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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보포칼립스
대니얼 H. 윌슨 지음, 안재권 옮김 / 문학수첩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사실 이런 소재는 조금 고루하지 않느냐 이말 이다. 로봇 vs 인간의 대결을 그린 근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우리는 사실 너무 많이 봐 왔다. 물론 터미네이터 시리즈가 처음 선뵌 1984년에는 기계가 극도로 발달하는 미래사회에 대한 절망적인 상상력에 많은 사람들이 충격과 공포를 느꼈겠지만 그게 벌써 언제 적 이야기냔 말이다. 그간 유사 터미네이터 스토리는 쏟아져 나올 대로 쏟아져 나왔고, 대게 이런 이야기에는 뻔 한 스토리라인이 있게 마련이고(많은 SF물들이 그것을 충실하게 답습하기도 했고) 우리는 그것에 익숙해 질대로 익숙해 지지 않았느냔 말이다. 강력한 로봇군대의 공격에 인간은 거의 멸망할 뻔 하지만 그래도 인간진영은 로봇이 가지지 못한 특유의 인간다움을 무기로 결국에는 승리하게 되겠지. 뭐 그 과정에서 어떤 감동적인 부분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감동이란 것도 사실 민망스러울 정도로 익숙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게 된 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이 책을 영화화하기로 했다는 광고 때문이었다. 아이작 마리온의 <웜 바디스>부터 시작해서 수잔 콜린스의 <헝거게임>시리즈라든지,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나 수전 힐의 <우먼 인 블랙>까지 영화의 원작이 되는 소설들이 많이 출간됐는데 그 중에서도 <로포포칼립스>는 단연 눈에 띄는 책이었다. 개인적으로 SF물(특히나 로봇이 나오는 전쟁물)을 좋아하진 않지만 궁금하기는 했었는데 좋은 기회에 읽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상당히 속도감 있게 읽히는 책이다.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음에도 재미있게 읽었다. 하지만 솔직히 기대했던 특별함 같은 것은 모르겠더라. 상상 그이상이라든지 하는 표현을 쓸 수 있는 책이길 바랐지만 그 정도의 작품은 아니었다.

 

 

이 책은 구성이 조금 독특한데, 시작부터 이미 결말을 오픈한다. 로봇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인간들은 이후 로봇들의 반란과 그 전쟁과정을 기록으로 남기는데 그것이 바로 이 책이라는 설정이다. 코맥 윌러스의 기록은 일종의 보고서 형식으로 전개되는데 색다른 느낌을 주는 동시에 여러 인물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여기 저기서 펼쳐져서 조금 산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뻔 할 수도 있는 이야기에 탄력을 주는 재미있는 구성이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오히려 조금 지루해지는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인류의 강력한 적인 슈퍼 안드로이드 아코스는 순식간에 인간 세계의 모든 시스템 체제를 장악하여 조종하고, 인간의 수족이던 최첨단 기술이 어느 시점을 기점으로 일제히 인간에게 등을 돌리고 끔찍한 인간 학살이 자행되는 가운데 거의 멸망의 위기를 겪던 인간들이 가까스로 연합하여 아코스에 대항하기 시작하는데. 인간과 인간은 아니지만 인간과 유사한 연합군과 무자비한 기계들의 대결은 확실히 볼만 했다. 그리고 꽤 치밀하게 다뤄지는 기계문명의 공격상은 섬뜩하기 까지 하다. 인간들의 일상에 깊이 관여하고 있던 친숙한 존재들(어쩌면 가족과도 같은)이 어느 날 갑자기 인간을 공격하기 시작하는데 인간은 그것은 오류 혹은 사고일 뿐이고 기계의 반란이라고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실 이 부분이야 날로 발전하는 기계문명을 사는 누구나 공감하는 불안이고 ‘어쩌면’ 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막연한 불안감이기 때문이라 오히려 클라이맥스 부분부도 더 긴장감 있게 읽히더라.

 

 

저자는 실제로 로봇공학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이고, 이런 소재의 픽션들을 여러 편 써 낸 이력이 있는지라 확실히 섬세하고 생동감 있는 묘사가 돋보였다. 큰 이야기줄기는 사실 식상하다고 얘기할 수도 있을 정도로 뻔 하지만 세세하게 내부를 들여다보면 또 새롭긴 하다. 사실 냉소적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몰입해서 읽게 됐으니 관심 없는 사람도 눈을 맞출 정도의 재미는 갖추고 있는 이야기란 소리다. 이야기의 스케일도 대단하고 자잘한 설정들도 재미있는 부분들이 많다. 이 책이 아주 특별하게 다가오진 않았지만 영화화 된다면 극장을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어떻게 영상화 될지 기대하게 만드는 그런 원작이다.

 

 

