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 라이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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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겨울, 마를린 먼로에 이어 또 한 명의 먼로가 내 삶에 들어왔다. 스웨덴 한림원은 평생 단편소설을 써온 캐나다 여류작가 엘리스 먼로를 올해 노벨문학상 작가로 선정하면서 현대 단편소설의 거장이라는 이유를 밝혔다. 단편은 우리 인생의 독립된 순간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안정적인 형식미 속에 담아내야 하기에 직관과 섬세함이 요구되는 장르다. 먼로 역시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의 이번 노벨상 수상으로 단편이 장편소설을 쓰기까지의 습작 과정이 아니라 하나의 중요한 예술 형식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고 말한 바 있다. 엘리스 먼로의 단편집 디어 라이프는 표지만으로도 따뜻함이 묻어나고, 제목을 입에 올리는 순간 날렵한 휘파람 소리가 나는 책이다. 발효를 마치고 막 오븐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쫄깃함과 부드러움이 배인 빵반죽 같은 문장들이 담백하면서도 팽팽한 긴장을 놓지 않는 것이 여든이 넘은 노작가가 쓴 글이라는 선입견이 끼어들 틈이 없다. 다루는 인물은 평범하고 벌어지는 사건도 일상적인 소소한 것들이고 배경 역시 캐나다의 작은 타운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 속에서 가출, 불륜, 배신, 죽음 같은 사건이 하나씩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감정의 파고나 극적인 동선은 희미하고, 인생의 지혜를 설파하려는 성마르고 노회한 시선도 찾아보기 힘들다. 허겁지겁 책장을 넘겨야 할 이유도 없지만, 그렇다고 무심히 지나쳐 읽다가는 자칫 앞쪽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 읽는 수고를 하기 십상이다. 대신 미세한 사건이나 사소한 에피소드를 통해 작은 일들이 삶에 가져오는 진동과 균열을 말하며 그것들이 우리 삶을 어떻게 끌고 가는지를 보여준다.

 

<자갈>의 주인공은 언니가 물에 빠져 죽은 그 일이 있고도 한참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때 기억을 떠올리지만 결국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억은 제 자리에 앉지 못하고 머리 속 어딘가를 여전히 서성거릴 뿐이다.

 

중요한 건 행복해지는 거야.” 그가 말했다. “뭐가 어떻든 간에, 그냥 그러려고 해봐. 넌 할 수 있어. 하다보면 점점 쉬워질 거야. 주변 상황과는 아무 상관 없어. 그게 얼마나 좋은 건지 넌 모를 거야. 모든 걸 받아들이면 비극은 사라져. 혹은 가벼워지지. 어쨌든 그러면 그저 그 자리에서 편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돼.”

이제, 안녕.(142)

 

올 한 해, 개인적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상실은 상심으로 이어졌고 책 안에서 모든 걸 찾고 해결하려던 방법에 한계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결국 금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불안하고 무력했던 현실의 남루한 습관을 뒤로 하고 한 달 동안 인도와 네팔로 여행을 다녀왔다. 꿈은 도망가지 않는데 늘 도망치는 건 자신이었다는 걸 아는데 오랜 세월이 걸렸다. 이렇게 살아온 삶이 온통 못 미덥고 불안해 어쩔 줄을 모르던 올 겨울에 찾아온 것이 앨리스 먼로였다. 먼로는 우리 삶이 그래서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살아야 하는, 온통 비밀로 둘러싸여 있는 것임을 말해 주었다. 그저 지키고 남아있고 바라보고 돌아오고 기다리는 것들로 인생은 채워져 있는것이라며, 너무 많이 흔들리지 말라고 낮게 속삭인다.

 

시인의 시에 대해 완벽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너무 과하지도, 너무 모자라지도 않게, 딱 적당히.

그가 나를 팔로 감싸안고 의자에서 들어올려 바닥에 내려놓았다.

우리는 싸울 여력이 없어.” 그가 말했다.

참으로 그렇다. 나는 우리가 얼마나 늙었는지 잊고 있었다. (330)

 

열 편의 단편소설과 네 편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디어 라이프는 손목으로 쓴 글이 아니다. 먼로가 지나온 여든 두 해의 삶을 몸으로 복기하며 팔꿈치로 써 내려간 소설이다. 읽는 내내 삶에 대한 성찰과 인간에 대한 연민이 묻은 이야기들이 스스로 걸어나와 우리가 살아냈던 인생의 어떤 한 장면과 마주치곤 한다. 한 편 한 편을 읽을 때마다 매번 세수를 하는 느낌이 들게 하는 디어 라이프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사람들은 말한다. 어떤 일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혹은 우리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런다.”(416) 먼로는 삶은 우리보다 강하다고, 그러니 살아내는 것이 삶이라고 말하고 싶은 듯 하다. 그 아래 여백에 이렇게 적어 넣었다. “용서하라, 사랑하려면! 사랑하라, 용서하려면! (There is no love without forgiveness, and there is no forgiveness without love)”지웠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지우지 못한 그 사람에게 올 해가 가기전에 전화를 걸어야겠다. -- (20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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