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 부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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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나은 자본주의를 촉구한다 

『그들이 말하지않는 23가지』

장하준 지음, 김희정ㆍ안세민 옮김, 부키, 2010 

스탈린이 루스벨트에게 미국 근로자의 평균 임금이 얼마냐고 물었다. "아마 한 달에 300달러쯤 될 겁니다." "그럼 생활비는 얼마나 필요합니까?" "대충 200달러쯤 들겠지요." "그럼 100달러가 남는데 어디 사용합니까?" "그건 그가 알아서 할 일이지 내가 알 바가 아닙니다." 이번엔 루스벨트가 물었다. "러시아 근로자들의 평균 임금은 얼마입니까?" "한 달에 한 800루블이 될 겁니다." "그럼 생활비로 나가는 돈은 얼마가 됩니까?" "1000루블입니다." "그럼 한 달에 200루블이 더 있어야 살아가겠군요. 그 돈은 어떻게 마련합니까?" "그건 그가 알아서 할 일이지 내가 알 바가 아닙니다." 이 책에도 비슷한 유머가 등장한다. 1980년대 공산주의 체제가 와해되기 시작할 무렵에는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중앙 계획 시스템에 대한 냉소주의가 만연해서, "우리는 일을 하는 척하고 그들은 보수를 주는 척한다."라는 우스개가 공산주의 국가들에 유행할 정도였다.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를 상징하는 이야기로 봐도 무방할 듯 하다.

그런데 이러한 자본주의의 신화가 대공황과 금융위기를 겪으며 깨지기 시작했다. 세계 경제는 만신창이가 되었고 여기저기서 자본주의가 삐끄덕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1929년 대공황에 이어 역사상 두 번째 경제 위기라 할 수 있는 2008년 금융 위기는 자칫 세계 경제의 완전한 붕괴로 이어질뻔 할 정도로 그 규모가 컸다. 이 재앙은 정확히 따지고 보면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의 문제가 아니고, 지난 30여년간 자본주의 세계를 지배해 온 신자유주의로 통칭돼온 자유시장 자본주의와 그 이데올로기에 그 원인이 있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에 대해 승리한 것이지 그 자체가 완전한 체제가 아니었음이 증명된 것이다.

