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나무들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옮김 / 창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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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의 글도 좋지만 책의 만듦새가 훌륭하다. 글과 그림의 배치가 조화롭고 적절하다. 표지와 본문 그림을 그린 한수정 작가의 그림이 헤세의 글을 더 빛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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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기사에 이금이 작가가 소위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의 최종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그런데 이금이 작가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내게 더 반가웠던 건 <그해 여름, 에스더 앤더슨>의 글 작가 티모테 드 퐁벨도 최종후보자로 선정됐다는 사실이었다. 그걸 알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내 그럴 줄 알았지! 그의 이야기 세계와 문장은 너무나 아름답고 시적이어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그림책이 '작품'이 된 건 티모테 드 퐁벨의 글에 이렌 보나시나가 그림으로 완벽하게 화답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펜으로 그린 헐렁한 선, 수채화의 맑은 색감, 넉넉한 여백이 아이의 자유로운 여름 방학을 더없이 잘 담아내고 있다. 가로 34센티미터 세로 24센티미터의 길고 큰 판형도 신의 한 수다. 책을 펼치는 순간, 화폭은 가로가 2배로 확장되면서 이야기 공간이 독자를 에워싼다. 100호가 넘는 대형 그림이 감상자에게 주는 효과, 아이맥스 영화관이 관객들에게 주는 바로 그 효과를 이 그림책도 노린 것이다. 글과 그림과 판형이 독자를 데려가고자 하는 지점은 바로 무한한 자유, 빛나는 자유다.      


여름이 되었다. 열두어 살 무렵의 남자아이는 집을 떠나 혼자 기차를 타고 삼촌 집으로 간다. 아이는 해마다 여름 방학을 삼촌 집에서 보내는 것 같다. 삼촌의 집은 옥수수밭 한가운데에 있고, 삼촌은 평생 아무것도 버리지 않는 사람이어서 집은 잡동사니로 꽉 차있다. 삼촌은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카를 위해 책을 한 무더기 장만해 놓을 줄 아는 사람이다. 넓은 옥수수밭 한가운데 잡동사니로 그득한 집에서 보내는 담백한 시간은 아이에게 자유를 허용한다. 아이는 무한대로 펼쳐지는 자유를 얻는다.   


"앞으로 펼쳐질 길고 긴 여름날을 생각했다.
너무나 아득해서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을 여름날들."



아이는 매일 자전거를 타고 동네와 그 너머를 탐험한다. 삼촌의 집을 중심으로 아이는 나선을 그리면서 점점 더 멀리 나가본다. 방학은 달팽이 집 같았다고 작가는 묘사한다. 이것은 영원의 이미지다.


그러던 어느 날, 밀 수확으로 길이 막혀서 아이를 나선형의 행로 밖으로 이탈시키는 일이 벌어진다. 아이는 길을 잃고 낯선 모랫길로 들어간다. 길을 따라 넘어간 모래 언덕 너머에는 새로운 세상이 있었다. 가슴을 벅차 오르게 만드는 드넓은 바다가 출렁대는 세상, 그리고 자기 또래의 여자아이 에스더 앤더슨이 있는 세상이.


"이 순간 이후, 모든 것이 영원히 달라질 거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몸이 떨렸다. 책도 읽을 수 없었다. 아이는 어둠 속에서 에스더 앤더슨을 불러본다. 다음 날은 비가 왔고, 비가 그친 그 다음날 아이는 자전거를 끌고 집을 나섰다. 바다에서 에스더 앤더슨을 만나려고. 거기로 가려면 길을 잃어야 했다.  


"어떻게 해야 길을 잃을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느슨한 탐색과 자유가 달팽이 집처럼 빙빙 나선을 그리고 이어진다. 어린아이는 안전한 보호자의 품 안에서 마음껏 자유롭다. 영원처럼 이어질 것 같았던 달팽이 집이 끝나는 지점에서 아이는 바깥세상으로 자연스럽게 나아간다. 전혀 새로운 세상과의 만남은 충격이어서 아이는 입이 얼어붙고 몸이 떨렸다. 하지만 이제 기꺼이 길을 잃을 줄 안다.



