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의 진리 - 비폭력 투쟁의 기원
에릭 에릭슨 지음, 송제훈 옮김 / 연암서가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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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알게 된 책인데, 가치에 비해서 너무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  

 

에릭 에릭슨은 심리학 개론 수업에서 기본적으로 언급되는 학자이기는 하지만 그의 이론은 많이 묻힌 듯 싶다. 기본적으로 그의 이론은 프로이드에서 출발하며, 인간의 유년기에 집중했던 프로이드와 달리 그는 인간의 인생 전반이 발달의 연속이며 이것은 9개 단계로 나뉜다고 분석했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사람이 노년기까지 계속 성장한다고 보았다. 생애 각 단계는 단계에서 단계로 이어지면서 단계의 내재적 힘이 확대되어 나가고 다음 단계에서 연쇄적으로 통합되면서 전체 생애 주기 속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의 이 책은 이런 큰 전제하에 인생의 중년을 분석하기 위한 인간의 한 표본으로서 간디를 다룬다. 그는 그 전에 이미 인간의 유년기와 청년기를 다룬 연작을 발표했는데, 참고로, 청년기에 대한 분석 대상은 루터이다. 

 

미리 말하자면, 글은 전반적으로 매우 흥미로우면서 동시에 너무 난해하다. 화제의 초점이 수시로 주변 인물로 향하고, 특히 전반부에서 그런 경향이 심하다. 초입부의 난관을 인내심을 가지고 잘 넘어가면 중반부 이후로는 비교적 읽기가 수월하다. 다행히 마지막까지 읽어낸 덕분에, 혹시나 덮었더라면 영영 놓쳤을 에릭슨의 깊은 인간 이해와 간디의 가치를 엿볼 수 있었다. 역자의 충실한 번역과 노고에 깊은 감사와 찬사를 드린다.  

 

간디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분분한 모양이다. 성자라고 하나 그의 그림자는 크고 짙다. 간디라는 인물이 성취한 인간의 잠재성이 거대한 만큼 그 안에는 모순이 심하고 외면하고픈 약점과 추함도 평범한 이들의 그것보다 강도 높다고나 할까. 그래서 간디를 추앙하는 사람이나 비난하는 사람이나 감정적으로 격렬해질 수밖에 없어보인다. 여기에 대해서 에릭 에릭슨의 분석은 매우 수긍할만한다: 완벽한, 진실한, 당당한, 교묘한(사람이라는 간디에 대한) 이런 평가는 일방적이며 각자의 자아상을 투사한 것이다... 이 하나 하나는 진실하면서도 그것들만이 전부는 아닌 다양한 투사들이다... 이런 투사들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 역시 지도자의 재능이 아니겠는가.

 

간디의 자서전을 20대 시절에 읽으면서 매우 혼란스러웠다. 닮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속에서 그를 밀어내는 무엇이 있었다. 그 무엇은 아마도 간디의 어두운 면에 대한 본능적 혐오가 아니었을까 싶다. 간디의 지나친 죄의식, 특히 아내에 대한 사디즘적 행동, 자신의 믿음에 대한 극단적인 충실함 같은 것들이 이십대의 마음에는 좀 두렵기도 했던 것 같다. 에릭 에릭슨도 비슷한 이유로 이 책을 중도에 중단하고 싶었노라 실토한다: 나는 당신(간디)이 진실을 주장하는 대목에서 일종의 허위를, 비현실적인 순수를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깨끗하지 못한 어떤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 비폭력을 다루는 대목에서 다른 형태의 폭력을 감지했던 것 같습니다.

 

에릭 에릭슨은 자신의 이론에 근거해서 간디의 어린시절과 청년시절을 매우 충실하게 살피면서 이 단계들이 그의 장년으로 어떻게 수렴되고 확대되며 또 유지되는지를 분석한다. 그리고 간디 장년의 중요한 사건으로서, 아메다바드 파업을 다룬다. 따라서 이 파업에 대한 상황 설명, 그 이면의 간디의 인간 관계들, 간디를 둘러싼 사람들에 대한 분석도 아울러 다루고 있다.