『그들이 말하지않는 23가지』는 자유 시장주의자들이 말해 주지 않는 자본주의에 관한 여러 가지 중요한 진실들을 이야기한다. 23가지 키워드로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비판하며 자본주의가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고, 어떻게 하면 더 잘 돌아가게 할 수 있을지를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쓴 책이다. 저자인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박사 학위도 받기 전인 1990년, 27세 나이에 한국인 최초의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3년에 신고전학파 경제학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 경제학자에게 주는 뮈르달 상을, 2005년에는 경제학의 지평을 넓힌 경제학자에게 주는 레온티예프 상을 최연소로 수상함으로써 세계적인 경제학자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기존의 좌파, 우파 이념에 교조적으로 얽매이지 않는다. 좌파와 우파 양쪽으로부터 골고루 지지를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느쪽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동안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뒷받침하는 주류 경제학의 통설을 여지없이 깨뜨리는 도발적인 문제제기로 내는 책마다 국내외의 주목을 받아왔다. 영국의 가디언紙가 최근 사설을 통해 "노동당은 장하준 교수에게 배워라"고 썼을 정도로 이번 책 역시 영국 언론에서 먼저 화제가 됐다. 가디언이 전통적으로 좌파 경향을 띤다는 점을 감안해도, 주류 경제학의 진원지인 영국에서 비주류 경제학파 교수에게 큰 관심을 보인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저자는 그동안 <사다리 걷어차기> <나쁜 사마리아인들> 등의 이전 책들을 통해 신 자유주의를 집요하게 비판해 왔다. 이 책에서도 '자유 시장이라는 것은 없다'라는 다소 도발적인 주장을 첫 번째로 내세우며 신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다. "자유시장 정책으로 부자가 된 나라는 거의 없다"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든다고 우리 모두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계획경제 속에서 살고 있다"라는 다양한 테제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와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라는 항목을 대비시키는 방식을 통해 '워싱턴 컨센서스'가 상징하는 미국식 신 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그의 부정은 '다른 자본주의' '더 나은 세상'의 가능성을 설파하기 위한 것으로 '시장 자유주의가 최선'이라는 경제학의 오랜 믿음속에 감춰진 이면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또 "인터넷보다 세탁기가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 "우리는 탈산업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금융 시장은 보다 덜 효율적일 필요가 있다" 등의 흥미로운 주장을 통해 지금까지 대부분 사람들이 친숙하게 품고 있던 통념과 상식을 여지없이 깨뜨린다. 저자의 이런 주장들은 그의 전작들을 읽어온 독자들에겐 그리 낯설지 않다. 그렇다고 동어반복은 아니다. 주장은 더 단호해졌고 논리는 한층 정교해 졌다. 거기다 다양하고 풍부한 비유와 사례가 설득력을 높인다. 경제학자를 넘어서 '문장가 장하준'을 기대하기에 충분한 대목이다. 저자는 이 책 말고도 여러 지면을 통해 기회 있을때마다 제조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곤 한다. 지난 10월 서울에서 열린 이 책의 출판 관련 기자 간담회에서도 어김없이 제조업 문제를 거론하며 "현 정권이나 지난 정권이나 마찬가지인데, 제조업 버리고 금융업 쪽으로 가서 쉽게 돈벌려는 생각을 자꾸 하는 것이 제일 걱정된다"며 제조업을 제발 소홀히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전자나 조선 등에서 1등 하니까 대단한 것 같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제조업 생산성이 구미의 40〜50%에 불과한 현실이다.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정보통신이나 금융쪽에만 마음이 팔려 이제는 '구닥다리' 제조업은 필요 없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진 정책당국자가 있다면 귀담아 들어야 할 고언이다. (실제로 지난 금융위기 직전에 리먼브라더스가 봉 잡으려고 망하는 회사를 한국에 팔려고 했다. 그 때 만약 산업은행이 샀으면 나라가 거덜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저자는 세계 경제를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 하는 물음을 던지며 경제 시스템을 재설계하면서 명심해야 할 8가지 원칙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1.문제는 자유 시장 자본주의이지 모든 종류의 자본주의가 나쁜 경제시스템은 아니다. 자본주의 경제를 제대로 운용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규제가 필요하다. 2.인간의 합리성엔 한계가 있다는 걸 인정하라. 3.이기심이 인간행동의 유일한 동기는 아니다. 인간의 좋은 면을 발휘하게 하는 경제 시스템을 건설해야 한다. 4.기회의 평등만이 아니라 결과의 평등도 어느 정도까지는 보장해야 한다. 5.제조업은 여전히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걸 잊지마라. 6.금융 부문과 실물 부문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 7.더 크고 더 적극적인 정부가 필요하다. 8.개발도상국들을 '불공평'하단 소리를 들을 정도로 우대하라.

저자는 결론으로 이렇게 말한다. "이상 언급한 여덟 가지 원칙은 모두 지난 30년 동안의 경제적 통념들과 직접적으로 배치되는 것들이다. 따라서 독자들 중에는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세계를 퇴보시키고 재앙의 구렁텅이로 내몰았던 원칙들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예전과 비슷한 대참사들을 반복하게 될 지 모른다. 이제 불편해질 때가 왔다." 마치 병원에서 의사로부터 중병에 걸렸음을 통보받는 당혹스런 느낌이다. 그러나 그 병을 치료할 능력을 갖고있는 유능한 의사를 앞에 둔 일말의 안도감도 함께 들어 다행이다. -끝- (2010.12)
* 기획회의 285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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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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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正義)를 정의(定義)하다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김영사, 2010

최근 대한민국 독서계가 ‘정의’라는 화두로 들썩이고 있다. 하버드에서 최고 인기라는 마이클 샌델 교수의 강의를 책으로 묶은『정의란 무엇인가(원제, Justice:What's the Right Thing to Do?』를 두고 하는 말이다. 마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거나 또는 읽은체를 하는 듯이 보인다. 우연의 일치인지 이명박 정부도 최근들어 ‘공정’을 국정의 핵심과제 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 논의되고 있는 정의에 관한 모든 이론들의 바탕에는 존 롤스(1921∼2002)가 있다. ‘정의’를 연구하는 미국의 대부분 학자들은 롤스를 닮거나 혹은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학문을 발전시켜 왔다. 롤스의 ‘정의론’은 자유주의적 정의론의 대변서이며 마이클 샌델 교수 역시 공동체주의적 관점에서 이를 비판하며 그의 이론을 확장시키고 있다. 이 밖에도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밀, 롤스 등 도덕철학, 사회 정의 분야의 고수들을 한 자리에 불러 들인다.

