자는 그렇게 영국 런던에서의 시간을 닫고 대한민국 서울에서의 시간을 열면서, 이러저러한 모양들과 쓰임에 대한 생각들을 여기저기 발로 디딘 공간적 체험으로 나눠줍니다. 대부분 저의 발이 닿기도 하였거나 차창 너머로 만났던 공간들에 대한 이야기라 퍽이나 와 닿았습니다. 특히 삼각지역 대탐험!

 

이 도시는 우리 모두를 위한 도시이고, 우리는 다정한 도시를 누릴 권리가 있어서다.”

<p.377>

 

나와 우리의 삶의 공간에 대한 애착이 나와 우리의 삶의 질을 더욱 개선하는 시작이리라. 도로를 달리는 차들도, 인도와 골목길을 걷는 도보여행자들도, 이래저래 구축된 자전거 길의 라이더들도 모두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도시가 좀더 다정해져야 하겠다 싶습니다. 그게 우리 권리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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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무사리 숲의 느긋한 나날
미우라 시온 지음, 임희선 옮김 / 청미래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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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소도시 출신인 저는 어쩔 수 없이 살아야했던 학창시절의 고향의 그 변화 없음과 답답함을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나마 전국 각지의 중고교생들의 수학여행지라 등하굣길에 마주치는 다른 말투의 또래들이 오히려 반갑고 신선했었던 기억입니다. 그렇게 떠나온 고향은 방학이나 휴가를 맞아 다녀올 때도 그저그랬던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새 중고등학교의 수학여행지도 더 이상 아닌 곳, 더 삭막해져버린 몇 천 년 전의 역사의 현장으로 오히려 시간을 되돌리는 변화가 그 마음을 더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꽃향기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후각뿐만 아니라 청각도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였다. 숲속은 좀더 조용하리라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항상 어디선가 나뭇잎이 떨어지고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뭇가지는 바람에 술렁이고 조금 있으면 해가 진다면서 산새들이 쉴 새 없이 서로에게 지저귀는 소리가 났다. 사슴인지 뭔지가 나무껍질을 씹어먹는 소리까지 들렸다. 저 멀리 어느 골짜기에서 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p.95>

 

그런데 어느 순간인가 그 고향의 빛깔과 향내가 다르게 느껴지던 날이 있었습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데 너른 초록의 왕릉으로 이어지는 공간이, 바람에 흐드러지던 달빛 먹은 벚꽃 이파리들이 저에게 다르게 다가오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낯설고 어색해졌지만 그 구석구석에 남아있는 추억들과 얼굴들이 어느새 지금까지와는 다른 마음이 들게 만들었습니다. 도시에만 살던 유키가 가무사리 숲의 향기와 소리를 인식한 그 순간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그 공간에 있다고 해서 그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그 공간에, 그 순간의 색과 향과 소리를 아우르는 감각이 그 공간의 내 안을 관통해 나가고 나서야 비로소 그 공간에 있게 되는 느낌. 그렇게 그 곳에 속해 있다는 마음이 드는 순간이 있다 싶습니다.

 

미우라 시온의 소설 <가무사리 숲의 느긋한 나날>이 나가사와 미사미, 소메타니 쇼타 두 배우가 주연해서 찾아봤던 영화 <우드잡>의 원작소설이란 걸 이번에 읽으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영화와는 인물과 설정에서 다소 판이하게 다르긴 하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다시 찾아본 영화의 장면, 특히 숲의 풍광과 소리, 냄새를 설레이게 문장으로 담아낸 작가의 묘사의 힘이 영화의 장면을 훨씬 뛰어넘는 상상력으로 독자를 이끄는 이 소설의 힘이다 싶었습니다. 물론 다시 만난 미사미와 쇼타 배우의 연기는 반갑고 즐거웠지만요.

 

끝내주네.....”

<p.122>

 

가무사리 벚나무에 둘러앉아 도시락을 나누며 유키가 자연스레 내뱉는 마음의 소리, 이것이 이 이야기의 숲과 일상과 그 속에 스며진 사람들의 면면을 만나는 독자로서의 제가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개운하게 기지개를 켜며 내뱉은 말이었습니다.

 

영화에서도 클라이맥스 장면이었던 천년 삼나무를 베어 목숨을 걸고 비탈을 미끄러져 마을에 까지 내리는 목숨을 건 의식인 마츠리 장면을 소설에서도 말미를 장식하며 모여든 마을의 남자들과 유키, 그리고 이를 기다리는 마을 사람들과 그 공간에서의 생각, 관계들을 아우르는 축제로 마무리해냅니다. 그렇게 유키가 가무사리에서 보낸 1년의 시간도 마무리되어 갑니다.