이건 쓸데없는 사족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책에서는 인류가 거의 멸망한 시점에서 인간의 쌓인 시체들을 양분(?)으로(물론 로봇들의 칼같은 관리 덕분일지도 모르겠으나) 훼손된 자연은 더욱 번성하게 된다는 설정이 있는데, 최근에 읽은 책에서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봤다. 요제프 H. 라이히홀프 라는 독일의 진화생물학자가 쓴 [자연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도서출판 이랑)이라는 책에서 “인류가 멸망하면 자연이 더욱 번성하게 될까?”라는 주제로 쓴 글이 있는데 이 책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인류와 자연의 관계에 대해서 상호가 대립적인 관계에 놓여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점이다. 사실 요제프 H. 라이히홀프 라는 학자도 학계에서 조금 파격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이라 그 사람의 이야기를 진화 생물학계의 공론이라고 얘기하기도 조금 뭣하지만 말이다. 인류가 멸망한 뒤의 일이야 예측해 볼 수 없지만 이 책의 설정들이 조금 식상한 부분들이 없지않아 있는데 이 부분도 조금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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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잔혹극]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활자 잔혹극
루스 렌들 지음, 이동윤 옮김 / 북스피어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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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유니스 파치먼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 이 책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문장이자 이 이야기의 요체이다. 그러니까 요는 한 가족이 살해되는 비극이 발생하는데 그 원인은 바로 유니스 파치먼이라는 사람이 문맹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그것이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째서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는지, 그러니까 누구를(혹은 무엇을) 비난해야 하는지 찾아내려고 열을 올린다. 하지만 어떤 사건이든 아주 자그마한 계기가 걷잡을 수 없는 큰불로 발화하기 까지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하기 마련이다. 어떤 필연과 그저 그런 수많은 우연히 공교롭게도 제대로 얽혀들어 버린 것일 뿐이다. 물론 주된 원인이란 있을 수 있으나 그 하나로 비극의 전말을 완벽히 설명해 낼 수는 없다. 어떤 일이든 그렇게 간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너무도 간단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이고 어쩌면 불편 일수도 있고 비극일지도 모를 문맹이 일가족 살해사건의 원인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을 풀어가는 과정이 정말 압권이다. 이미 문해인 사람들은 절대로 알지 못할 문맹의 독에 대해서 소름끼칠 정도로 치밀하고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커버데일 일가 살해사건, 범인은 중년의 가정부

 

커버데일 일가는 교양과 학식, 재산까지 두루 갖춘 집안이다. 딱히 누군가를 핍박하거나 부당하게 행동하지 않았고 악인들도 아니었다. 지역사회에 잘 섞여들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그들의 생활방식이 너무나 부유하고 도도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살해당할 만큼 부정한 짓을 하는 이들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잘못이 있다고 한다면 자세히 알아보지 않고 유니스 파치먼을 가정부로 들인 일과 그녀에게 어쭙잖은 관심을 표하게 한,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배웠고 더 많이 누리고 사는 이들 특유의 거만한 태도 정도일 것이다.

 

아마 커버데일 일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유니스 파치먼은 적어도 훗날 성 밸런타인데이 학살 사건이라고 불리게 되는 커버데일 일가 살해사건의 극악무도한 살해범 까지는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글을 읽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비밀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약점을 드러내지 않고 생활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고, 혼자 생활하기에 무리 없이 돈을 조달할 수 있었고(그것은 부적절한 방법이었지만 적어도 살인범 보다는 공갈협박범이 낮지 않을까?) 거처도 안정적이었다.

 

제한적이고 고립된 생활을 하던 유니스 파치먼이 돌연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부딪치며 새로운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일, 그녀에게 시달리던 친구(혹은 심복)가 그녀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커버데일 일가의 가정부 공고를 그녀에게 보여준 일, 유니스의 친구가 슬슬 그녀에게 벗어나고 싶어 했던 때에 커버데일 일가가 가정부를 모집하는 공고를 낸 일 그리고 유니스가 조앤을 만나게 된 일 이 모든 일은 지극히 우연이었다. 여기에 유니스의 비밀스러운 치부와 커버데일가의 위선적인 관심(나는 지나친 간섭 이라고 적고 싶다)이 절묘하게 엮여서 이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우리는 절대로 알지 못할 문맹의 독

 

커버데일 일가는 유니스에 대해서 선의를 갖고 있었다. 그것이 비록 주인이 충실하고 일 잘하는 하인에게 가지는 호감과 같은 것이었지만 어쨌든 그들은 유니스를 부당하게 대하지 않았다. 한 집에서 살았고 그들 가까이서 가정 일을 도와 온 유니스가 일가족을 무참하게 살해했다고 한다면 유니스의 정신적인 부분에 대해 의심할 것이다. 실제로 유니스는 타인에 대해서는 주방용품이나 카펫보다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그런 무정하고 차가운 사람으로 그려진다. 그녀의 이런 성향은 타인의 감정에 동조하지 못하고 진실한 소통이 불가능한 사이코패스 같이 비춰지기도 한다.

 

하지만 본인의 치부를 들킬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나 읽지 못하는 글이 사방에 널려 있는 집안에서 공포를 느끼는 모습이나 커버데일 일가에게 비밀을 들키고 나서 강한 수치심을 느끼는 부분, 조앤을 만나 알게 모르게 도움을 받고 교류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반응들을 본다면 지극히 감정적으로 온전한 사람이다.(사이코패스가 열등감이나 수치심이나 고마움 같은 감정을 느낄까?) 유니스가 사이코패스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은 그녀가 타인을 대할 때 지나치게 방어적인 모습을 보이며 제대로 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이는 유니스가 자신이 글을 읽지 못한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고 이런 사실을 남이 알게 되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녀가 인간관계에서 겪는 문제는 그녀가 문맹이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글을 읽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수치심을 갖고 있다면 어째서 도움을 청하지 않았을까, 왜 글을 배우려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다.(마치 커버데일 일가가 그녀의 치부를 알게 된 후 보였던 반응처럼 문해인 당신은 문맹인 유니스를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리라. 나 또한 그랬고) 하지만 그녀가 가진 문제는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 문제는 불우한 어린 시절과 암울했던 청춘시절을 거쳐 더욱 심화되었을 뿐이었다.