저자는 자유사회의 시민은 타인에게 어떤 의무를 지는가, 정부가 부자에게 세금을 부과해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건 정당한가, 자유시장은 정말 공정한가 등의 문제제기를 통해 정치철학사를 일관된 눈으로 꿰뚫는다. ‘어떤 상처를 입어야 상인군인훈장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구제금융을 둘러싼 분노, 철로를 이탈한 전차, 아프가니스탄의 염소치기, 대가를 받는 임신’ 등 제목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운 구체적인 사례들이 가득하다. 난해한 철학적 명제를 주제로 삼고 있음에도 큰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는 까닭은 그나마 이처럼 풍부한 사례와 시사성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정의를 둘러싼 딜레마적 요소로 제시하는 키워드는 행복 극대화, 자유 존중, 미덕 추구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요약되는 전체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이 정의냐, 개인들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 정의냐, 아니면 공동체의 미덕을 장려하고 ‘좋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 정의냐? 저자는 겨우 책의 끝부분에 가서야 이중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민하는 세 번째 방식에 호감을 갖고 있음을 슬쩍 표시한다. 

샌델의 여정은 공리주의와 자유주의의 정의관에서 시작하여 칸트의 도덕철학과 롤스의 정의론을 거쳐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정의론으로 넘어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적 정의관인 ‘좋은 삶(good life)'과 ’공동선(common good)'을 동원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도덕적 미덕은 습관의 결과로 생긴다. 행동으로 터득하는 것이다. 미덕은 우선 그것을 연습해야 얻을 수 있다. 공정하게 행동해야 공정한 사람이 되고, 절제된 행동을 해야 절제하는 사람이 되고, 용감한 행동을 해야 용감한 사람이 된다”며 도덕을 회피하는 정치보다 도덕에 개입하는 정치를 촉구한다. 즉 가치 중립이란 없다는 뜻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저자는 이 물음에 직접적으로 답하지는 않는다. 단지 여러 가지 흥미로운 사례들 속에서 논쟁의 핵심을 끄집어내며 독자들에게 판단과 그 근거가 되는 원칙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데 집중한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명쾌한 대답을 기대한 독자라면 자칫 실망할 수도 있다. 이 책은 미리 만들어진 해답을 속 시원하게 보여주는 게 아니라 독자들에게 꾸불꾸불한 길을 보여주며 생각하는 능력을 키워 주는게 목적이기 때문이다. 어느 길로 들어서든 막다른 골목에서 반드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마주치는데 안타깝게도 正義에 대한 定義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이 책이 무수히 많은 사례로 가득할 수 밖에 없는 것이 그 이유다. 어쨌든 2010년 한 해 동안 한국인들이 ‘정의’라는 샘물 앞에까지는 겨우 오긴 했는데 제대로 목을 축이고 갈증을 얼마나 해소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스럽다. -끝- (2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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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시계공 1
김탁환.정재승 지음, 김한민 그림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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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눈먼 시계공』

