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웜 바디스 ㅣ 블랙 로맨스 클럽
아이작 마리온 지음, 박효정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12월
평점 :

이 이야기는 저자인 아이작 마리온의 개인 홈페이지에서 연재되던 소설이다. 저자가 직접 좀비를 연기한 북트레일러를 제작해 배포했는데, 그것이 엄청난 반응을 얻으면서 화제가 됐다. 게다가 책으로 출간되기도 전에 영화 트와일라잇의 제작사인 서밋 엔터테닝먼트와 영화계약을 따내기도 했다.(올 여름에 개봉될 예정이라고) 좀비와 인간 소녀라는 먹이사슬 관계에 있는 이종족 간의 로맨스물이라는 점에서 세계적으로 히트를 친(공교롭게도 영화 제작자가 같다) 트와일라잇 시리즈를 연상시킨다. 그래서 더욱 그랬다. 솔직히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대성공 이후로 쏟아져 나온 수많은 판타지 로맨스들과 비슷한, 로맨스 소설계의 일종의 유행에 편승하는 작품일 거라는 편견도 있었다.
펼쳐보기 전에 그 책에 대해 논하지 말라고 했던가. 남자 주인공이 좀비라는 설정 자체가 파격이긴 하지만 이렇게 무리한 설정을 거부감 없이 이어가려면 좀 더 세심한 무언가가 있어야 했다. 그러니까 최소한 주인공 좀비는 덜 혐오스러워야 하고, 시체와 인간 여주인공과의 관계가 부자연스럽지 않을 정도로 매력적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꾸며야 좀비가 멋있어 질 수 있겠느냐 말이다. 이 부담스러운 설정을 작가가 어떻게 납득시킬 것이냐 하는 호기심에 차근차근 읽어나갔다. 이야기는 생각 외로 전형적인 로맨스 물은 아니었고, 오히려 간혹 좀비 호러물이나 SF소설을 읽는 것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좀비가 어느 정도의 사고능력을 가지고 있고, 무리를 짓거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양육하는 등의 사회성도 있으며, 잊어버린 생전의 이름과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고차원적인 고민을 할 줄 안다는 설정이 기괴하지만 로맨스가 있는 이야기를 가능하게 했다.
이런 점이 좋았다.
저자의 인터뷰에 따르면, 저자는 애초에 로맨스 소설을 쓸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해괴한 이야기는 단순한 의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만약에 좀비가 생각할 수 있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어떻게 세상을 바라볼까?’ 하는 것이다. 그간에 좀비를 소재로 한 영화나 소설들을 보면, 이런 의문을 가져본 사람은 드물었던 것 같다. 좀비라고 하는 것의 이미지는(비록 그것이 헐리웃 호러영화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일 지언즉) 의식은 없고 오로지 본능(그 중에서도 식욕)만 남아서 사지가 운신하지 못할 때까지 움직이는 시체다. 생각하고 감상에 젖는 것은 오직 살아있는 인간만이 누리는 호사라서 이미 죽어버린 시체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특권 아닌 특권을 작가는 시체에게 부여한다.
사고력이 있는 좀비들은 본능에 따라 인간을 사냥하고 식인 하지만, 본인이 한때 인간이었다는 자각이 있다. 또한 식인 행위로 잠시나마 식량이 된 인간의 생각과 감정을 느낄 수 있는데(좀비들이 유독 인간사냥을 즐기는 것은 인육-특히 뇌-을 먹음으로써 죽은 몸으로 살아있는 인간의 경험과 감정을 되새기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는 설정이다), 그로 인해 좀비 주인공인 R은 엄청난 혼란과 내적 갈등을 겪게 된다. R이 괴로워하면 할수록 독자는 점점 더 흥미진진해 지는 것이다.
