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추전쟁 낮은산 키큰나무 1
루이 페르고 지음, 클로드 라푸앵트 그림, 정혜용 옮김 / 낮은산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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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히지 않았다.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 시대와 사회의 괴리가 크다는 사실이 한몫을 했을 것 같다. 

 

그러나 적절하고 다양한 한국어를 구사한 역자의 힘으로 그 괴리를 무난히 건넜다. 번역을 하느라 애쓴 역자에게 박수를 보낸다. 

 

번역은 어디까지 가능한가를 생각해보았다.  1912년에 발표되었다고 하니까 100년이 훌쩍 넘은 작품인데, 그렇다면 이 소설에 사용된 프랑스어는 지금의 프랑스어와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것을 2000년대의 한국어로 번역해놓았고, 우리는 덕분에 이 작품을 이끼 덮힌 비석의 글을 읽듯 어렵게 읽는 대신 아주 수월하게, 매끈한 돌판에 선명하게 새겨진 글처럼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100년 전의 한국 소설도 번역할 수 있을까? 김동리며 염상섭의 글들을? 더 최근으로 오자면 조정래의 소설도-죄송하지만-문장이 구식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잘 읽히지 않는데, 이런 한국 작품들도 현대의 자연스럽게 살아있는 입말로 옮길 수 있을까? 

외국의 고전들은 '번역은 반복적으로 재번역되어야한다'는 주장에 힘입어 현대 국어로 새롭게 옮겨지고 있는데 그렇다면 한국의 고전들은 어떻게 해야할까? 

번역은 어디까지 가능한 것일까? 

재기 넘치는 현대 프랑스 작가가 라블레의 전통을 이어받아 대담무쌍하게 썰을 풀어낸 따끈따끈한 신작 소설을 읽는 기분으로 100년 전의 이 고전을 읽으면서, 좀 혼돈스러웠다.  

 

어쨌거나 초입부에서 약간 고전을 하고 그 뒤로는 술술 재미있게 읽고 나서, 그러니까 작가는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일까 곰곰 생각해보았다.

 

있는 그대로 읽자니, 꼬맹이들이 만만치않게 폭력적이다. 팔팔하게 건강한 인간은 곧 전투하는 인간이니라, 는 뜻일까? 

 

나의 어린 시절의 한 순간을, 활기찬 어린 야만인들이 엮어가는 열광적이고도 거친 삶을, 그 꾸밈없고 영웅적인 모습 그대로, 다시 말해 가족과 학교의 위선에서 해방된 모습 그대로 살리고자 했다.

 

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으니... 

<일리아드>를 읽고 자란 서구의 작가들에게 있어서 명예는 굉장히 중요한 덕목이고, 이 소설의 꼬맹이들이 전쟁을 벌이는 목적은 단 하나, 명예다. 자신들을 감히 '물렁좆'이라고 부르다니!

그러나 이들의 전투는 아이들 버전으로 옮겼기에 귀엽게 보이지만 실은 굉장히 잔인하고 폭력적이다. 이것을 열광, 거친, 꾸밈없는, 영웅 등의 말로써만 형용하기에는 어딘가 미진하다. 한마디로 아이들의 전투력은 대단했다.

 

그리고 그곳에 용맹함과 재기발랄함은 있었을지 모르나 성숙한 이성은 부재했다.  책 어느 구석에도 성숙한 어른은 없었다. 선생이라는 사람은 그저 도량형만 열심히 가르칠 뿐,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 정말 필요한 것 즉 이성을 키우는 데는 무관심하며 무능력하다. 작가는 이러한 한심한 교육 현실을 꼬집고 싶었던 것도 같다. 

 

비유로 읽자면, 이 작품은 꽤 교훈적이다. 이유없이, 아니 당사자들은 목숨을 걸만큼 중대한 이유를 갖고, 두 편으로 나뉘어 싸우는 모습은 100년 이상 지난 2020년, 먼 이국인 한국에서 그대로 재연되고 있다. 역사는 과연 발전하고 있는지를 심각하게 의심하면서 역사의 한 순간을 살고 있는데, 뭐 역사가 그렇지... 라고도 생각해보지만... 역사는 꼭 이래야만 하는 걸까?

 

루이 페르고씨가 지금 살아서 이 사회에 대해서도 아주 아주 쎈 농담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아니 참, 우리도 한국 어느 구석에서 이런 작품을 누군가 쓰고 있을 것이라 믿고 싶다. 아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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