김탁환·정재승 글, 김한민 그림, 민음사, 2010

미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눈먼 시계공』은 로봇공학과 뇌과학을 바탕으로 미래 사회에서 벌어질 가상의 연쇄살인 사건을 추적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테크노스릴러 소설이다. 소설가 김탁환과 과학자인 정재승 KAIST 교수의 공동작업을 통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문학과 과학의 통섭을 시도해 화제를 모았다. 때는 2049년, 세계는 국가와 민족개념이 폐기된지 오래고 기계와 인간이 몸을 섞으며 새로운 진화를 꿈꾸는 시대다. 장소는 서울특별시, 유비쿼터스 기능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21세기형 메트로폴리탄으로 인간과 사이보그, 로봇이 공존한다. 기계는 좀더 인간 같아지고, 인간은 좀더 기계 같아진다. 자동차가 자동항법장치를 통해 알아서 운전을 하고, 사람몸의 상당부분은 기계로 대체되었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로봇과 사랑을 나누기도 한다. 은석범 검사가 팀장으로 있는 서울특별시 보안청 ‘스티머스 수사팀’은 스티머스라는 기계를 통해 전전두엽에 저장된 최근 10분의 단기기억을 복원해, 살해당한 피해자들의 뇌에서 마지막 단기 기억을 영상으로 재생해 범인을 체포하는 특별 임무를 수행한다. 특별시 안에서 연쇄 살인이 일어나고 피해자의 뇌가 사라진다. 단기 기억 재생 장치의 존재를 아는 누군가의 소행으로 짐작되지만, 사건의 실마리는 잡히지 않고 특수 수사대의 형사들도 하나하나 희생당한다. 같은시간, 과학과 자본의 욕망이 어우러져 지상 최강의 로봇을 가리는 로봇 격투기 대회인 ‘배틀원’은 점점 더 광분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한쪽에서는 자연 회귀주의자들의 테러와 투쟁이 격화된다. 무엇보다 로봇격투기라는 SF적 요소와 연쇄살인이라는 스릴러를 결합한 흥미로운 소재에, 기발하고 유쾌한 상상력이 보태져 지루할 틈이 없다. 연쇄살인범을 잡기 위한 숨가쁜 추격과 액션, 그 사이에 흐르는 로맨스와 세계 최강 격투 로봇들의 극적이고 생생한 한판 승부가 책읽기를 좀처럼 멈추지 못하게 만든다. 

‘눈먼 시계공’이라는 소설의 제목은 진화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의 같은 제목의 책에서 따왔다. 리처드 도킨스는 ‘눈먼 시계공’이란 작품을 통해 생명의 탄생과 진화를 명쾌하게 설명해냈다. 자연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고 보니 자연은 목적도 설계도 없는 자연 선택의 산물이고 그저 잘 짜여진 시계와 같더라는 이야기다. ‘신’이라는 초자연적 존재의 힘이 아닌 바로 ‘자연선택’이야말로 진정한 생명의 창조주라는 것을 증명해냈다. 이 책 『눈먼 시계공』은 여기서 조금 더 많이 나간다. 인류가 로봇공학과 사이버네틱스 그리고 정보기술 같은 기계문명을 통해 스스로를 진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단순히 로봇에게 인간의 지적 능력을 부여했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로봇이 인간처럼 욕망하고 자의식을 가진 존재로 진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이를 가능하게 만들려는 사람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핵심인물 중 하나인 뇌 과학자 노민선 박사다. 독자들과 만난 한 강연회에서 저자들은 제목에 숨겨진 뜻이 있다고 말했다. 이야기의 중심에 서있는 로봇 ‘글라슈트’는 사실 유명한 수제 시계 이름이다. 소설 속에서 글라슈트를 만든 이가 노민선 박사다. 즉, 글라슈트를 만든 과학자가 ‘눈먼(어리석은) 시계공(로봇공학자)’이라는 것이 연상된다. ‘눈먼 시계공’은 로봇을 우승시키기 위해, 어머니의 복수를 하기 위해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어리석은 로봇공학자 노민선을 뜻하기도 한다. 소설에 담긴 인류의 미래는 충격 그 자체다. 그렇다고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는 허황된 소설로 치부해버리고 지나칠 수가 없다. 테크노스릴러로 포장했지만 과학기술이 가져 올 미래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전망과 인간 생존 문제 등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21세기 들어 이미 인류가 마주하고 있는 유전학, 나노기술, 로봇공학이라는 심원한 혁명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이 소설에서 재미 이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이 소설의 大尾는 에필로그인 ‘눈보라’다. 은석범 검사와 남앨리스 형사는 연쇄살인을 해결한 일등 공신이었지만 보안청을 사직할 수밖에 없었다. 노민선의 유죄를 입증하기 위해 어쩔수 없이 스티머스 수사팀의 실체를 폭로한 석범에게는 기밀 누설죄가 적용되었고, 사고로 75%의 기계몸을 갖게 된 앨리스는 인권을 인정받지 못했다. 석범은 죽은 어머니의 뜻을 잇기 위해 특별시를 떠나 생태주의자들의 마을로 가기로 하고, 눈보라 마을로 사람들을 초청하는 안내문을 작성한다. “우리는 결코 우리끼리만 평화롭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눈보라 ‘속’에 있습니다. 깨어 움직이지 않으면 쓰러지고 맙니다.” 그때 방송국 PD인 왕고모 이윤정이 새 작품을 의논하자고 들이닥친다. 이를 피해 석범은 앨리스와 밖으로 뛰쳐나가는데 앨리스가 묻는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석범이 답했다. “눈보라 속으로!” 이 소설을 읽으면서 영화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겠다는 생각이 줄곧 들었는데, 특히 이 마지막 장면은 너무나 멋진 장면이 연출될 것 같아 마음이 설레기까지 한다.

