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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경제학 - 경제학은 어떻게 인간과 예술을 움직이는가?
문소영 지음 / 이다미디어 / 2014년 6월
평점 :
그림 속에 숨겨진 경제코드
『그림 속 경제학』
문소영 지음, 이다미디어, 2014
007 시리즈 영화 <스카이폴>을 보면, 제임스 본드가 미술관에 앉아 물끄러미 그림 하나를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19세기 영국 화가 윌리엄 터너의 비극적 걸작으로 꼽히는 유명한 <전함 테메레르>다. 해체 직전 마지막 정박지로 예인되는 전함을 그린 경이적인 이 작품은 작은 증기선이 무력해진 거대한 전함을 이끌고 황금빛 석양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표현함으로써 증기선의 승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그림은 영화에서도 세대교체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등장하지만, 산업혁명으로 인한 새로운 기계 문명과 저무는 옛 문명의 충돌을 드라마틱한 이미지로 구현하고 있다. 이렇게 모든 예술 작품에는 그 시대의 상황이 녹아 있고, 예술가들의 사고와 정서가 시대적 상황에 맞물려 있기 마련이다. 미술 역시 예외가 아니다. 미술가들도 사회적·경제적 변화의 흐름에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반응해왔다. 그래서 한꺼풀만 벗겨내면 당대의 미술 작품과 사회현실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작품 감상의 단초 하나를 더 얻게 된다. 『그림 속 경제학』은 경제학이 인간과 예술을 어떻게 움직여 왔는가를 조망한 책이다. 경제학과 예술학을 전공한 현직 기자가 예술의 꽃인 명화 속에 숨겨진 경제학 코드를 찾아 예술, 경제, 정치, 사회의 유기적 관계를 종합적으로 해석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미술사를 대표하는 명화 속에 한 시대를 상징하는 경제적 사건과 사회적 지문이 묻어나는 생생한 현장을 목격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매우 반가운 안내서다.
1640년, 네덜란드 화가 얀 브뢰헬 1세는 독특한 그림 한 편을 그렸다. 왼편 아래의 원숭이는 손에 든 목록과 튤립 꽃들을 꼼꼼히 비교하고 있다. 그 오른편에서는 원숭이 무리가 거래를 하고 있다. 튤립을 가리키고, 악수를 하고, 돈주머니를 흔들고, 장부에 기록을 한다. 계단 위에서는 원숭이들이 성찬을 즐긴다. 그림의 중앙 오른편으로는 알뿌리의 무게를 재고 탁자 위에서 돈을 세는 모습이 보인다. 그 오른쪽은 거품 붕괴의 결과를 보여준다. 맨 앞의 원숭이는 값이 폭락한 튤립에 오줌을 누고, 뒤로는 법정에 끌려오는 원숭이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원숭이가 보인다. 멀리 뒤에서는 부채에 눌려 목숨을 끊은 원숭이의 장례식이 치러지고 있다. 그림은 한바탕 투기 광풍이 휩쓸고 간 비참한 현실을 풍자하고 있다. 당시 네덜란드에 불었던 튤립 광풍과 그 후유증을 이처럼 실감나게 표현한 작품도 없다. 1630년 초, 오스만튀르크 제국에서 물 건너 온 튤립은 희소성 덕에 별안간 명품으로 둔갑했고, 튤립 가격은 비정상적으로 급등했다. 이른바 ‘튤립 버블' 속에 당시 최저 소득층인 굴뚝청소부까지 튤립 투기에 나섰다. 그러다 반전이 일어났다. 오를 대로 오른 가격 탓에 튤립을 사려는 사람이 없었고, 수요가 뚝 끊기며 버블 붕괴가 시작된 것이다. 얀 브뢰헬의 그림 속에 나오는 우스꽝스러운 원숭이는 바로 튤립 투기자들을 그린 것이다. 위대한 과학자 아이작 뉴턴 조차도 영국 남해회사에 투자했다가 2만 파운드를 날린 뒤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지만 사람들의 광기는 예측하지 못하겠다”고 투덜거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바보 원숭이들의 행진은 역사 속에서 한 번만 등장한 것이 아니다. 당장 우리나라 금융시장까지 뒤흔들었던 2008년 세계 금융위기의 시작은 미국의 부동산 버블이었다. 그보다 앞선 1990년대엔 일본이 부동산 버블 붕괴로‘잃어버린 10년'을 겪어야 했다.