 

정체성이란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는 것이며 동시에 발견하고 구축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 에릭슨의 책을 읽으며 도달한 결론이고, 실제로 에릭슨이 말하고자 하는 바라고 생각한다. 에릭슨은 간디의 유년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그의 장난기를 언급한다. 간디의 장난기는 그의 생애에서 도덕적 조숙함의 무게를 덜어주고 그의 개인적, 정치적 표현 방식에 특별한 차원을 더해주며 비폭력 운동의 핵심적 요소였으리라고 에릭슨은 추정하고 있다.

 

간디의 청년기에서도 여러 중요한 특징들이 언급되는데, 예를 들자면 간디-아버지의 관계가 이후에 간디-영국의 관계에서도 반복된다는 것이다. 간디에게 아버지는 일종의 '우월한 적'이었고, 적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적을 돌봐주는 것은 간디에게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주제였다고 에릭슨은 분석한다. 그래서 간디는 대영제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전쟁 준비를 돕고자 부상병 후송부대를 편성했다. 

 

간디는 행동하는 인간이었다. 그는 말했다. 신은 우리 앞에 직접 나타나지 않고 다만 우리의 행동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어떤 말이나 노래가 그의 '마음에 깊이 박혔다'는 것은 그가 그것을 실천할 것임을 의미했다. 행동이란 '진리 실험'의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리는 찾아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가 수없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간디의 행적은 때로는 '일관성이 없어' 보였다. 에릭슨에 따르면, 간디의 인생은 오로지 진리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일관성이 있었다. 매우 일리 있는 추정이다.

 

간디에게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일면은 그의 정직성이다. 공교롭게도 이 책과 병행해서 읽은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에서 간디에 대한 짧은 에세이가 있었다. 오웰의 간디관이 내게 다 납득이 가는 것은 아니지만 오웰이 정확히 짚은 그의 미덕도 정직성이었다. '간디는 정직했을 뿐'이며 '그가 말하거나 생각하기를 두려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고 오웰은 말한다. 간디는 오로지 진리를 '실험'한다는 정신에서, 어떤 원리나 이념 속에 본질적으로 내재할 수밖에 없는 모순도 외면하지 않았다. 자기를 부정할 수 있는 힘은 결코 아무나 갖지 못한다.  

 

-우리의 의무는 전쟁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누군가에게 맞더라도 받아치지 말라고 가르쳐왔습니다. 우리가 지금도 그렇게 가르칠 수 있을까요?

-나는 인도에서 힘이 회복되어야 할 필요성을 확실히 느끼고 있다. 어쩌면 그 결과는 대학살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도는 이를 경험해야 한다. 현재와 같은 상황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그는 프로이드처럼, '모두가 애써 외면하려는 명백한 사실들을 직시'했던 한 '정직한' 인간이었다고 에릭슨은 말한다. 인간의 본능과 무의식을 들여다봤던 프로이드처럼 간디 역시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았다. 프로이드와 달리 그 방향이 사회, 국가, 정치를 향했을 뿐.

 

간디가 아메다바드 파업이라는, 인도에서 그가 가장 처음 벌인 대대적 사회 운동에 대한 에릭슨의 추적은 인간의 공격성에 대한 분석으로 수렴한다. 간디는 노동자들의 편에서 공장주들과 타협을 벌이는 과정을 기본적으로 아힘사(비폭력)의 원리에 따라서 진행했는데, 그의 문제 해결 방법은 이랬다. 

 

먼저 신중한 조사를 하고, 두번째로는 해결 방법을 결정하며, 세번째로는 상대와 본격적으로 대면한다. 그런 뒤에 상대의 의견을 듣고 나서 다시 이 편에서 해결책을 결정한 뒤 이것을 상대에게 (숨기지 않고) 자세히 알려서 상대로 하여금 건설적인 제 3의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런 식으로 노동자와 공장주는 '진실'되게 대면하고 '단계적'으로 변화되어 나간다. 간디의 비폭력 원리는 단지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다는 뜻뿐만 아니라 타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진리를 존중하며 타인을 응징하려 하지 않는다.   