 

나무와 산을 알아가고 사람과 관계를 배워가던 도시 청년 유키는 그렇게 1년의 시간을 보낸 가무사리 마을과 그 숲을 먼 훗날 어떻게 마음에 담고 살게 될까 생각해봤습니다. 제가 고향을 기억하고 다시 생각하게 되는 마음 같을까? 언젠가 유키는 다시 요코하마로 돌아갔을까? 유키는 어떻게 살게 될까? 그 숲의 정령과 소리와 빛깔과 향기는, 마츠리에서 온몸으로 느꼈던 그 미친 듯한 속도감은 어떻게 그와 그의 삶과 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남겨져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가무사리숲의느긋한나날 #미우라시온 #임희선옮김 #청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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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법 - 생존을 위한 두 가지 요건에 관한 이야기
장혜영 지음 / 궁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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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출신 대통령의 출현이후, 대한민국은 검사와 그들의 권력에 대해 이야기로 여전히 시끄러운 상황입니다. 그리고 여기 177개월 간의 검사생활을 통해 남의 일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이 자신의 일이 되었던 경험담을 바탕으로 일곱 개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 있습니다. 객관적이고 거리를 두고 대했을 듯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쓰이고 생각이 미치는 그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다 결국 사랑에 대해, 법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는 말합니다.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는데 멀게만 느꼈던 법이 이렇게나 가까이 그리고 명확하게 숨 쉬고 있는 존재인가를 거듭되는 이야기들을 마주하다 보면 수긍하고 공감하게만 됩니다.

 

나와 우리를 향한, 관계 속의 사랑 없음에 연결된 변사사건 이야기, 관계 사이에 존재하되 그 능력의 오용이 불러온 책임의 문제, 잘못된 판단에 이른 사랑이 저지르고야 마는 사기사건 이야기, 사랑에 대한 오해 혹은 그 방법의 오류가 도달한 대 사건, 사랑에 우열을 가르고 순위를 정하느라 꼬여버린 합의의 문제, 효율 우선주의가 적용된 사랑 이야기가 낳은 중독의 이야기 그리고 언제까지 어떻게 까지 사랑해야하는지에 대한 시효의 문제를 따라 작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때로는 안쓰럽게 가슴을 쓰러내리다가도 불끈 주먹을 쥐고 책상을 내려치고 싶어지기도 하는가 하면 또 하염없이 하늘만 한동안 쳐다보게 되는 이야기, 우리네 이야기들 속의 나와 우리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어느새 달도 남쪽으로 가

나는 멈추지 못하고

닿지 못한다.”

- p.182, 장혜영 <강변북로>

 

매번의 이야기 앞에 작가는 의도적으로 시 혹은 시인의 문장을 놓아둡니다. 그리고 자작시로 그 번잡하던 생각을 시어에 띄워 보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곱 개의 이야기는 딱딱한 법의 이야기에 사랑을 버무린 시가 되는 순간들을 책을 읽어내는 중간중간 마주합니다. 어쩌면 오랜 시간 하나의 범위 속에서 마음을 쏟고 생각을 내딛다보면 시인이나 화가가 되는 순간이 오는가 봅니다. 유형의 작품을 빚어내서가 아니라 그런 경지나 태도에 이르러서 그렇다 싶습니다. 그래서 말미에 작가는 부연해서 말합니다.

법은 사랑이 지속가능하도록 뒷받침한다.”라고.

그렇게 지금도 혼란스런 분위기 속에서도 자신만의 길을 그 속도와 방향으로 뚜벅뚜벅 나아가는 검사들과 다른 직업인들의 발걸음이 시가 되고 노래가 되고 사랑으로 열매 맺기를 바라봅니다.

 

#사랑과법 #장혜영 #궁리

#도서제공 #서평단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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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여름에게 에세이&
최지은 지음 / 창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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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을 한다는 이야기죠. 지금 떠오르는 사람들에게, 흰밥처럼 새하얗고 깨끗한 마음을 주고 싶다는 이야기입니다. 자랑 같지만, 너무나 크고 깊은 사랑을 받았기에 어떻게든 이 사랑을 나눠주고 싶다는 말이에요. 자랑 같지만, 사랑을 하고 있다는 말이고요.”

  <p.20>

 

손녀에게 맛있는 오이지를 만드느라 물방울처럼 화상을 입은 할머니에 대한 기억과 오이지와 그 사랑과 그 마음과 그 자랑을 쏟아내는 작가는, 그렇게 사랑을 계절을 이야기하고 또 그 빚진 사랑의 마음을 나눠주고픈 그 자신만의 방향과 속도로 독자들을 향하고만 있습니다. 그렇게 조금 더 나아가고 있습니다.

 

마음을 글로, 시로, 이야기로 지어내는 일을 하는 작가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누구에게 무엇을 어떤 마음으로 얻은 마음이, 그 생각이 그저 그 안에 갇혀있지만 못해서 나눠주고 쏟아내는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최지은 시인의 에세이는 짧은 이야기 같기도 하고 시 같기도한 글들이 길가의 가로수처럼 페이지 페이지마다, 문장과 문단으로 바람에 흔들리기도 하고 그늘을 만들어주기도 하며 또 소란스레 대화를 건네기도 하며 채워져 가고만 있습니다.