 

여튼, 문맹인 유니스는 그로 인해 인간관계에 대한 장애뿐만 아니라 감성적인 상상력이나 도덕적인 의식이 결여되는 등의 인격을 형성하는 데에도 문제를 겪었고 결국 그렇게 무감성 적이고 차가운 사람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그리는 문맹의 폐해는 상당히 심각한데,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은 역시 내가 이미 문해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덧붙여 단지 개인적인 불행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문맹이 본인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까지 해를 끼치는 적나라한 과정들은 소름이 끼치기까지 했다. 글을 읽는다는 어찌 보면 당연하고 사소해 보이는 보편적인 능력이 그것을 가지지 못한 사람을 알게 모르게 얼마나 지독한 고립상태로 몰고 가는지, 그리고 그 처참한 따돌림의 결말이 얼마나 끔찍할 수 있는지 읽어나가는 일은 불편한 일이었다.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첫 문장 부터가 충격이었고, 읽어 가면서도 내내 불편해졌던 책이다. 문맹이라는 것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그것은 이다지도 지독한 것일까? 사실 문맹이기 때문에 감성적인 상상력이나 윤리의식 같은 것이 제대로 성숙되지 못했다는 설명은 납득하기가 어려웠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첫 문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오랜 시간 동안 단절되고 고립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인격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수 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은 들었다. 그것이 더군다나 이 세상에 넘처나는 글자들로 부터의 나 홀로 단절이라면 어쩌면 정말 비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같은 이치로 오히려 문해이기 때문에 고립된 자일즈의 경우는 적어도 수치심이나 열등감 같은 것은 느끼지 않았다. 자일즈의 경우도 절대로 정상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그나마 그에게 문해는 치부가 아니었다. 어쩌면 문맹 자체는 문제가 아닐 지도 모른다. 문해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문맹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문해 중에는 커버데일 일가처럼 불편할 정도로 간섭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많으니 말이다.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참 지독한 이야기를 읽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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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레빌라 연애소동
미우라 시온 지음, 김주영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누군가 ‘왜 그랬느냐’고 물어본다면 조금 진땀을 뺄지도 모른다. 이유를 묻는 그 말은 추궁일 수도 있고 단순한 호기심을 수도 있다. 어쩌면 조금은 힐난하는 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왜’라고 물어봐 준다면 조금은 기쁠 것이다. 그 대답은 대게 옹졸한 자기변호(혹은 변명)이겠지만 그래도 상대방은 나를, 당신을 조금은 이해해 주겠다는 제스처를 취해 준 것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잘못을 하거나 일반적인 것과 조금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대게 사람들은 내게 왜 그랬느냐고 물었다. 나는 변명을 하기도 했고, 어쩔 수 없었음을 설명하기 위해 열을 냈었다. 그러면 상대방은 대게 ‘그랬구나. 다음부터는 이렇게 하자’라는 식의 대답을 들려주었다. 실수를 했건,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건 그런 나를 설명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런 기회를 준 이해심 있고 너그러운 상대방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그것을 깨닫게 된 것은 조금 이후의 일이었다, 애석하게도……. 요즘은 ‘왜’ 라고 묻는 사람들이 적다. 나는 조금 더 신중해 질 수 밖에 없다. 일반적인 것, 평범한 것의 정의는 날이 갈수록 애매해져 가는데 그나마 중간을 살기 위해 오늘도 용을 쓰고 있다.

 

 

젊은 여자가 애정 관계에 있는 두 남자와 동거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면 아마 사람들은 그녀의 행실에 대해서나 성품에 대해 비난할 것이다. 70대의 노인이 성욕이 동해서 섹스를 하기 위해 눈이 벌게져 있다면 노망났다고 수군거릴 것이다. 어쩌면 잠재적인 범죄자 취급을 당할 수도 있다. 전철역 기둥에서 하늘색 남근이 자라는 것이 보인다고 한다면 그날로 미친 여자 취급을 받을 것이며, 남편이 타주는 커피의 맛이 변했다고 남편의 외도를 의심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정신병원에 가보라고 할 것이다. 여대생의 방을 훔쳐보는 남자와 세 남자와 동시에 연애하는 방탕한 여대생, 그 여대생에게 어느 날 갑자기 생긴 핏덩이 아기의 이야기는 아침 드라마 소재로도 쓸 수 없을 만큼 막장이다. 음식에서 외도의 맛이나 거짓말의 맛이 난다고 말하는 여자는 관심병이 지나친 철이 덜 든 여자 취급을 받을 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니 이런 이야기들, 어딘가 낯익기도 하다. 어느 포털 사이트 대문이나 스포츠 뉴스에서 봤던 가십거리 뉴스의 내용 같기도 하다. A양 B군 같은 이니셜을 매단 그 기사들 말이다. 그런 기사들의 특징은 대게가 아주 간단명료하다는 것이다. 물을 표를 단 남녀의 실루엣 그림과 덧붙여진 기사는 대게 네다섯 줄, 딱딱하게 ‘평범’을 벗어난 인간들의 실체를 고발한다. 변명의 여지가 없이 고발당한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인민재판이란 냉소와 비난뿐이다. 사정을 전하는 후속기사 따위는 없다. 기자들마저도 ‘왜’를 궁금해 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 기사들은 눈에 띄고 자극적이기는 한데, 삭막하고 찝찝하다. OO구의 A군, △△시의 B양에게도 나름의 사정이라는 것이 있을 것인데 말이다. 그들의 변명을 들어줄 만큼 너그러운 사람들이 적은 까닥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참 따뜻하다. 민망하고 지극히 개인적이고 어쩌면 경멸해 마땅할 이야기인데 애정과 관심을 갖고 시종일관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이해해 주는 분위기가 기분 좋더라. 어떤 이들의 어떤 에피소드이지만 그것에 대해 판단하고 비꼰다거나 어떤 경각심을 준다거나 하는 꼰대 같은 꼬장꼬장함이 아닌, 온갖 추태를 다 부려도 받아주는 가족 같은, 오래 사귄 연인 같은 시선이 있었다. 제목은 고구레 빌라 연애소동이지만 실상 제대로 된 연애를 하고 있는 인물들은 없었는데, 다 읽고 나니 오히려 작가와 인물들 간의 연애담 같기도 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연애란 강한 스킨십이나 섹스를 동반하기는 하지만 그 이전에 감정적으로 서로의 모든 부분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겠다는 정신적인 합일이 이루어 져야 하는 것이니까(라고 쓰고 보니 상당히 연애에 대해 감상적인 사람이 된 거 같다.) 어쨌든 추궁이나 비난을 위한 ‘왜’가 아니라, 상대방을 진심으로 이해하기 위한 ‘왜’를 끊임없이 외치며 이상해져버린 상황에 놓인 인물들이 편안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도록 이끄는 작가의 편안함에 덩달아 풀어져서 편안히 읽었다.