어릴 때 나는 때로 심심했다. 심심하다는 말보다 더 적당한 말을 찾으라면 딱히 한 단어로는 안 될 것 같다. 어린 나는 심심한 그 시간이 버거웠다. 그것은 견딜 수 없는 공허감이기도 했다. 끝나지 않는 낮 시간, 무한하게 풀려나가는 실타래처럼 지루했던 시간들, 눅진하게 쌓여 어린 나를 무겁게 내리누르던 무료한 시간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작은 언덕에 올라앉은 자그마한 우리 집에는 영원처럼 길고 긴 낮이 내려앉아 있었다. 마루에서 마주 보이는 건너편의 야트막한 초록 언덕도 정적이었다. 앞마당에는 칸나가 뒷마당에서는 사과나무와 배나무가 자라고 있었지만 식물들은 조용했다. 온 집이 죽은 듯이 고요했다. 뒷마당 광의 옥상으로 올라가 내려다보는 도로에는 장난감처럼 작은 차들이 달리고 하늘에는 푸름이 한가득, 흰 구름이 무료하게 모양을 바꾸며 떠 있었다. 그 모든 정적과 고요는 어린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진하고 거대했다. 해는 하늘 가운데 박아놓은 듯 기울지 않았고 언니며 오빠, 아버지가 돌아오고 엄마가 저녁을 준비하느라 집이 북적대며 활기가 도는 저녁 시간은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어린 나는 <그해 여름, 에스더 앤더슨>의 아이처럼 자전거를 타고 길을 빙빙 휘감으며 조금씩 더 멀리멀리 나아갈 생각을 왜 못했을까?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장소의 탓도 없지 않았을 듯싶다. 나는 익숙한 집에 있었고, 저 아이는 집과 부모를 떠나 옥수수밭 한가운데 잡동사니로 가득한 집에서 활자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며 사는 삼촌에게 갔으니까. 낯설면서도 안전한 그곳에는 발견과 해방감이 충만했다!     



어릴 때의 나처럼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지루하고 외로운 시간을 감당하지 못하는 소년이 있다. 파스칼레.


















프랑스 소설가 앙리 보스코가 백 년도 전에 쓴 <아이와 강>의 주인공 아이는 시골의 들판 한가운데 외따로 떨어진 조그만 소작인 농가에 살고 있다. 밭과 나무 울타리, 식물, 멀리 떨어진 두셋의 농가 밖에 없는 단조로운 풍경에 갇혀서 아이는 쓸쓸하다. 그 풍경 너머에 강이 흐르고 있다는 걸 파스칼레는 들어서 알고 있다. 강은 여름철이면 말라 버리지만 봄철에 알프스의 눈이 녹을 때면 큰 강으로 변해서 엄마 아빠는 파스칼레에게 절대로 강가로 가지 말라고 다짐시킨다. 강에는 사람이 빠지는 죽음의 구멍들이 있고 갈대숲에는 뱀이, 강가에는 위험한 집시들이 산다고. 파스칼레의 이야기는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무료한 날, 어른들이 집을 비우고 딴 데 신경을 판 사이, 홀린 듯 집을 나서면서 시작된다.


"조그만 오솔길들이 속삭이듯 나를 이끌었다.
'이리 와, 몇 걸음 더 나가 보는 거야. 어때? 첫 번째 모퉁이 길이 여기서 멀지 않아? 오베핀느 꽃나무 앞에서 걸음을 멈추면 된단다.'
이렇게 속삭이는 소리가 정신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새들이 가득히 올라앉고, 푸른 열매가 잔뜩 달린 두 줄의 나무들 사이로 꼬불꼬불 이어진 그 오솔길로 일단 발걸음이 내디뎌지고 난 뒤에 내가 어떻게 걸음을 멈출 수 있었겠는가?"


아이는 결국 강까지 걸어갔고 이끼가 덮인 부드러운 흙바닥에서 깜박 잠이 드는 바람에 날이 저물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일을 돌봐주는 친척 할머니는 아이 몸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더니 말했다.