매주 한차례씩 나가는 독서모임에서 최근에 읽은책이 『특이점이 온다(The Singularity in Near)』였다. 이 책의 저자인 미래학자이자 발명가인 레이 커즈와일 박사는 2030년쯤 유전공학, 나노공학, 로봇공학 등 과학기술의 발전속도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지는 급격한 변화의 시점인 ‘특이점’이 온다고 예언했다. 그때쯤이면 기술이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게 되며 인간이 자신의 기억을 기계에 이식해 정신적으로 불멸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처음에는 그의 주장이 무척 엉뚱하고 과격하게 들렸는데 이 소설을 읽다보니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미 2010년의 인류는 집단지성을 통해 지식과 정보를 창출하고 정보기술의 발전을 통해 라이프스타일을 바꿔나가고 있는 중이다. 컴퓨터의 기능이 2년마다 2배로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이 지속된다면 인간의 지능을 능가하는 컴퓨터의 출현은 결국 시간문제다. 그러나 비판도 만만치 않다. 그가 특이점 이후를 ‘유토피아’로 부르지만, 특이점대를 신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시도로 비난하는 사람도 많다. 정신적 불멸을 추구하는 부류와 현재의 모습을 지키려는 부류로 인류가 나뉠 가능성도 있다.『눈먼 시계공』에서 그리는 미래사회의 모습도 결코 ‘유토피아’ 는 아니다. 프랑스의 소설가 마르셀 푸르스트는 “진정한 발견은 새로운 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아마 인류가 맞이하게 되는 미래모습이 유토피아가 될지 디스토피아가 될는지는 결국 우리 인간의 손에 달려 있다. 과연 인류는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을까. 상상력은 어디까지 실현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미래의 인간은 그래서 더 행복할까. 소설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의문이다. “가장 좋은 시간이었으면서도 가장 나쁜 시간이었다. 지혜로움의 시대였으면서도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두 도시이야기》에서 찰스디킨스가 한 말이다. 우리시대를 두고 그렇게 말하지 않게 되기를 바랄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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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제국 록펠러 1 - 그 신화와 경멸의 두 얼굴
론 처노 지음, 안진환.박아람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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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의 록펠러, 그 신화와 편견을 벗긴다 

『부의 제국 록펠러 1,2』
론 처노 지음, 안진환・박아람 옮김, 21세기북스, 2010

아버지는 자신이 받아줄 테니 높은 의자에서 뛰어내리라고 아들을 부추기곤 했다. 그러다가 하루는 받아 안아줄 듯이 팔을 내밀고 있다가 내려버렸고, 아들은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그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다시 한 번 가르침을 상기시켰다. “기억하라고 했지. 어느 누구도 완전히 믿어서는 안 돼. 이 아빠마저도 말이야.” 아버지에게서 냉철함과 집념을 배운 이 아이가 바로 훗날 세계 최초의 억만장자이자 19세기 말 가장 큰 사업제국을 건설한 미국의 석유왕 존 데이비슨 록펠러(1839∼1937)다. 이 책은 미국의 시사평론가이자 최고의 금융 전문 저술가인 론 처노가 방대한 자료를 샅샅이 뒤져 록펠러의 98년에 걸친 일생을 치밀하게 추적하여 그의 민얼굴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특히 아버지와의 애증관계, 형제 간의 갈등처럼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록펠러가의 스캔들과 어두운 비밀들도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미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록펠러는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의 집요한 시선 앞에서 그의 모습을 제대로 드러낸 적이 없었다. 저자는 역사상 그 누구보다도 격렬한 논란과 깊은 침묵에 싸여 은둔자로 살았던 록펠러의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을 총체적으로 조명하며 그를 세상으로 이끌어 냈다. 은밀한 가족사에서부터 부에 대한 집착과 성공의 과정을 추적하여 그간 탐욕스럽고 냉철한 기업가로만 알려졌던 이미지를 완전히 뒤흔들어, 한 인간의 삶의 궤적을 흥미롭게 펼쳐 보인다. 