 

 

새삼 느낀 것이지만, 우리는 대게 이성적으로 행동할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야 어찌됐든 말이다. 만약 조금 이상하게 보이거나 미친것 같더라도 한꺼플만 뜯어보면 전혀 이해 못할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있다면 그건 정말 미친 것이겠지) 다만 왜 그러느냐고 묻고 이유를 들어줄 사람이 적은 것 같다. 그냥 문득 도쿄에 있지만 도쿄와는 어울리지 않는 고구레 빌라와 그곳에서 복닥거리며 사는 따뜻한 사람들이 만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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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분 기적의 독서법 - 인생역전 책 읽기 프로젝트
김병완 지음 / 미다스북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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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3년 동안 1000권의 책을 읽는다?!

 

 

나는 중고등 학교 때 주로 지역 도서관 열람실을 다니며 공부를 했는데, 엉덩이에 쥐가 날 때쯤이면 도서관에 내려가서 서가에 꽂힌 책들을 구경하는 게 너무 좋았다. 도서관에 가면 딴 짓을 한다는 것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 이 책, 저 책 훑어보다가 한 권 집어 들고 나와서 그 책만 보다가 집에 갈 때도 많았다. 공부한다고 도시락에 문제집들을 잔뜩 싸가지고 가서는 문제는 안 풀고 엄한 책만 보다 와도, 공부를 안했다는 죄책감 보다는 뿌듯한 기분이 들었던 날들이었다.

 

우리 지역 도서관은 책 대여기간이 일주일이었는데, 책을 빌려와도 학교에서는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대게는 주말에 몰아서 읽었고 채 다 읽지도 못하고 반납하는 책들도 있었다. 왜 학교에서 책을 읽을 수 없었느냐고 한다면, 그 분위기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기는 좀 미묘하지만 참 그랬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 저녁 시간에 책을 읽으면 ‘공부 안하고 딴 짓 하는 아이’ ‘한가하게 놀고 있는 아이’라는 인식이 암암리에 있었다. 책은 여가시간에나 볼 수 있는 취미활동이고, 대게의 학생들에게는 여가시간이라는 것이 없었다. 내가 본격적으로 책 모으는데 열을 올리고 꾸준하게 책을 읽기 시작한 때는 ‘이제 좀 한가해 졌네’라는 생각을 하게 된 이후 부터였으니, 학생 때의 “독서=여가활동”이라는 인식이 꽤 깊이 박혔는지도 모르겠다.

 

참 이상한 일이다.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은 것 같은데, 정작 책 읽는 재미를 알고, 책과 소통하는 법을 배워야 했을 때에는 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다. 학교에서는 책을 읽는 아이를 볼 수 없었고, 우리는 일주일에 6일, 하루에 절반을 학교에서 보냈다. 요즘에야 종종 펼쳐보게 되는 청소년 필독 교양서(정말 잘 나와 있더라)를 보면 착잡한 기분이 든다. 그때는 왜 그렇게 정신없이 팍팍했나, 가끔은 정말 미스터리하다. 그 시절이 고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내가 좀 더 용기가 있었고 주관이라는 것을 갖고 있었더라면 학교를 쉬게 되더라도 한 일 년쯤은 책을 잔뜩 읽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한다. 어떤 목적 같은 것 없이 그냥 그러고 싶은 데로 읽고 싶고 궁금한 책을 읽는 것이다. 그랬다면 분명 지금의 나와는 또 다른 어떤 내가 되었겠지. 그 ‘다른 나’를 상상해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쉽다고 생각한다면 우스울까?

 

저자는 참 용감한 사람이다. 누구나 바라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한 셈이니 의지도 행동력도 대단하다.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조직생활에 메어 있는 자신에게서 어떤 미래나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고 뒹구는 낙엽같이 인생의 생기를 느낄 수가 없었단다. 그래서 10년이나 일했던 좋은 직장을 박차고 나와 일 년, 이년, 삼년 그렇게 꼬박 삼년을 책읽기에 몰두했다. 그것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비로소 기나긴 여정의 목적지에서 펄럭이는 깃발이 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흐릿하기만 했던 인생의 문제들이 명쾌해졌단다. 독서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 저자는 그것을 혁명이며 기적이라고 칭한다.

 

10년간 회사생활만 했고, 바쁜 회사생활에 책을 읽을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던 저자가 퇴사 이후 1년에 3천권의 책을 독파하는 독서가가 됐다. 그렇게 3년 동안 읽어낸 책은 대략 9천권, 하루에 열권의 책을 완독할 정도로 독서의 고수가 됐다. 그렇게 단기간동안 어마어마한 양의 책을 읽어내고 나니, 글쓰기에 대한 어떤 교육도 받지 않았던 사람이 어렵지 않게 책을 써 낼 수 있게 되었단다. 저자는 어느새『공부의 기쁨이란 무엇인가』,『48분 기적의 독서법』두 권의 책을 펴낸 작가가 되어 있었다. 이 외에 8권의 책이 이미 출간예정에 있고 현재는 15권의 책을 집필중이다. 단 3년의 독서로 일어난 기적이다. 그는 이제 평범한 샐러리맨이 아니라, 열권의 책을 출간할 어엿한 작가가 됐다.