"야, 이 떠돌이야! 바람둥이야!"


할머니는 아이가 다시 집을 나가 강으로 갈까 봐 사흘 동안 감시했다. 아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할머니는 다시 자기 일에 정신을 팔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이는 다시 몰래 집을 빠져나가 곧장 강으로 갔다. 강은 너무나 멋졌다. 파스칼레는 강기슭을 따라서 걷다가 말뚝에 매인 채 흔들리고 있는 나룻배를 발견한다.  


"배에는 노가 없었다. 삼으로 꼬아 만든 나룻배는 다 헐어빠진 밧줄로 비끄러매어져 있었다. 물이 어찌나 잔잔한지 밧줄은 강물 속에 가만히 잠겨 있었다. 이 고요함과 아늑한 분위기가 곧 내 마음을 끌어갔다. 나는 배 있는 곳으로 내려가서 잠깐 망설이다가 발을 뱃전에 얹어 놓았다."


어떻게 해야 길을 잃는지 알았던 티모데 드 퐁벨의 남자아이처럼 앙리 보스코의 아이도 기꺼이 길을 잃는다. 절대 가지 말라는 강으로 가서 절대 타서는 안 될 나룻배에 올라탔다. 그리고 퐁벨이 묘사하듯, 이 순간 이후 모든 것이 영원히 달라졌다. 배를 묶어놓았던 밧줄이 풀리고 표류를 하면서 파스칼레는 생전 가보지 않았던 강 중앙의 섬 모래밭에 내린다. 그리고 그곳에서 야생적이고 매혹적인 소년 가쪼를 만나 위험천만하고 가슴 뛰는 모험을 한다.   


어린아이의 시간은 영원처럼 펼쳐지고, 나뉠 수 없는 시간임에도 영원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진다. 길을 잃거나 '이리 와, 몇 걸음 더 나가보는 거야.'라는 오솔길의 속삭임을 들음으로써. 퐁벨의 묘사를 다시 빌리자면, 영원은 후반부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훨씬 파격적이며 강력하고 풍부한 모험 이야기를 펼친다. 퐁벨의 아이와 보스코의 아이의 모험은 문명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이 이야기는 대단히 반문명적이며 냉소적이다. 영원 같은 여름 방학에 바다와 첫사랑을 만나고, 오솔길의 유혹에 넘어가 어른들이 설정한 경계선을 넘어가 집시들이 사는 위험한 강을 향해 갔던 아이들이 이제 허클베리에 이르러서는 경계선 자체를 부정하며 어른들의 세계, 문명 세계와 정면으로 대결한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톰 소여의 모험>이라는 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아마 나에 대해 잘 모를 겁니다라는 허클베리 핀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허클베리는 술에 취해서 아이를 때리는 아빠 밑에서 방치된 채 숲에서 살다가 어느 날 아빠로 추정되는 익사체가 발견되면서 한 과부댁의 양자로 들어간다. 과부는 허클베리를 '교양 있는 사람'으로 만들겠노라 결심했다. 그러나 허클베리는 교양을 위한 모든 규범이 견딜 수 없다. 집 안에서 지내고 침대에서 잠을 자는 것, 단정하게 옷을 입는 것, 식탁 예절을 지키는 것, 성경을 읽고 학교를 다니는 것 등등. 허클베리는 담배를 피우고 거짓말을 하면서도 죄책감이 없으며, 마크 트웨인이 창조한 또 다른 아이 톰 소여와 갱단을 만들 비밀스러운 작당을 하는 아이다. 허클베리가 학교에서 읽고 쓰기를 그나마 조금이라도 배우고 구구단을 육 단까지 외울 수 있었던 건, 다시 말해서 학교를 참을 만하게 여기게 됐던 건 선생의 구타 덕분이었는데, 이 대목은 이른바 교양을 자랑하는 서구 문명의 위선을 향한 마크 트웨인의 조롱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학교가 견딜 수 없이 싫어질 때에는 땡땡이쳤고, 그다음 날 얻어맞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가면 갈수록 학교 가는 일이 점점 쉬워지게 되었죠."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악당 아빠가 돌아왔다. 허클베리는 다시 숲에서 아빠와 함께 살게 되는데 어느 날 우연히 강에서 표류하는 카누를 발견한다. 이야기는 당연히 모험으로 이어진다. 허클베리는 카누를 타고 미시시피 강을 따라 도망을 치고, 동행하는 친구도 생겼다. 주인으로부터 도망을 친 흑인 노예 짐이었다. 도망 노예를 숨겨주는 건 위법이지만 허클베리는 짐을 노예가 아니라 사람으로 볼 줄 안다.  