게다가 이 재미있는 설정은 R이 인간 소녀인 줄리를 식욕의 대상이 아닌 지켜주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게 되는데 까지 어느 정도의 당위성을 부여한다. 설명하지 못할 강한 이끌림이라던 지, 운명적 사랑이라던 지, 첫눈에 반했다던 지(좀비와 인간 사이에 이건 너무 말이 안 되지만) 하는 시시껄렁하고 구태의연한 이유가 아니라서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 그나마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정체 모를 재앙으로 죽은 사람들이 되살아나 인간과 좀비가 생존을 위해 대치하는 삭막한 세상에서, R이 가진 줄리에 대한 보호본능은 점점 특별한 감정으로 자라나게 된다. 하지만 좀비무리와 인간진영이 철저하게 대립하고 있는 시절이니 이들의 특별한 감정이 평탄하게 이어질리 만무하다. 서로를 위해서라도 둘은 함께 있으면 안 되는 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하튼, 부패가 덜 진행된 잘생긴 좀비청년과 당돌한 소녀 줄리의 이야기는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이어진다. 뱃속이 간질간질해 지는 잔 떨림은 없었지만 이정도면 나름 파격적이지 않나 싶다. 그들의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그 배경이 되는 세기말의 분위기도 나름 쏠쏠한 재미를 준다. 어째서 사람들이 좀비가 되어 버리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소개되지 않지만, 이 세상의 끝이 머지않았음을 암시하는 듯 한 그런 삭막하고 공허한 분위기 때문인지 좀비의 존재가 어색함이 없었다. 어디선가, 정말 세상이 멸망해 버린다면 그것은 소행성의 충돌 따위의 이유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생화학 재앙일 가능성이 클 것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때문인지 어쩐지. 일 이년 뒤에 나의 피부가 회색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농담처럼 내뱉는 스타디움 사람들의 생활모습은 묘하게 현실적이어서 뜨악했고, 뇌가 썩으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해 정말로 죽음을 맞게 되는 좀비세계에 쪼그라든 뇌와 뼈만 남아 기이한 의식을 되풀이 하는 보니라는 존재는 퍽 기발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부분은 글쎄…….
남자 주인공이 좀비인 것만 제하면 다소 뻔한 내용이지 않겠느냐 하는 편견을 갖고 책을 봐서 그런지, 로맨스 소설이면서 한편으로는 로맨스 소설이 아닌 실체가 의외여서 인지, 실망하거나 코웃음 쳤던 부분은 없었다. 오히려 적나라한 식인장면이나 격투신 묘사에 가끔은 눈을 찡긋 거리고 의외의 부분에서 등장하는 예상치 못한 철학적인 문장들에 탄성을 지르기도 했다. 좀비인 R의 시선에서 그려지는 좀비들의 생태에 관해서나, 본인의 이름조차 모르면서 끊임없이 생전의 기억을 더듬는 진지함이 멋있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조금 웃기기도 하더라.
하지만 이런 낯설고 이질적인 설정에 납득을 하고 적응이 되고 난 뒤의 전개는 조금 아쉽다. 책 소개를 보니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 평을 했더라. 기괴하긴 하지만 그보다 더 딱 들어맞는 소개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남자 주인공이 인간이 아닌 판타지 로맨스 물에서 보이는 갈등요소들이 이 책에서도 반복되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기본적으로 그런 관계라면 어쩔 수 없이 맞닥들이게 되는 위기와 갈등이겠지만은, 예상이 되는 전개는 아무래도 기운이 빠져버린다. 다만 이 책은 좀 스펙터클한 부분이 있었다는 것이 위안이랄까. 하기야, 좀비가 남자 주인공인데!

┃영화 <웜 바디스>에서 R과 줄리를 연기하는
니콜라스 홀트와 테레사 팔머
총평하자면, 이 책은 첫 장부터 파격적이었고 뒤로 가면서 조금 평범해 졌지만 결말 부분에서는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기괴하고 생소하지만 로맨스적이며 한편으로 철학적인 책이다. 영화화 될 때 이 복잡하고 심오한 R의 생각들이 스크린에 얼마나 진득하게 담겨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영상화 한다면 볼거리는 많을 것이나 그렇게 화려한 면만 쫓아가지 않기를. 어쩌면 속편이 나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정말 그럴까? 개인적인 바람 일 수도 있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