방탕한 허풍쟁이 약장수인 아버지와 신실하고 엄격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이중적인 심리상태를 겪으며 성장한 록펠러는 혼자 힘으로 미국 역사상 가장 막강한 독점기업인 스탠더드 오일이라는 제국을 건설했다. 1911년 연방정부에 의해 스탠더드 오일이 해체되어 수십 개의 회사로 분할될 때까지 30년 동안 미국 경제를 쥐락펴락하며 엄청난 권력과 금력을 휘둘렀다. 스탠더드 오일이 단단한 독점체제를 유지하는 동안 등유 가격은 80% 이상 내려갔고 품질 혁신은 물론 산업 역시 비약적 발전을 이뤄 현대 기업의 모델이 됐을 정도다. 1890년대 록펠러가 사업 일선에서 물러났을 당시 미국인들의 평균 수입은 주당 10달러 이하였던데 비해 그의 평균 소득은 연간 1,000만 달러라는 일반인의 상상을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1893년에서 1901년 사이에 스탠더드 오일이 분배한 2억5,000만 달러가 넘는 배당금 중에서 4분의 1 이상이 그대로 그의 금고로 들어갔다. 록펠러는 남북전쟁 후 미국인들의 삶을 변화시킨 자본주의 혁명의 상징이며 미국 비즈니스 세계에서 매우 독특한 인물이다. 기업을 설립하는 직관적인 1세대적 특징과 기업을 확장하고 발전시키는 분석적인 2세대적 경영자의 특징을 모두 갖췄던 그의 경력은 20세기 경영자 자본주의를 예고하는 것이라 할 만하다. 그는 대규모 기업의 효율성을 명백하게 증명한 독점의 한 형태를 완성시켰고 새로운 법인 조직을 형성하기 위해 다국적 기업의 길을 닦았다. 그는 검약과 자립, 피나는 노력, 지칠 줄 모르는 기업가정신 등의 덕목을 몸소 구현했으며 윤리성에 대해서는 뭐라 논하든, 경제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한결같이 그를 현대 기업의 선구자로 꼽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비정상적인 가격경쟁, 정경유착, 산업스파이, 노조탄압 등 부도덕한 일련의 행위로 인해 엄청난 비난의 화살이 그에게 쏟아졌다. 록펠러는 당대의 가장 거대한 반독점 소송을 피하기 위해 오랜세월 견고한 침묵과 무표정한 가면 뒤에 숨어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를 두고 세상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망자’라 조롱하기도 했다.