도망치는 이 두 사람은 밤이면 배로 이동하고 낮이면 강어귀에 배를 숨겨놓고 마을로 들어가는 생활을 반복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삶의 양태들을 목격한다. 교양 있는 자들의 위선, 인간의 잔인하고 어리석은 본성, 그것이 빚어내는 비극, 또 인간의 선함까지. 마크 트웨인은 이 소설을 통해서 노예제도 또한 통렬하게 비판한다.


허클베리의 모험 이야기는 솔직하고 명민하며 거칠면서 인간적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가 강을 따라 흘러간다. 한 강변 마을에 들러 이런 일을 겪고 다른 강변 마을에서 저런 일을 겪으면서 허클베리와 짐은 줄곧 강으로 돌아오고 강으로 도망친다. 인간들의 모순적인 사회에서 자연의 너른 품으로. 인간은 이성이 있으나 비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신을 믿으나 신을 배반하며 선하나 동시에 악을 행한다. 자연은 그 모든 것을 벗어나 있다. 인간의 희비극은 육지에서 벌어지고 강으로도 흘러들지만 강은 그저 무심하다. 두 사람은 완전한 자유가 있는 곳, 강에서 안심한다.     


"어느 곳에서도 아무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습니다-사방은 쥐 죽은 듯 고요했지요-마치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잠을 자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다만 어쩌다 먹개구리가 울어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물 위를 저 끝까지 바라다보고 있으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희미한 선 같은 것뿐이었습니다-그것은 저쪽 강둑에 있는 숲이었지요-그 밖엔 아무것도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다음 하늘에 뿌연 곳이 보였고, 그것이 점점 사방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다음 하늘에 뿌연 곳이 보였고, 그것이 점점 사방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다음 강이 저 멀리서 뿌옇게 밝아져 검은색은 찾아볼 수 없이 회색으로 변했습니다."



무한하게 이어지는 낮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어린 나도 모험을 꿈꿨다. 모험은 골목길과 산으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책과 상상 속에서 이뤄졌다. 꽝꽝 언 강을 따라 스케이트를 타고 내려오는 북유럽 동화를 읽으며 나도 주인공처럼 뺨이 얼얼해진 채 뜨거운 코코아를 마시는 상상을 했다. 열차 도둑을 잡는 소년을 따라가며 가슴을 졸였다. 모험 이야기들은 읽고 또 읽어도 재미있었다. 소설 속 누구처럼 나도 고상하고 아름다운 내 진짜 엄마가 있어서 나를 데리러 왔으면 좋겠고, 내가 죽어서 식구들이 뒤늦게 후회하고 미안해하며 울었으면 좋겠고, 뭐 그런 상상을 하며 청승을 떨었다. 나는 썩 활기 넘치는 아이가 아니었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곧장 숙제부터 하고 노는 얌전하고 모범적인 아이였다. 그래서인가 보다. 모험과 일탈에 여전히 은근하게 마음이 기운다.


어린 시절의 그 많던 시간들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졌다. 어릴 때는 영원을 알았다. 영원의 느낌을. 그런데 나이가 들며 그 느낌이 슬며시 사라지고 그 대신 단락 단락 끊긴 시간들을 살게 되었다. 풀린 실타래 같던 시간의 그 지루한 느낌들은 잊어갔다. 허공으로 끝간 데 없이 펴지는 광대한 시간들에 대한 기미를 어린 나는 느꼈으나 지금의 나는 관념으로만 이해한다.