 

  “때때로 어떤 편지를 읽고 있으면 느리게 눈송이가 내려앉는 것 같다. 홀가분하고 가볍게, 넓고 환하게. 어디서부터 출발한 것인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아주 멀리서부터 내게 온 눈송이를 상상해본다. 단번에, 사랑을 떠올리는 것이다.”

  <p.94>

 

그렇게 또 사랑이고 그 눈송이로 내리는 사랑입니다. 움푹 페인 도로에 내린 눈이 녹아 물웅덩이가 되듯, 그렇게 또 무언가에게 목마름의 열쇠가 되기도 하듯 사랑이고 홀가분하고 넓고 또 환하게 사랑입니다. 어차피.

 

  “시를 읽는 건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걸 알아가는 일 같다.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으니까 이대로 낙담할 것도 달관할 것도 포기할 것도 없다는 것을 배우며 기쁨을 진중하게 슬픔을 담대하게 바라보는 훈련 같다. 단련할수록 나아질 거라고 기대하면서.”

  <p.162>

 

내가 가득차고 부요하고 많이 알아서 타인을 향해 손을 뻗고 마음을 열고 사랑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나의 무지를 알아가는 그렇게 시가 되고 시를 읽는 것이 사랑이고, 이것이 기쁨도 슬픔도 배워내는 방법, 단련해서 나아지는 희망이라고 귀띔해주는 마음이 고맙고 고마웠습니다. 어쩔 수 없이 시인의 에세이는 시를 닮고 시를 담지 않을 도리가 없나 봅니다.

그래서 이른 더위로 인사를 건네는 올 여름도 좀 더 근육에는 힘을 빼고 마음에 힘을 주며 나누고 들어주고 다가가고만 싶게 합니다.

 

#우리의여름에게 #최지은 #에세이집 #창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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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키초의 복수
나가이 사야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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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노 세이자에몬의 아들 기쿠노스케. 그대 사쿠베에는 내 아버지의 원수. 여기서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겨루자.”

<p.7>


사건의 발단은 그랬습니다. 아버지 이노 세이자에몬에 대한 복수를 위해 아버지의 원수인 사쿠베에 앞에 서서 결투를 신청하는 아들 기쿠노스케. 그리고 펼쳐진 진검승부, 낭자한 선혈로 흰옷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사쿠베에의 자린 머리를 들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기쿠노스케!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한 페이지 겨우 채우는 결투 씬은 <귀소항담첩>에 기록되어 내려오는 이야기로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고비키초의 복수’로 불리웁니다. 그리고 2년 후...

그날의 다섯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채워지는 5막 구성의 군상극인 듯 1인극인 듯 풀어내듯 그날의 진실을 찾아가는 미스터리 분위기 물씬 풍기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그 다섯 목격자들의 면면은, 의상 담당 호타루, 극장 호객꾼 잇파치, 무술감독 요사부로, 소품 담당자의 아내 오요네, 극본 담당자 긴지가 그들입니다.

그들이 그들의 입장에서 혹은 이유를 가지고 2년 전 그날을 그들만의 방식으로 들려주는 것은 복수 그 너머에 숨어있는 사람, 사람들 그 모든 관계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다섯 사람의 목소리는 하나의 취재원이자 또 다른 목격자인 화자가 변사라도 되는 것처럼 무성영화를 읽어내듯 이야기의 안과 밖을 완성해갑니다.


“난 너보다 시성이 좋지 못해. 세상은 계단처럼 되어 있어서 위에 선 사람은 아래에 선 사람을 내려다보지. 그러니 기어올라야 한다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몰아붙여서 여기까지 왔단다. 하지만 네 말처럼 기어오르든 미끄러져 떨어지든, 불타면 뼈만 남아.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한층 편해졌어.”

<p.171>


이야기를 완성해가는 증언들은 또 그렇게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와 관계가 녹아들고 그 증인들의 삶마저 마주하고 나면 복수극의 전말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과 시간, 관계들이 더 궁금해지면서 그 이야기를 더 들려줬으면 하는 마음이 어느새 한 켠에서 점점 커져가는 묘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따라가게 되는 독특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어쩌면 작가가 그저 뻔한 미스터리 시대극을 뛰어넘는 작품으로 유수의 작품상을 수상한 이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의 훅 들어오는 반전과 감동. 차마 이해할 수 없는 믿음과 약속, 그리고 대의명분이라는 허울까지. 그렇게 또 한번의 반전극!


“연극을 무시하지 마라!”

<p.372>


책의 처음에 마주했던 ‘에도시대 연극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는 삐뚤빼뚤한 작가의 인사가 다시 이야기의 마지막과 마주하며 더불어, 함께 살아내는 우리네 인생의 희망이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면 좋겠단 푸근한 마음으로 책을 덮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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