탐욕과 악의 화신으로 비춰진 냉혹한 석유재벌이 록펠러 모습의 전부는 아니다. 이 책 곳곳에는 록펠러집안 사람들이 사소한 액수의 돈조차도 따지고 계산하며 얼마나 검소하고 절제된 생활태도를 유지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많다(특히 1권 454쪽, 601쪽). 그러한 습관은 단순히 인색함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돈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엄격한 침례교 사상을 바탕으로 절제와 검약을 신봉했으며 유례없는 통 큰 규모의 자선활동으로도 유명하다. 물론 그의 기부 행위를 그가 저지른 불법・탈법 행위에 대한 사회적 비판과 공격을 조금이라도 줄여 보기 위한 노력이거나 면죄부를 사는 행위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돈을 버는 일에서 돈을 최대한 현명하게 쓰는 일로 삶의 초점을 바꾼게 사실이다. ‘부자로 죽는 일은 불명예스러운 일이다’라는 카네기의 말에 공감했으며 ‘최대한 벌어 최대한 베푸는 것’을 신이 자신에게 부여한 사명으로 삼고 평생 이를 실천했다. 그는 인류가 불행의 원인을 깊게 파고들지 않고 사람들에게 직접 돈을 나눠주는 것은 가장 창의적이지 못한 방법으로 돈을 쓰는 일이라고 경계했다. 이를테면 거지들에게 돈을 주는 대신 거지들이 생겨난 원인을 제거하는 일에 더욱 몰두하는 식이다. 록펠러는 눈과 귀가 먼 16세의 헬렌 켈러에게 익명으로 도움을 제공했고 마크 트웨인 역시 그의 후원에 힘입어 왕성한 창작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가 평생 기부한 액수는 5억3,000만 달러에 달했는데 록펠러 재단은 그중에서도 특히 의학, 의료 교육 및 공공보건에 관한 미국 최고의 후원단체가 되었다. 뇌척수막염이라는 전염병으로 인해 3천명에 달하는 뉴욕 시민이 죽어 갈 때 새로운 치료혈청을 개발해 무상으로 나누어 줌으로써 수천 명의 목숨을 구했다. 또 십이지장충 캠페인을 적극 후원해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 명의 사람을 질병에서 구하는 등 의료나 교육발전에 대한 그의 공적은 실로 대단하다. 그에 대한 평가가 그렇게 엇갈리는 반응을 불러일으켰던 이유는 그의 단점 하나하나가 나빴던 만큼 장점 하나하나가 더없이 훌륭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역사상 그처럼 모순적인 인물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신실한 록펠러와 비열한 동기로 가득찬 사업가 록펠러라는 두 얼굴을 대하다 보면 막막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미국비평가협회상 수상과 타임 선정 ‘올해 최고의 책’ 등 잇달아 찬사를 받기도 한 이 책은 두권을 합쳐 물경 1,26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보니 읽기에 다소 버거울지 모르지만 일단 한번 책을 붙잡으면 놓기가 쉽지 않다. 산타클로스도, 스쿠루지도 아닌 (어쩌면 그 둘의 속성을 모두 갖고있는) 록펠러라는 매력적인 인물의 성장과정과 내면풍경을 실감나게 읽는 맛이 쏠쏠하다. 거기다 미국 산업 역사상 최대의 공적을 세운 거인의 어깨위에서 인물과 시대를 조망하며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 록펠러가 남긴 모순적인 유산에서 현대 자본주의가 배워야 할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면 이 책을 읽은 최대의 성과가 될 것 같다. 읽을만한 전기・평전이 귀한 현실에서 사람을 통해 시대를 돌아보고 역사를 짚어보는 각별한 맛을 제공한다. 마침 록펠러 가문의 5대 손인 스티븐 록펠러 2세가 지난 10월 서울을 찾았다. 한국 록펠러재단을 설립하여 환경문제, 여성차별, 문화갈등 해결 등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벌일 예정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록펠러를 알리기에 좋은 기회인 듯 싶다. -끝-
* 기획회의 283호 기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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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잘 살고 있습니까?
 

『빅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밝은세상, 2010

 

Mr.벤!

오랜만에 스릴러라는 장르를 읽으며 당신을 만나는군요. 원래 추리나 스릴러물을 그다지 즐겨읽는 편이 아니라서 처음에는 그냥 지나칠뻔 했습니다. 그런데 월가가 있는 뉴욕을 배경으로 단정한 슈트에 목에 걸린 카메라. 피묻은 손, 그리고 얼굴을 가린 야구모를 쓴 또 하나의 얼굴사진의 책 표지가 순간적으로 내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책을 중간쯤 읽고나서야 가려서 보이지 않는 얼굴이 원래 당신의 얼굴이고, 모자를 쓴 모습 역시 당신의 또다른 얼굴임을 알게 되었지만 말입니다. 앞날이 보장된 뉴욕 월가의 변호사 벤 브래드포드가 당신의 이름이었습니다. 베스라는 이름을 가진 미모의 아내와 귀여운 두 아이와 함께 중상류층이 모여 사는 교외 고급 주택에 살고 있었지요. 겉으로는 아무 부러울것이 없는 사람이지만 벤 당신은 조금도 즐거워 하지 않더군요. 당신의 오랜 소망은 사진가가 되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는 동안 그가 느꼈던 희열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미국 상위 1퍼센트에 들기를 바랐던 아버지의 자금 압박과 이미 안락한 생활에 길들여진 스스로의 탓으로 변호사라는 안락한 생활에 파묻혀 그럭저럭 살고 있습니다. 인생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자택의 지하에 전용 암실을 만들고, 값비싼 최신 카메라 장비를 구입하곤 하지만 당신의 인생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지루한 삶을 버티지 못하던 당신은 아내의 예술적 욕구를 살필 겨를이 없었지요. 지리멸렬해진 일상에 권태를 느끼던 어느 날 아내가 이웃집에 사는 사진가 게리와 불륜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된 당신은 게리네 집에 찾아가 말싸움을 벌이던 중 우발적으로 그를 살해하고 맙니다.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변호사에서 일급살인을 저지른 범법자가 될 운명에 처한 당신은 요트사고를 위장해 사건을 은폐한 후 몬태나 주 마운틴폴스로 도망칩니다. 