우주의 시간은 영원하나 인간의 시간은 유년 청년 장년 노년 그리고 죽음으로 이어지는 유한하고 뻔한 전개를 따라간다. 영원은 곧 무한이다. 우리는 어릴 적 영원을 살았다. 불가능한 얘기처럼 들리지만 그랬던 것 같다. 다행히 이야기들은 영원을 글로써 잡아놓았다. 그래서 이야기 안에는 영원이 존재한다. 우리가 현실에서 실현하지 못하는 영원, 마음과 꿈과 상상에서만 가능한 영원의 시간이 이야기 속에서는 여전히 흐르고 있다.  






"방학은 달팽이 집 같았다. 가운데에는 집이 있었다. 나는 나선형 원을 그리면서 멀리 떨어진 가장자리까지 가려고 애썼다. 그러던 여름 어느 날, 그 일이 벌어졌다. 밀밭에서 수확이 한창이라 교차로를 지날 수 없었다. 두 시간이나 더 멀리 돌아 자전거를 타야 했다. 소나무들이 모두 사라지고, 잡초 사이로 난 모랫길이 하늘로 향했다. 바퀴가 빛 가운데로 나아가는 것 같았다. 처음 와 본 곳이었다. 이 순간 이후, 모든 것이 영원히 달라질 거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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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새 네버랜드 클래식 48
모리스 마테를링크 지음, 허버트 포즈 그림, 김주경 옮김 / 시공주니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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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을 알고 푸는 수학문제처럼 이 작품도 그렇다. 풀이 과정에 놀라운 발견이 있듯이 이 이야기도 정답에 이르는 과정에 진짜 재미와 의미가 있다. 가끔 뻔하고 엉뚱한 구시대적 발상을 만나지만 상징과 상상이 깊고 다채로워서 그 정도는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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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을 어떻게 정의할지 고심했다. 모두가 동의하는 보편적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어린이 같고 어린이다운 마음, 실체로서의 동심이란 게 존재할 거라 막연히 믿었다. 하지만 적확하게 정의내리라고 하면 동심은 연기처럼 흩어졌다. 동심이 실재하기는 하는지 의심스러웠다. 평균 키나 평균 체중처럼 '평균'이라는 개념이 흔하게 쓰이지만 실제로는 평균 키나 평균 체중이 허상이듯 동심도 그런 게 아닐까 의심했다.  

 

하지만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우리는 동심을 만난다. 하루 종일 식당에서 일한 엄마가 아픈 다리를 펴고 편하게 쉴 수 있는 안락의자를 사드리고 싶은 아이의 마음이 동심이 아니면 무얼까.  












 

아이의 집은 일 년 전 화재로 모든 걸 잃었다. 가족은 새 집으로 이사했고 다정한 이웃 사람들과 친척들은 식기와 침대 같은 살림살이를 나눠주었고 음식도 가져와 어려움을 잘 이겨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안락의자는 마련하지 못했다. 아이의 엄마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늘 발이 아프다고 했고 할머니도 딱딱한 부엌 의자에 앉아야 했다. 그래서 안락의자를 사기 위해 어느 날 엄마는 식당에서 가장 큰 유리병을 가져와 동전을 모으기 시작했다.

 

아이는 엄마의 식당에서 소금통, 후추통을 씻고 병에 케첩을 채우고 양파를 까는 소소한 일을 했고 그러면 식당 주인인 조세핀 아줌마가 돈을 줬다. 그중 절반을 아이는 유리병에 넣었다. 엄마도 팁으로 받은 잔돈을 유리병에 넣었고, 할머니도 물건을 싸게 사고 남은 동전을 넣었다. 그렇게 일 년 동안 동전을 꼬박꼬박 모은 끝에 유리병이 동전으로 꽉 차는 날이 왔다. 세 사람은 식당이 쉬는 날 안락의자를 사러 간다. 은행에서 동전을 지폐로 바꾼 다음, 버스를 타고 시내에 가서 그들은 가구점을 네 군데나 돌아다니며 온갖 의자에 다 앉아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모두가 꿈꾸어 온 의자를 발견했다. 이야기의 서두에서 아이가 꿈꿨던 바로 그 의자를!