소위‘이발소 그림’이라는 것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밀레가 그린 <이삭 줍는 여인들>이라는 그림이 있다. 마치 이발소 주인들이 이 그림을 걸어놓지 않으면 이발소 허가가 취소되기라도 하듯이 모든 이발소마다 걸려있던 그림이다. 날카로운 면도기에 얼굴을 내맡겨야하는 곳이기에 그런 따뜻하고 평화스런 느낌의 그림이 필요했던 걸까. 그러나 이 차분한 그림이 1857년 처음 발표됐을 때, 선동적이고 불온하다는 비난을 들었다면 믿을 수 있겠는지? 먼 옛날 구약성서 시대부터 추수가 끝난 뒤에 이삭을 줍고 다니는 사람은 자신의 농지가 없어서 주운 이삭으로 배를 채워야 하는 최하층 빈민이었다. 추수 때 땅에 떨어진 이삭은 이런 사람들을 위해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고대부터 내려오는 관례였다. 일종의 자선행위인 셈이다. 그러니 밀레의 그림 속 여인들은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는 것이 아니라 남의 밭에서 품을 팔고 품삯으로만은 모자라 이삭을 줍는 가난한 아낙네들일 것이다. 그들의 얼굴과 손은 고된 노동으로 검붉게 그을렸고 거칠고 투박하다. 그 중 한 여인은 이삭을 쥔 팔을 등에 댄 걸로 보아 허리가 아픈 모양이다. 하긴 하루 종일 넓은 밭을 헤매며 고개를 숙여 이삭을 찾고 허리를 굽혀 주워야 하니 온몸이 뻐근할 것이다.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 명의 여인들만 있는 게 아니다. 저 멀리에 추수한 곡식이 황금빛을 내며 풍요롭게 쌓여 있고 그것을 분주히 나르는 일꾼들과 그들을 감독하는 말 탄 지주가 보인다. 이 조용하면서도 드라마틱한 대조야말로 빈부격차를 고발하고 농민과 노동자를 암묵적으로 선동하는 것이라는 논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니 엄격한 반공주의 교육 시절 밀레의 이런 그림이 교과서에 거리낌 없이 실리고, 식당이나 이발소에 척척 내걸린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면서도 재미있는 일이다.
우리가 명화에서 느끼는 감동은 미학적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사회적 메시지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미술의 경우 상징과 은유는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여기서 저자는 명화의 배경과 메시지를 설명하기 위해 경제학을 동원한다. 책에 등장하는 명화가 다루는 주제와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신기할 정도로 조응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사회적 현상과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경제학만큼 구체적이고 유용한 학문이 없기 때문이다. 그림을 통해 경제학을 설명하고, 경제학을 통해 그림의 안쪽을 들여다보게 한다. 명화 뒷부분에 숨겨진 경제학 코드를 꼼꼼하게 짚어내고, 그것을 당시의 경제이슈와 버무려 비벼내는 저자의 맛깔난 요리 솜씨가 자꾸만 몸을 그림 앞으로 내밀게 한다. 그림설명을 위해 동원되었던 어려운 경제용어를 정리해 놓은 친절함도 느껴지고,‘재미있는 미술사 이야기’처럼 미술사 에피소드가 담긴 뒷 담화를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경제학’과 ‘미술’의 조합을 새로운 미술 감상의 세계로 매끈하게 이끄는 이런 책을 경제경영 서가에서 발견하기란 흔치 않은 일이다. 경제 기자와 미술 기자로 오랫동안 일해 온 저자의 내공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림만으로도 책값을 뽑는 셈이니 ‘꿩 먹고 알 먹는다’는 말이 이 책을 두고 하는 말이다. -끝- (기획회의 387호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