 

어떻게 그런 변화가 가능했던 걸까? 그 치열했던 경험을 밝힌 책이 『48분 기적의 독서법』이다.

 

 

48분 기적의 독서법으로 3년간 1000권의 책을 읽는다!?

 

이 책의 요지는 단순하다. 딱 3년만 작심하고 어떤 책이든 마구잡이로 골라 아주 열정적으로 읽자는 것이다. 그냥 꾸준히 책을 읽는 데서 멈추지 않고, 정확한 목표를 잡고 읽는다. 왜 굳이 3년이냐고 한다면, 이것은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독서로 인한 의식의 임계점을 돌파하기 까지 드는 시간이 3년 정도 걸리기 때문이란다. 왜 1000권의 책을 읽어야 하냐면 이렇다. 결국은 짧은 시간동안 다독을 하자는 얘긴데 1000권 정도가 독서의 임계점에 해당하기 때문이란다. 1000권의 독서에 대한 이야기는 저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작가 이문열 또한 “1000권의 책을 읽으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어느 기사에 따르면 그 또한 3년 동안 1000권의 책을 읽고 작가가 되었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고. 작가는 되지 않더라도 독서로 내면의 획기적인 변화를 경험하고자 한다면 적어도 1000권은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48분 기적의 독서법 이라고 했다. 이렇게 하면 3년간 1000권의 책을 읽을 수 있단다. 왜 48분인가? 어떻게 48분의 독서로 3년 동안 1000권의 책을 읽어낼 수 있다는 말인가? 48분이라는 계산은 이렇게 나왔다. 일단, 우리의 수명을 90년으로 본다면, 90년 중 단 3년간의 집중 독서만으로도 인생을 반전시킬만한 성장을 이뤄낼 수 있다. 90년의 인생을 하루 24시간에 대입했을 때, 3년 이라는 시간은 얼마나 되는지 비례식으로 풀어보면 48분이 나온다. 48분이란 90년 평생의 3년만 빡시게 독서하자는 취지를 상징하는 시간이다. 이것을 오전, 오후에 각각 48분씩 독서한다고 계획을 잡고 3년간 꾸준히 독서하면 1000권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3년간 1000권의 책을 읽는다고 한다면 대략 하루에 한권을 읽는 셈이다.(물론 한꺼번에 여러 종류의 책을 읽는 다든지 하는 방법이 있지만 단순하게 평균적으로 셈하자면 그렇다.) 그러니까 결국 하루 100분 정도의 시간동안 집중해서 1권의 책을 읽자는 것이다.

 

책을 꾸준히 읽자는 것을 넘어서 정확한 목표치를 잡고 공격적으로 책을 읽자는 얘기다. 꾸준히 읽는 것도 어려운데 그것을 넘어서서 열정적으로 1000권을 읽잔다. 일 년에 100권 읽기도 힘든데 조금 무리한 이야기 같이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만큼의 노력을 들일 가치가 있다는 설명이다. 세계적인 위인들이나 성공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요소가 책읽기를 좋아한다는 것인데, 이들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 중에는 단시간의 집중 독서 경험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에디슨, 워렌 버핏, 마오쩌뚱, 교보의 신용호 회장, 김대중 전 대통령, 작가 니카타니 아키히로, 시골의사 박경철 등 성공한 삶을 살거나 존경받는 인물들은 대게 단기간의 어마어마한 양의 책을 독파해 낸 경험이 있다. 저자 또한 단기간 집중 독서의 기적을 경험한 사람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고 선뜻 도전할 엄두조차 안 나는 어마어마한 목표지만 달성하고 난다면 분명 무언가 위대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의 일화에서 알 수 있다.

 

가끔은 이상이 꺾인 현실에 좌절하고,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그저 그런 생활에 던져진 자신이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일 때가 있을 것이다. 일상 이라는 것의 구속력은 그 범위도, 위력도 매우 넓고 대단히 위력적인 것이어서 일탈할 수 없을 것만 같이 보일 때가 있다. 그렇게 희망도 없어 보이고 미래도 뭉개져 버린 것처럼 느껴질 때, 그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오로지 독서뿐이다. 독서만큼 쉽고 싸고 간편하게 나를 성장시키는 것은 없다. 변화를 바라는 사람은, 성공을 바라는 사람은 한번 도전해 봐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증명된 기적이니 좀 더 과감해져도 괜찮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나는 훌륭한 독자는 아닌가 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달변에 절로 감탄하게 될 것이다. 글쓰기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글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 나간다. 사실, 저자의 주장은 자못 파격적이다. 제목부터 해서 자극적인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본인이 단기간의 집중 독서로 엄청난 변화를 경험했고, 그로 인해 인생이 바뀌었으니 그 스스로가 무엇보다도 확실한 증거다. 그의 주장이 허황되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이런 자기계발서를 보면 의욕적으로 실천해 보고자 하는 마음이 들어야 할 텐데 그러기엔 조금 무리가 있다. 일단은 48분이라는 숫자에 함정이 있다. 제목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 “48분 기적의 독서법”이다. 제목만 봐서는 48분 동안 독서하는 독서법으로 읽히기 쉬워 자칫 속독법에 대해 이야기 하는 책으로 비춰지기 쉽다. 하지만 이 48분이라는 것은 상징적인 숫자다. 저자가 밝히는 것과 같이, 평균 수명과 집중 독서에 빠져보길 권하는 기간을 하루 동안에 독서시간으로 비례식 계산을 하여 나온 것이 48분이다. 이 수학공식은 공식을 그대로 해석하자면, ‘90년 일생 중에 3년의 시간동안 독서 한다는 것은, 하루를 산다고 치면 24시간 중 고작 48분 동안 독서하는 것이다’ 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48분이란 90년 중의 3년을 뜻하는 상징적인 숫자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3년 동안 하루 48분씩(오전, 오후 두 번 이라는 조건이 붙는다) 독서한다는 규칙이 생겨나 버린다. 48분이라는 것은 분명 혼동의 여지가 있다.