Mr.게리!

당신은 변호사다운 영민함과 치밀함을 발휘하여 가까스로 위기를 벗어나지만 가정과 직장을 송두리째 빼앗긴 상태로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맙니다. 가짜 신분증으로 Mr.벤이 아닌 Mr.게리라는 다른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 전전긍긍한 삶을 새로 시작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사진가의 재능을 싹틔우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도피의 길에서 무심코 찍은 인물 사진이 우연히 지역 신문에 게재되면서 일약 유명 사진가의 길로 들어서기 직전까지 갑니다. 이걸 그냥 뒤늦게 찾은 ‘행복’이라고 부르기에는 그 댓가가 너무 큽니다. 다른 사람의 눈과 세상을 속이며 살아야 하는 엄청난 절망감과, '애덤'과 '조시' 두 아이에 대한 그리움에 하루에도 몇 번씩 이게 현실이 아니고 꿈이기를 간절히 빌어 봅니다. 그러나 이 상황은 울적하고 비극적인 현실로 나타나 매스컴의 취재 요청이 쇄도하는 가운데 숨겨진 과거를 발각당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많은 독자들은 이 소설을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소설’ ‘끝나는 걸 두려워하며 읽는 소설’이라고 평합니다. 나 역시 기발한 착상, 간결한 문장, 긴박감 넘치는 스토리, 폭발적인 스피드, 계속되는 반전 때문에 잠시도 지루할 틈이 없었습니다. 마치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도망자’ 시리즈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무작정 숨고 달아나는 그런 도망자가 아닌, 멈춰서 돌아보고 한숨쉬는 안타까운 도망자입니다. 아마 나를 포함한 많은 독자들이 당신과 함께 도망가고 당신과 함께 숨고 당신과 함께 한숨을 쉬었을 겁니다. 쉴 틈 없는 사건 전개로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으면서도 때때로 책을 덮고 싶은 막막한 느낌이 드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는 책을 읽는 내내 당신의 죄가 세상에 밝혀지지 말고 그냥 이대로 덮어 지기를 간절히 원하게 됩니다. 아마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해 좌절하는 모습이 당신에 대한 연민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인 듯 합니다.

Mr.벤 또는 게리!

사람들이 당신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진정 ‘나’를 위한 삶을 살고 싶었던 당신의 모습이 현재와 다른 삶을 꿈꾸는 현대인들의 갈망을 집약적으로 투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원래 살고 싶었던 삶을 사는 당신의 모습에서, 주어진 삶에 만족하지 못한 채 일탈을 꿈꾸는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진짜 바라는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일겁니다. 이 소설이 조만간 프랑스에서 로맹 뒤리와 카트린 드뇌브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프랑스 판 소설 제목인 『자신의 삶을 살고 싶었던 남자』가 그대로 영화 제목으로 쓰이게 되었다는 소식도 함께 들립니다. 나는 기꺼이 첫 상영 영화의 관객이 될 것입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새로운 화두를 붙들고 씨름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림자를 붙잡느라 실체를 잃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책의 맨 앞장에 써 있는 이솝의 경구 말입니다. 주위사람들에게 당신의 이야기가 담긴, 아니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 수 있는 이 책을 사서 선물하며 책의 속표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잘 살고 있습니까?” -끝-(2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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