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워크
E. F. 슈마허 지음, 박혜영 옮김 / 느린걸음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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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노동은 가라

 

굿 워크

E.F.슈마허 지음, 박혜영 옮김, 느린걸음, 2011

  

직장인의 애환을 담아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 <미생>을 보다가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가 떠올랐다. 1930년대 산업사회 속에서 기계화되어 가는 인간과 물질문명을 신랄하게 풍자한 영화다. 영화 속에서 찰리 채플린은 온종일 컨베이어 벨트라인에 서서 나사를 조이는 지극히 단순한 일을 끊임없이 계속한다. 거기에는 인간적이거나 창조적인 일체의 행위가 개입되지 않는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태엽장치의 기계처럼 정해진 대로 움직이면 된다. 결국 찰리는 강박증에 시달리다가 정신병원에까지 간다. 이른바 포드주의로 상징되는 현대 산업사회에서 인간은 <모던 타임즈>에 표현된 것처럼 개성이나 인간성은 무시되고 일찌감치 노동에서 소외 되었다. 오로지 생산성과 능률성 향상이라는 목표에 종속되어 한낮 기계의 부품처럼 취급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그 결과 노동은 임금에게, 삶은 생존에게, 영혼은 기계에게 자리를 내 주게 되는 것이다. 프랑스의 정치학자이자 역사가인 토크빌이 핀 대가리를 만드는 일로 20년 세월을 보낸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라며 150년 전에 생겨난 분업노동에 대해 했다는 뼈있는 말이 이와 무관하지 않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책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E.F.슈마허(19111977)는 현대 환경 운동사에서 최초의 전체주의적 사상가로 평가받는다. 독일 태생으로 스물두 살의 나이에 미국 콜롬비아 대학의 교수가 된 뛰어난 경제학자이자 실천적 사상가였던 슈마허는 현대 산업 사회의 급소를 정확하게 꿰뚫어보았다. 그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한 문장으로 인류의 생각의 대전환'을 이뤄냈다. 평생을 기존 경제학과 기술, 그리고 이를 떠받쳐 온 가치체제에 대한 근원적 도전을 던지며, 지속가능한 삶으로 이끄는 길을 탐색해 왔던 그의 사상과 실천이 응축된 역작이 굿 워크. 그는 종교가 돼 버린 경제성장, 거대산업과 첨단기술 등 현대 사회의 우상들을 거부하며 인간 중심의굿 워크'에 도달하는 길을 집요하게 모색했다. 영혼을 잠식하는 나쁜 노동의 본질을 파헤치며인간의 노동'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도 깊은 통찰과 대안을 제시한다.

세계적인 경제 위기 속에서고장난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시선이 여간 따가운 게 아니다.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자본주의, 이대로는 안 된다라는 구호가 전 세계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상품화와 화폐경제에 매몰된 시장 만능주의 경제 사상이 모든 이들로부터 근본적인 회의를 사고 있는 것이다. 경제 논리에서 외면당해 온 인간 삶의 궁극적 목적과 가치에 눈떠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도 그 흐름 중 하나다. 가장 그릇된 오해는 모든 것을 돈으로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다. 돈으로 인생과 사회의 다른 부분을 파괴하지 않도록 하는 시스템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굿 워크에서 슈마허는 현대 산업사회의 문제점을 네 가지로 지적하는데, 그것은 모든 것이 점점 더 커지고, 더 복잡해지며, 더 자본집약적이고, 더 폭력적이 된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인간의 노동을 가장 무의미하고 지루하게 만들며, 인간의 총체적인 본성 중에서 극히 일부분만을 사용해 인간의 삶을 타락시킨 것이 산업사회의 가장 큰 죄악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현대 문명이 낳은 이 중대한 위기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기 위해, 또 자신의 재능과 기술을 완성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태생적인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이들과 협력하기 위해 인간은 노동을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젊은이들에게 먼저 좋은 노동과 나쁜 노동을 구별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이들에게 나쁜 노동을 받아들이지 않도록 독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슈마허가 이 대목에서 내세우는 가장 핵심적이며 독창적인 개념이 바로중간기술내지는적정기술이다. 중간기술이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간단하며, 자본이 적게 들고, 환경을 파괴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고안된 기술을 말한다. 전문가의 도움 없이도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인간을 기술에 종속시키지 않으며, 중앙집권화와 관료주의를 낳지 않는 작은 단위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기계중심에서 인간중심으로 나아가게 하는 실질적 대안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인도에서 처참한 빈곤을 목격하고 나서 지역 규모에 알맞으며 사용하기 쉽고 생태적인 중간기술 개념을 창안했고 이를 알리는데 힘썼다. 가난한 사람들이 권력자나 기술 엘리트들에게 예속되거나 의존하지 않고 작은 규모의 조직과 중간기술로 우리의 미래를 선택하자고 호소했다. 1965중간기술개발그룹을 발족해 전 세계에 중간기술을 보급하고, 3세계를 돌며 자급경제를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영국 최초의 공동소유권 회사라고 할 수 있는스콧 배더라는 기업의 경영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책은 슈마허가 1977년 미 대륙을 횡단하며 펼친 강연을 묶은 것으로 그가 죽고 2년 후인 1979년에 세상에 나왔다. 슈마허의 강연육성을 입말로 그대로 옮긴데다 특유의 유머스런 말솜씨가 곳곳에 배어나와 편하게 술술 읽힌다. (205쪽에 나오는 하느님과 한 경제학자의 대화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담고 있는 내용은 묵직하다. 그가 말년에 가장 천작했던 문제인 좋은 노동과 좋은 교육에 관한 사상적 성찰과 함께 이를 위한 실천적 탐구가 담겨 있다. 30~40년 후에 벌어질 일들을 비롯해 현대 산업 사회의 모습을 내다본 그의 안목과 예견에 소름이 끼칠 정도다. 슈마허의 진단대로 지금 대부분의 노동은 완전히 재미없고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했다. 이젠 노동을 우리 곁으로 다시 찾아와야 할 때다. 학교에서 아이를 찾아오려면 일단 등수가 아니라 몇 반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처럼 무엇보다 좋은 노동과 나쁜 노동이 무엇인지를 구분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굿 워크는 그에 대한 맞춤한 길 안내를 보여준다. 읽고 나면 시야가 탁 트이는 그런 책이다. 먼저 읽은 지인이 자신은 빨간 색 속표지를 넘기면 나오는 알베르 카뮈의 말에 밑줄을 그었다고 말했다. “노동을 하지 않으면 삶은 부패한다. 그러나 영혼 없는 노동을 하면 삶은 질식되어 죽어간다.” 나는 3장이 시작되는 다음 부분에 밑줄을 그었다. “나는 아무 의미도 없는 치열한 경쟁에 뛰어들고 싶지 않다. 나는 기계와 관료제의 노예가 되어 권태롭고 추악하게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바보나 로봇, 통근자로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누군가의 일부분으로 살고 싶지 않다.” 우리도 이젠 삶의 무지와 불안에서 벗어나 희망에 대한 능란한 낙관을 꿈꾸어 볼 때가 되지 않았나. 숨을 크게 쉬고 싶은 사람과 세상을 살아가는 좌표를 발견하고 싶은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 (기획회의 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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