 

간명하게 말하자면, 하루에 100분씩 3년간 독서해서 1000권을 읽자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단행본의 페이지수가 300페이지 정도 된다고 하면, 1분에 3쪽을 읽는 셈이다. 물론 책에 따라서, 개인의 독서역량에 따라서 1권(만화나 잡지가 아닌 단행본이라고 했을 때)을 독파하는데 까지 짧게는 한 시간, 길게는 며칠이 걸리는 만큼 그 편차는 크다. 물론 책을 읽는 시간이라는 것은 독서훈련(독서 행위 자체가 텍스트를 읽는 훈련이지만)을 통해 단축해 나갈 수 있다. 그리고 3년에 1000권이니 하루에 한권을 읽는다는 계산도 단순한 사칙연산일 뿐이다. 저자 또한 처음 독서를 시작했을 때는 1권을 읽는데 며칠이 걸렸고, 그렇게 점차 책 읽는 속도가 붙고 하루에 여러 권을 읽을 수 있게 될 정도가 됐다고 했다. 하지만 하루에 독서시간으로 100분씩 3년을 투자하는 것과, 하루 활동하는 대부분의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내는 3년은 분명 다르다. 하루 100분 투자로는 독서력이 저자처럼 비약적으로 향상될 것이라고 기대하기 힘들다.

 

(이 단락은 개인적인 생각이 강한 부분이니, 이 책의 서평에서 빼고 읽어도 좋다.) 솔직히 밝히자면, 이 부분에 열폭하는 이유가 있다. 나는 매일 책을 읽는다고 읽는 편이지만, 한권을 다 읽는데 아무리 빨라도 3시간은 걸려야 한다. 그래도 3시간 쯤은 어떻게든 만들어 낼 수 있겠지 하며 매일 한권씩 읽으리라 다짐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집중하려고 해도 매일 1권을 읽는 것은 상당한 시간과 부담을 요하는 일이었다. 물론, 쉽게 얻어지는 것은 없다. 집중 독서의 효과는 이미 검증된 것이나 다름없고 도전해 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하루 100분만 투자한다고 해서 될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러니, 기적을 경험하고 싶어도 선뜻 도전할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이다.

 

물론 저자는 3년간 1000권의 독서라는 무시무시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선배로써 팁을 남겼다. 시간을 활용하는 방법과 효과적인 독서법이 그것인데, 내가 이 책에서 가장 기대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당장 실천해 봐야 겠다고 메모한 시간 관리법과 참고할 만한 독서법이 있었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을 소개할 뿐, 자신에게 맞는 독서법은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는 충고도 새겨들었다. 개인적으로 독서에 소요되는 시간이나 집중하는 시간, 책 읽는 시간을 마련하는 것 등에 고민하던 부분이 있던 차여서 도움이 됐다. 하지만 독서법에 대해서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3년 동안 1000권의 책을 읽어 내려면 독서시간을 조절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이다. 이에 저자는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 독서법에 대해 몇 가지를 소개했다. 일단은 몰입독서법과 이미지 독서법이다. 이 방법을 말하자면 속독을 하는 법이다. 몰입에 빠져들면 글자를 더욱 빨리 읽을 수 있고, 한 글자 한 글자씩 읽는 것이 아니라 한 문장을, 단락을, 페이지를 이미지화해서 읽을 수 있다면 책장이 아기 오리의 솜털보다도 가벼워질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상당한 훈련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속독을 가르치는 학원도 있다고 알고 있다. 이미지 독서법 같은 경우는 일반 사람이 쉬이 깨우칠 수 있는 것이 아닌데다가, 하루 100분(50분씩 나누어 읽는다고 가정한다)동안 책을 읽는데 몰입에 빠져드는 시간 또한 한정적이다. 몰입의 시간을 늘려가기 위해서는 오전, 오후 50분의 시간은 너무 짧다. 물론 훈련을 하면 되는 것이지만 당장 유용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 다음, 다음에 소개된 것이 포인트 독서법 이라는 것인데, 이는 독서의 양을 늘리면서도 시간은 단축할 수 있는 방법으로 소개된 것이다.

 

한 권의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핵심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실하게 통독을 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지금처럼 유사한 주제의 도서가 많은 시대에는 각각의 책이 주장하는 핵심을 찾아내고, 그 핵심 내용을 위주로 독서하면 더 효율적이다. (중략) 사람들이 핵심을 꿰뚫는 효율적인 독서를 하지 못하는 이유로 불필요한 파생적인 책읽기를 들 수 있다. 책의 핵심만 정확히 꿰뚫어 읽으면 내용의 80%를 이해하는 것은 물론, 저자와 충분히 소통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책의 핵심을 찾아내지 못하면 저자가 핵심을 말하기 위해 집필한 파생적인 부분을 읽어야 한다. 따라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물론 책의 핵심에는 접근도 하지 못하게 된다. - 241쪽 

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통독하지 않은 책을 ‘읽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범인과 트릭을 알았다고 그 추리소설을 읽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고전 명작 소설들의 줄거리를 알고 있지만, 그 사람들이 그 책을 진정 읽었다고 볼 수 있나? 논문 다이제스트 판을 읽었다고 해서 그 논문을 읽었다고 볼 수 있을까?