 

그래요, 의자요. 멋있고, 아름답고, 푹신하고, 아늑한 안락의자 말이에요.
우린 벨벳 바탕에 장미꽃무늬가 가득한 의자를 사려고 해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의자를 요.


이제 엄마는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화사한 장미꽃무늬 안락의자에 편안히 앉아서 텔레비전 뉴스를 보며 쉬고, 낮에는 할머니가 이 의자에 앉아 창밖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아이가 저녁을 먹고 안락의자에서 엄마 무릎에 안겨 잠이 들면 엄마는 아이를 안은 채로 팔을 뻗어 불을 끌 수도 있다. 아이가 바라는 건 오로지 엄마를 쉬게 해 드리는 것이었다. 아이의 마음은 순전히 그랬다.  

 


그렇다면 이 아이는 또 어떨까. 경제 공황으로 일자리를 잃고 아이를 키울 수도 없을 만큼 가계가 힘들어지자 부모는 아이를 도시에 사는 외삼촌에게 보내기로 한다. 시골의 넓은 초원에서 할머니와 꽃을 키우고 밭을 일구던 여자아이는 느닷없이 익숙한 집을 떠나 삭막한 도시, 거대하고 황량한 기차역에 혼자 내린다. 엄마가 자신의 옷을 줄여서 만든 파란 원피스를 입고서.

 

그런데 놀랍게도 아이는 씩씩하다. 낯선 장소 낯선 관계를 다정하게 대한다. 아이는 무뚝뚝한 외삼촌의 빵집에서 열심히 일을 도우며 크리스마스에는 외삼촌에게 시를 선물하고, 빵집에서 일하는 엠마 아줌마에게 꽃씨 이름을 가르쳐주는 대신 빵 반죽하는 법을 배우면서 틈틈이 꽃을 키운다.  














삭막한 도시에서 꽃을 피울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있다. 할머니가 보내준 씨앗, 흙을 담을 화분, 햇빛과 물만 있다면. 그리고 친절한 사람들이 있으면 더 풍성하게 피울 수 있다. 동네 사람들에게 원예사 아가씨라고 불린 이 아이는 빵집 건물의 내버려진 옥상을 꽃밭으로 꾸미기로 마음을 먹는다. 엄마를 위해 동전을 모으던 아이처럼 이 아이도 오랜 시간을 들여서 마침내 건물 옥상에 멋진 정원을 완성했고 그걸 외삼촌에게 선물했다.   

 

행복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아요!

 

 

꽃 정원을 완성해서가 아니라 외삼촌에게 그걸 선물해서 아이는 행복했다. 선물은 꽃 정원이 아니었어도 좋으리라. 사랑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아끼는 걸 주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사랑하는 이가 선물을 받아 들고 활짝 웃고 행복할 수 있다면 나도 '행복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그 마음이 사랑이다.  

 













여기에 또 한 아이가 있다. 아픈 할머니 때문에 놀이 공원을 가지 못해 화가 난 아이. 엄마 아빠는 아픈 할머니를 모시느라 아이의 마음을 살필 겨를이 없다. 두 사람은 할머니가 좋아하는 홍시를 냉장고에 쟁여놓고 할머니의 병시중을 하는 데만 온통 신경이 가 있다. 아이는 방에 누워만 있는 할머니가 원망스럽다. 엄마 아빠가 많이 밉다.

 

다래는 방문을 쾅 닫았어.
할머니는 왜 맨날 누워만 있는 거야?
맨날 누워 있는 할머니 생각만 하고
다래 생각은 하나도 안 해주는
엄마 아빠가 너무너무 미웠어.
다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꽉 감았어.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할머니가 다래를 깨웠다. 다래, 아직 안 일어났니? 그리고는 놀이공원에 가자고 했다. 할머니는 엄마, 아빠가 피곤할 테니 둘만 살짝 다녀오자고 했다. 할머니는 엄마가 얼려 놓은 홍시까지 챙겨놓았다. 다리가 아플까 봐 놀이공원 입구에서 자기를 업어주는 할머니한테 미안해서 아이는 할머니에게 홍시를 먹여드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할머니가 자꾸만 젊어졌다. 공원 입구에서는 엄마만큼 젊어지고 은하철도를 탈 때는 언니가 되었다. 그리고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무지개 아이스 바를 먹으며 할머니가 자기만 한 친구가 된 뒤에야 아이는 할머니 이름을 알게 되는데...  

