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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잘 살고 있습니까?
『빅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밝은세상, 2010
Mr.벤!
오랜만에 스릴러라는 장르를 읽으며 당신을 만나는군요. 원래 추리나 스릴러물을 그다지 즐겨읽는 편이 아니라서 처음에는 그냥 지나칠뻔 했습니다. 그런데 월가가 있는 뉴욕을 배경으로 단정한 슈트에 목에 걸린 카메라. 피묻은 손, 그리고 얼굴을 가린 야구모를 쓴 또 하나의 얼굴사진의 책 표지가 순간적으로 내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책을 중간쯤 읽고나서야 가려서 보이지 않는 얼굴이 원래 당신의 얼굴이고, 모자를 쓴 모습 역시 당신의 또다른 얼굴임을 알게 되었지만 말입니다. 앞날이 보장된 뉴욕 월가의 변호사 벤 브래드포드가 당신의 이름이었습니다. 베스라는 이름을 가진 미모의 아내와 귀여운 두 아이와 함께 중상류층이 모여 사는 교외 고급 주택에 살고 있었지요. 겉으로는 아무 부러울것이 없는 사람이지만 벤 당신은 조금도 즐거워 하지 않더군요. 당신의 오랜 소망은 사진가가 되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는 동안 그가 느꼈던 희열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미국 상위 1퍼센트에 들기를 바랐던 아버지의 자금 압박과 이미 안락한 생활에 길들여진 스스로의 탓으로 변호사라는 안락한 생활에 파묻혀 그럭저럭 살고 있습니다. 인생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자택의 지하에 전용 암실을 만들고, 값비싼 최신 카메라 장비를 구입하곤 하지만 당신의 인생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지루한 삶을 버티지 못하던 당신은 아내의 예술적 욕구를 살필 겨를이 없었지요. 지리멸렬해진 일상에 권태를 느끼던 어느 날 아내가 이웃집에 사는 사진가 게리와 불륜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된 당신은 게리네 집에 찾아가 말싸움을 벌이던 중 우발적으로 그를 살해하고 맙니다.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변호사에서 일급살인을 저지른 범법자가 될 운명에 처한 당신은 요트사고를 위장해 사건을 은폐한 후 몬태나 주 마운틴폴스로 도망칩니다.
Mr.게리!
당신은 변호사다운 영민함과 치밀함을 발휘하여 가까스로 위기를 벗어나지만 가정과 직장을 송두리째 빼앗긴 상태로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맙니다. 가짜 신분증으로 Mr.벤이 아닌 Mr.게리라는 다른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 전전긍긍한 삶을 새로 시작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사진가의 재능을 싹틔우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도피의 길에서 무심코 찍은 인물 사진이 우연히 지역 신문에 게재되면서 일약 유명 사진가의 길로 들어서기 직전까지 갑니다. 이걸 그냥 뒤늦게 찾은 ‘행복’이라고 부르기에는 그 댓가가 너무 큽니다. 다른 사람의 눈과 세상을 속이며 살아야 하는 엄청난 절망감과, '애덤'과 '조시' 두 아이에 대한 그리움에 하루에도 몇 번씩 이게 현실이 아니고 꿈이기를 간절히 빌어 봅니다. 그러나 이 상황은 울적하고 비극적인 현실로 나타나 매스컴의 취재 요청이 쇄도하는 가운데 숨겨진 과거를 발각당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많은 독자들은 이 소설을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소설’ ‘끝나는 걸 두려워하며 읽는 소설’이라고 평합니다. 나 역시 기발한 착상, 간결한 문장, 긴박감 넘치는 스토리, 폭발적인 스피드, 계속되는 반전 때문에 잠시도 지루할 틈이 없었습니다. 마치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도망자’ 시리즈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무작정 숨고 달아나는 그런 도망자가 아닌, 멈춰서 돌아보고 한숨쉬는 안타까운 도망자입니다. 아마 나를 포함한 많은 독자들이 당신과 함께 도망가고 당신과 함께 숨고 당신과 함께 한숨을 쉬었을 겁니다. 쉴 틈 없는 사건 전개로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으면서도 때때로 책을 덮고 싶은 막막한 느낌이 드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는 책을 읽는 내내 당신의 죄가 세상에 밝혀지지 말고 그냥 이대로 덮어 지기를 간절히 원하게 됩니다. 아마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해 좌절하는 모습이 당신에 대한 연민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인 듯 합니다.
Mr.벤 또는 게리!
사람들이 당신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진정 ‘나’를 위한 삶을 살고 싶었던 당신의 모습이 현재와 다른 삶을 꿈꾸는 현대인들의 갈망을 집약적으로 투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원래 살고 싶었던 삶을 사는 당신의 모습에서, 주어진 삶에 만족하지 못한 채 일탈을 꿈꾸는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진짜 바라는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일겁니다. 이 소설이 조만간 프랑스에서 로맹 뒤리와 카트린 드뇌브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프랑스 판 소설 제목인 『자신의 삶을 살고 싶었던 남자』가 그대로 영화 제목으로 쓰이게 되었다는 소식도 함께 들립니다. 나는 기꺼이 첫 상영 영화의 관객이 될 것입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새로운 화두를 붙들고 씨름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림자를 붙잡느라 실체를 잃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책의 맨 앞장에 써 있는 이솝의 경구 말입니다. 주위사람들에게 당신의 이야기가 담긴, 아니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 수 있는 이 책을 사서 선물하며 책의 속표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잘 살고 있습니까?” -끝-(2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