 

잠시 딴 얘기를 하자면, 나는 경제학도는 아니지만 경제학 수업을 수강했었다. 교양수업으로 개설된 수업이어서 그 수업을 듣는 사람들은 대게 경제학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경제학과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경제학박사였다. 전공자가 비전공자를 가르치려니 교재 선정부터 고민이 많으셨는데, 고민 끝에 결정된 교재는 『맨큐의 핵심경제학』이었다. 이 책은 경제학의 고전인 『맨큐의 경제학』 다이제스트 판이다. 후에 도서관에서 거의 무기 수준의 몸체를 자랑하는『맨큐의 경제학』을 구경하게 됐는데, 퍼뜩 이런 생각이 들더라. ‘아, 나는 맨큐의 경제학을 공부한 것이 아니라, 맨큐의 핵심 경제학을 공부한 것이구나.’ 내용의 깊이 면에서 두 책은 확실히 달랐다. 핵심만 본다는 것은 자칫 편리해 보이지만 어쩌면 반도 제대로 못 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핵심만 읽어낼 수 있을까? 『논어』나 『맹자』의 핵심만 읽어낼 수 있을까? 버트란트 러셀의 『서양 철학사』를 다이제스트로 읽는 것이 과연 효율적인 책읽기일까? 사마천의 『사기』같은 책은 어떨까? 물론 핵심만 읽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한 책도 있다. 자기 계발서 같은 경우는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부분의 책에서 핵심을 찾아 읽는다는 것은 무의미하거나 상당히 위험하다. 한 권의 책에서 읽지 않아도 될 불필요한 내용이 있다고는 생각해 본적이 없다. 머리말에서부터 각주하나, 미주하나, 참고도서 목록이나 번역서라면 역자의 후기 같은 글들도 모두 그 책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 책은 분명 저자가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더 명확하고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편집자와 끊임없이 연구하고 구성하고 교정해서 완성된 책일 것이므로.

 

 

마지막으로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다. 이 책은 저자의 경험에서부터 출발한 책이다. 독서로 인해 더욱 성장했고, 내면적으로도 가히 혁명이라 칭할 만한 변화를 겪은, 평범한 샐러리맨에서 이제는 어엿한 작가로 데뷔한 저자의 엄청난 경험담이 발단이 된 책이다. 그런데, 그런 자랑스러운 배경이 있는 책인데 비해 저자의 내면의 이야기나 생생한 경험담이 적다. 에디슨이나 마오쩌뚱 같이 숨 쉬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워렌 버핏처럼 너무 먼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책 읽기가 여의치 않고, 그것으로 무언가 변화를 꾀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해 본 적이 없었던 우리와 가까웠던 저자의 이야기가 많았더라면, 이 책이 더 와 닿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저런 위인들보다, 대단한 사업가들 보다 저자가 더욱 존경스러웠다. 저자에 대해 알고 싶었고, 공감하고 싶었고, 솔직한 얘기를 듣고 싶었다. 저자의 다음 책에서는 그런 얘기를 들을 수 있을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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웜 바디스 블랙 로맨스 클럽
아이작 마리온 지음, 박효정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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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저자인 아이작 마리온의 개인 홈페이지에서 연재되던 소설이다. 저자가 직접 좀비를 연기한 북트레일러를 제작해 배포했는데, 그것이 엄청난 반응을 얻으면서 화제가 됐다. 게다가 책으로 출간되기도 전에 영화 트와일라잇의 제작사인 서밋 엔터테닝먼트와 영화계약을 따내기도 했다.(올 여름에 개봉될 예정이라고) 좀비와 인간 소녀라는 먹이사슬 관계에 있는 이종족 간의 로맨스물이라는 점에서 세계적으로 히트를 친(공교롭게도 영화 제작자가 같다) 트와일라잇 시리즈를 연상시킨다. 그래서 더욱 그랬다. 솔직히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대성공 이후로 쏟아져 나온 수많은 판타지 로맨스들과 비슷한, 로맨스 소설계의 일종의 유행에 편승하는 작품일 거라는 편견도 있었다.

 

펼쳐보기 전에 그 책에 대해 논하지 말라고 했던가. 남자 주인공이 좀비라는 설정 자체가 파격이긴 하지만 이렇게 무리한 설정을 거부감 없이 이어가려면 좀 더 세심한 무언가가 있어야 했다. 그러니까 최소한 주인공 좀비는 덜 혐오스러워야 하고, 시체와 인간 여주인공과의 관계가 부자연스럽지 않을 정도로 매력적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꾸며야 좀비가 멋있어 질 수 있겠느냐 말이다. 이 부담스러운 설정을 작가가 어떻게 납득시킬 것이냐 하는 호기심에 차근차근 읽어나갔다. 이야기는 생각 외로 전형적인 로맨스 물은 아니었고, 오히려 간혹 좀비 호러물이나 SF소설을 읽는 것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좀비가 어느 정도의 사고능력을 가지고 있고, 무리를 짓거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양육하는 등의 사회성도 있으며, 잊어버린 생전의 이름과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고차원적인 고민을 할 줄 안다는 설정이 기괴하지만 로맨스가 있는 이야기를 가능하게 했다.

 

 

이런 점이 좋았다.