 

"다래, 넌 나만 쳐다볼 거니?"
다래는 그때서야 아이스 바를 받아 들었어.
", 그럼 네가..."
"그래, 명애. 내 이름도 몰랐어?"

 

  

놀이공원의 정글짐 꼭대기에서 둘은 푸른 나무들을 바라보며 약속했다. 가을이 오면 나무들이 울긋불긋 정말 예쁘겠다. 우리 그때 또 놀러 오자.

 

명애와 다래는 해가 질 때까지 신나게 놀다가 집으로 돌아오는데 지하철 안에서 할머니는 그새 동생이 되어있었다. 아이는 할머니를 등에 업었지만 하나도 무겁지 않았다. 살금살금 할머니 방에 들어갔을 때 할머니는 더 작아져 있었다. 아이는 할머니 명애를 조심조심 바닥에 눕히고 곁에서 스르르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다래는 자기 방에서 깜짝 놀라서 깼다. 엄마는 네가 홍시를 먹었냐며 냉장고에서 홍시를 찾고 있었다. 할머니 방에 들어가보니 할머니는 방에서 가르랑가르랑 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아이는 쭈글쭈글한 할머니 얼굴에 대고 속삭인다.

 

"명애야...
가을이 오면 우리 꼭 다시 놀러 가자."



동심을 꿈꾼다.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모두가 나와 똑같은 마음일 거라 오해하면서 나는 동심을 꿈꾼다. 아름다움과 선함과 진실함은 질료나 행동이나 이야기 같은 구체성으로밖에 잡을 수 없고 그걸 욕심껏 잡으려 하면 어느새 허망하게 사라지듯이-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이리라-동심도 그런 것 같다. 엄마의 아픈 다리를 쉬게 해주고 싶은 안타까움, 활짝 핀 꽃으로 외삼촌을 웃게 만들고 싶은 다정함, 아픈 할머니를 아이로 돌려놓고 싶은 한없는 연민에서 나는 동심을 본다. 보드라운 아이의 웃음에서, 다정하게 잡아주는 손에서,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에서, 의심 않고 전폭적으로 믿어주는 믿음에서, 자기를 활짝 연 품에서.  

 

달리 표현해 보자면, 사심 없는 마음이 동심의 얼굴 같다. 나를 생각하지 않고, 남을 의심하지 않고, 내 욕심을 부리지 않고, 남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마음. 어른도 가끔 그런 마음이 되는 찰나가 있다. 오래 유지하기는 도저히 어려운 아주 짧은 동안에만 어른도 그럴 수 있다. 어른은 그 순간을 드물게 만나지만 아이는 그 순간을 아예 사는 것만 같다. 그건 누구보다도 우선 아이 자신에게 최고로 좋은 일이어서, 아이들은 모두 행운아다. 자라면서 우리는 행운을 하나씩 하나씩 길에 떨어뜨리며 잃어버렸다. 혹여 운이 좋다면 어떤 어린아이가 그걸 주워 우리에게 다가와 물을지 모른다. 이거 아저씨, 아줌마 거예요?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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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의 세계 - 아동청소년문학의 사유와 감각
김재복 지음 / 창비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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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문학에 대한 성실한 사랑이 느껴지는 평론집이다. 소설 평론들은 평론가와 일부 작가만 이해할 수 있을 ‘닫힌‘ 글 같다.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들의 마음까지 움직이는 건 불가능할까? 저자의 동시 평론들은 그렇기 때문이다. 동시를 얘기할 때 저자의 글은 살아숨쉬고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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