 

에릭슨에 따르면, 인간의 공격성에는 본능적인 것(instinctive)과 본능에서 비롯된 것(instinctual)이 있다. 우리가 인간의 내면에서 공격성을 볼 때 이것을 본능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것이 에릭슨의 견해다. 그는 여기에 대해 두 숫사슴의 싸움과 뉴기니고원의 두 원시부족의 전쟁을 보충적 예로 들고 있다. 두 숫사슴과 두 원시부족은 싸움 혹은 전쟁을 극화된 모습으로, 즉 하나의 의식처럼 치룬다. 요란하게 싸우고 후퇴하는 행위를 반복적으로 하지만 그것은 절대 상대를 완전히 절멸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물리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의식화는 인간의 공격성을 단순히 본능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반증이라는 것이 에릭슨의 생각이다. 

 

이러한 전쟁의 관습은 일종의 의식이고 (이러한 전쟁이 수십년, 수백년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의식을 상대가 준수할 것이라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의식화는 진화의 한 표본일 수 있고 인간에게도 유전적으로 내려올 수 있다.

 

간디의 비폭력 정신, 즉 공장주들에게 전적인 신뢰를 보여주면서 그들의 움직임에 따라 다음에 취할 행동을 결정하고 상대방이 약점을 보일 때도 이용하려 들지 않는 태도, 상대방에게 변화할 기회를 준다는 정신은 두 숫사슴의 싸움과 두 원시부족의 전쟁에서 보이는 그 정신과 일맥상통한다. 신뢰는 간디의 행적 속에서 희망적으로 변주되었다.   

 

조지 오웰은 서양인의 시선에서 간디의 외모가 '인상적인 편이 아니'었고 그의 동양적 해탈 관념이 '내세적이고 반인본주의적'이라고 말하면서도 그가 '끝까지 증오 없이 집요한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정치의 공기를 소독'했고 정치인으로만 봤을 때 그가 남긴 향기는 너무나 '맑았다'고 얘기한다. 간디에 관한 오웰의 글은 느낌표로 끝난다... 간디는 인간의 가능성을 마치 광부가 금을 캐듯, 탐험가가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듯, 집요하게 탐색했다. 그 에너지가 놀랍고, 그 선의가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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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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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이성, 그 이성에 정직하려는 마음, 그 마음을 진심으로 살려준 행동, 그리고 미학적 열정! ‘나는 왜 쓰는가‘라는 에세이는 이 책 전체를 다 읽은 후에야 비로소 온전히 이해되었다. 조지 오웰에게 존경을 바친다. 거의 다 좋은 글들이지만 그중에서 ‘너무 너무 좋았지‘는 꼭 읽어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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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모든 것들 - 2단계 문지아이들 61
신시아 라일런트 지음, 부희령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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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편의 짧은 이야기들을 묶은 책이다. 길가에 핀 수수한 꽃들로 만든 아름다운 꽃다발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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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괜찮은 눈이 온다 - 나의 살던 골목에는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한지혜 지음 / 교유서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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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기억속의 골목을 걸으며 과거의 가난을 애정을 담아 돌아보지만, 대단히 예민한 자의식이 전체 글을 관통하고 있는 느낌이다. 마냥 따뜻하고 푸근하지만은 않다. 혹시 ‘참 괜찮은 눈‘은 그저 비루한 현실을 잠시 덮어줄 뿐이라는 말을 싶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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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추전쟁 낮은산 키큰나무 1
루이 페르고 지음, 클로드 라푸앵트 그림, 정혜용 옮김 / 낮은산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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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히지 않았다.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 시대와 사회의 괴리가 크다는 사실이 한몫을 했을 것 같다. 

 

그러나 적절하고 다양한 한국어를 구사한 역자의 힘으로 그 괴리를 무난히 건넜다. 번역을 하느라 애쓴 역자에게 박수를 보낸다. 