 

저자의 인터뷰에 따르면, 저자는 애초에 로맨스 소설을 쓸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해괴한 이야기는 단순한 의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만약에 좀비가 생각할 수 있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어떻게 세상을 바라볼까?’ 하는 것이다. 그간에 좀비를 소재로 한 영화나 소설들을 보면, 이런 의문을 가져본 사람은 드물었던 것 같다. 좀비라고 하는 것의 이미지는(비록 그것이 헐리웃 호러영화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일 지언즉) 의식은 없고 오로지 본능(그 중에서도 식욕)만 남아서 사지가 운신하지 못할 때까지 움직이는 시체다. 생각하고 감상에 젖는 것은 오직 살아있는 인간만이 누리는 호사라서 이미 죽어버린 시체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특권 아닌 특권을 작가는 시체에게 부여한다.

 

사고력이 있는 좀비들은 본능에 따라 인간을 사냥하고 식인 하지만, 본인이 한때 인간이었다는 자각이 있다. 또한 식인 행위로 잠시나마 식량이 된 인간의 생각과 감정을 느낄 수 있는데(좀비들이 유독 인간사냥을 즐기는 것은 인육-특히 뇌-을 먹음으로써 죽은 몸으로 살아있는 인간의 경험과 감정을 되새기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는 설정이다), 그로 인해 좀비 주인공인 R은 엄청난 혼란과 내적 갈등을 겪게 된다. R이 괴로워하면 할수록 독자는 점점 더 흥미진진해 지는 것이다.

 

게다가 이 재미있는 설정은 R이 인간 소녀인 줄리를 식욕의 대상이 아닌 지켜주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게 되는데 까지 어느 정도의 당위성을 부여한다. 설명하지 못할 강한 이끌림이라던 지, 운명적 사랑이라던 지, 첫눈에 반했다던 지(좀비와 인간 사이에 이건 너무 말이 안 되지만) 하는 시시껄렁하고 구태의연한 이유가 아니라서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 그나마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정체 모를 재앙으로 죽은 사람들이 되살아나 인간과 좀비가 생존을 위해 대치하는 삭막한 세상에서, R이 가진 줄리에 대한 보호본능은 점점 특별한 감정으로 자라나게 된다. 하지만 좀비무리와 인간진영이 철저하게 대립하고 있는 시절이니 이들의 특별한 감정이 평탄하게 이어질리 만무하다. 서로를 위해서라도 둘은 함께 있으면 안 되는 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하튼, 부패가 덜 진행된 잘생긴 좀비청년과 당돌한 소녀 줄리의 이야기는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이어진다. 뱃속이 간질간질해 지는 잔 떨림은 없었지만 이정도면 나름 파격적이지 않나 싶다. 그들의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그 배경이 되는 세기말의 분위기도 나름 쏠쏠한 재미를 준다. 어째서 사람들이 좀비가 되어 버리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소개되지 않지만, 이 세상의 끝이 머지않았음을 암시하는 듯 한 그런 삭막하고 공허한 분위기 때문인지 좀비의 존재가 어색함이 없었다. 어디선가, 정말 세상이 멸망해 버린다면 그것은 소행성의 충돌 따위의 이유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생화학 재앙일 가능성이 클 것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때문인지 어쩐지. 일 이년 뒤에 나의 피부가 회색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농담처럼 내뱉는 스타디움 사람들의 생활모습은 묘하게 현실적이어서 뜨악했고, 뇌가 썩으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해 정말로 죽음을 맞게 되는 좀비세계에 쪼그라든 뇌와 뼈만 남아 기이한 의식을 되풀이 하는 보니라는 존재는 퍽 기발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부분은 글쎄…….

 

남자 주인공이 좀비인 것만 제하면 다소 뻔한 내용이지 않겠느냐 하는 편견을 갖고 책을 봐서 그런지, 로맨스 소설이면서 한편으로는 로맨스 소설이 아닌 실체가 의외여서 인지, 실망하거나 코웃음 쳤던 부분은 없었다. 오히려 적나라한 식인장면이나 격투신 묘사에 가끔은 눈을 찡긋 거리고 의외의 부분에서 등장하는 예상치 못한 철학적인 문장들에 탄성을 지르기도 했다. 좀비인 R의 시선에서 그려지는 좀비들의 생태에 관해서나, 본인의 이름조차 모르면서 끊임없이 생전의 기억을 더듬는 진지함이 멋있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조금 웃기기도 하더라.

 

하지만 이런 낯설고 이질적인 설정에 납득을 하고 적응이 되고 난 뒤의 전개는 조금 아쉽다. 책 소개를 보니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 평을 했더라. 기괴하긴 하지만 그보다 더 딱 들어맞는 소개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남자 주인공이 인간이 아닌 판타지 로맨스 물에서 보이는 갈등요소들이 이 책에서도 반복되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기본적으로 그런 관계라면 어쩔 수 없이 맞닥들이게 되는 위기와 갈등이겠지만은, 예상이 되는 전개는 아무래도 기운이 빠져버린다. 다만 이 책은 좀 스펙터클한 부분이 있었다는 것이 위안이랄까. 하기야, 좀비가 남자 주인공인데!

 

┃영화 <웜 바디스>에서 R과 줄리를 연기하는

니콜라스 홀트와 테레사 팔머

 

평하자면, 이 책은 첫 장부터 파격적이었고 뒤로 가면서 조금 평범해 졌지만 결말 부분에서는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기괴하고 생소하지만 로맨스적이며 한편으로 철학적인 책이다. 영화화 될 때 이 복잡하고 심오한 R의 생각들이 스크린에 얼마나 진득하게 담겨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영상화 한다면 볼거리는 많을 것이나 그렇게 화려한 면만 쫓아가지 않기를. 어쩌면 속편이 나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정말 그럴까? 개인적인 바람 일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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