 

번역은 어디까지 가능한가를 생각해보았다.  1912년에 발표되었다고 하니까 100년이 훌쩍 넘은 작품인데, 그렇다면 이 소설에 사용된 프랑스어는 지금의 프랑스어와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것을 2000년대의 한국어로 번역해놓았고, 우리는 덕분에 이 작품을 이끼 덮힌 비석의 글을 읽듯 어렵게 읽는 대신 아주 수월하게, 매끈한 돌판에 선명하게 새겨진 글처럼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100년 전의 한국 소설도 번역할 수 있을까? 김동리며 염상섭의 글들을? 더 최근으로 오자면 조정래의 소설도-죄송하지만-문장이 구식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잘 읽히지 않는데, 이런 한국 작품들도 현대의 자연스럽게 살아있는 입말로 옮길 수 있을까? 

외국의 고전들은 '번역은 반복적으로 재번역되어야한다'는 주장에 힘입어 현대 국어로 새롭게 옮겨지고 있는데 그렇다면 한국의 고전들은 어떻게 해야할까? 

번역은 어디까지 가능한 것일까? 

재기 넘치는 현대 프랑스 작가가 라블레의 전통을 이어받아 대담무쌍하게 썰을 풀어낸 따끈따끈한 신작 소설을 읽는 기분으로 100년 전의 이 고전을 읽으면서, 좀 혼돈스러웠다.  

 

어쨌거나 초입부에서 약간 고전을 하고 그 뒤로는 술술 재미있게 읽고 나서, 그러니까 작가는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일까 곰곰 생각해보았다.

 

있는 그대로 읽자니, 꼬맹이들이 만만치않게 폭력적이다. 팔팔하게 건강한 인간은 곧 전투하는 인간이니라, 는 뜻일까? 

 

나의 어린 시절의 한 순간을, 활기찬 어린 야만인들이 엮어가는 열광적이고도 거친 삶을, 그 꾸밈없고 영웅적인 모습 그대로, 다시 말해 가족과 학교의 위선에서 해방된 모습 그대로 살리고자 했다.

 

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으니... 

<일리아드>를 읽고 자란 서구의 작가들에게 있어서 명예는 굉장히 중요한 덕목이고, 이 소설의 꼬맹이들이 전쟁을 벌이는 목적은 단 하나, 명예다. 자신들을 감히 '물렁좆'이라고 부르다니!

그러나 이들의 전투는 아이들 버전으로 옮겼기에 귀엽게 보이지만 실은 굉장히 잔인하고 폭력적이다. 이것을 열광, 거친, 꾸밈없는, 영웅 등의 말로써만 형용하기에는 어딘가 미진하다. 한마디로 아이들의 전투력은 대단했다.

 

그리고 그곳에 용맹함과 재기발랄함은 있었을지 모르나 성숙한 이성은 부재했다.  책 어느 구석에도 성숙한 어른은 없었다. 선생이라는 사람은 그저 도량형만 열심히 가르칠 뿐,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 정말 필요한 것 즉 이성을 키우는 데는 무관심하며 무능력하다. 작가는 이러한 한심한 교육 현실을 꼬집고 싶었던 것도 같다. 

 

비유로 읽자면, 이 작품은 꽤 교훈적이다. 이유없이, 아니 당사자들은 목숨을 걸만큼 중대한 이유를 갖고, 두 편으로 나뉘어 싸우는 모습은 100년 이상 지난 2020년, 먼 이국인 한국에서 그대로 재연되고 있다. 역사는 과연 발전하고 있는지를 심각하게 의심하면서 역사의 한 순간을 살고 있는데, 뭐 역사가 그렇지... 라고도 생각해보지만... 역사는 꼭 이래야만 하는 걸까?

 

루이 페르고씨가 지금 살아서 이 사회에 대해서도 아주 아주 쎈 농담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아니 참, 우리도 한국 어느 구석에서 이런 작품을 누군가 쓰고 있을 것이라 믿고 싶다. 아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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