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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사이코 - 상 ㅣ 밀리언셀러 클럽 15
브렛 이스턴 엘리스 지음, 이옥진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8월
평점 :
모든 게 산산이 부서지는데
아무도 신경 쓰질 않네. - 토킹 헤즈
책에 붙어 있는 빨간 19세 미만 구독 불가라는 딱지가 묘하게 거슬린다. 보통 소설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라 그런 것일까. 하지만 영화를 먼저 접했기에 납득한다. 나온 지 좀 됐지만 아직까지 충격적인 영상과 주제의식으로 날 혼란스럽게 만들고 주연배우 크리스천 베일을 내게 확실히 각인시킨 영화라고 기억하고 있다. (영화도 물론 미성년자 관람불가다.)
이 책은 판금조치를 받았다가 재심의로 다시 독자들에게 찾아온 특이한 이력을 가진 책이다. 판금. 얼마나 정다운 단어인가. 2009년에 등장한 판금이라니 놀라울 뿐이다. 어쨌거나 판금이 풀리고 <상>권만 읽었을 뿐이지만 확실히 영상으로 보는 것과 글로 읽는 것은 차이가 있다. 책이 더 많은 상상의 여지를 제공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영화로는 다 잡아낼 수 없었던 장황한 설명 때문이기도 하다. 이름조차 외울 수 없는 다양한 상품명과 주인공의 심리상태, 또 주인공이 서서히 변모해가는 과정이 좋았다.
<아메리칸 사이코>의 주인공 패트릭 베이트먼은 한마디로 잘나가는 남자다. 스물여섯의 젊은 나이지만 월 스트리트의 근사한 직장과 멋진 외모, 넓은 집을 소유하고 있고 돈도 많다. 하지만 속은 언제나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으로 가득 차있다. 주위 인간관계를 봐서도 그렇다. 그들의 관계는 보통 친구라기엔 좀 다르다. 그들이 골몰하는 이야기는 항상 슈트를 멋지게 입는 방법이라든지 어떤 음식점이 좋다든지 어떤 휴가지가 좋다든지 하는 겉치레들뿐이다. 그들은 자기 이야기만 할뿐 다른 사람의 이야기엔 귀 기울이지 않는다. 이야기를 나눌라 하면 음악이 꽝꽝 울리거나 해서 대화가 통하질 않는다. 혼자만의 섬에 있을 뿐 그들을 이어줄 다리는 없는 셈이다.
“거기다 더 많은 사람들을, 나는, 어, 그러니까...... 어쩌고 싶냐면, 음, 그런 것 같아, 그러니까 살해하고 싶거든”
나는 암스트롱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마지막 말을 강조한다. p.286
하지만 암스트롱은 베이트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다녀온 멋진 휴가지에 대해 떠들어댄다.
또 영화에서도 느꼈지만, 희한한 점은 그들이 서로에 대해 이름을 잘못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식당에서 마주친 베이트먼과 주위 사람들은 끊임없이 상대방의 이름을 헷갈려한다. 누구 아냐? 아니, 누구 같은데. 하는 식으로. 심지어 폴 오언은 베이트먼을 처음부터 마커스로 착각하고 베이트먼의 여자친구 에벌린을 마커스의 여자친구 세실리아로 착각한다. 이것도 앞서 말한 겉치레와 관계가 있는데 그들이 서로를 보는 방법은 어떤 옷을 걸쳤느냐, 어떤 신발을 신고 있느냐다. 베이트먼의 하루 일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베이트먼은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온갖 스킨제품을 몸에 발라대고 외출 시에 걸치는 값비싼 명품들을 고르고 멋진 몸매를 유지하기 위한 헬스클럽을 다니는 등 빈 속의 공허함을 채우듯 겉모습을 요란하게 치장한다. 그들의 구별법은 간단하다. 오늘은 아르마니 제품의 모직으로 만든 슈트를 걸치고 셔츠는 휴고 보스, 존 라일이 디자인한 실크 넥타이에 구찌구두를 신었군. 하는 정도? 어찌나 많은 상품명이 나열되는지 어지러울 정도였다. 너무나 비슷하기 때문에 착각할 수도 있겠다. 그들이 애용하는 제품은 따지고 보면 가지 수가 몇 안 되니까 말이다. 다양성보다는 획일성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베이트먼은 멀쩡한 겉모습과는 달리 잔인하게 살인하고 작은 동물들의 고문을 즐긴다. 자신이 사이코라는 걸 잘 알고 있고 도움을 청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또 자신의 범행을 고백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않을뿐더러 길거리에서 요란하게 살인해도 경찰에 절대 붙잡히지 않는다. 어재서인지 궁금한 독자들도 많을 것이다. 영화와 책의 결말이 같은지 아직 상권만 읽었기에 확인 할 수 없지만 영화의 결말도 참 마음에 들었었다. 몇 가지로 도달할 수 있는 결말을 안겨주었으니 말이다.
물질주의가 만연하고 레이거노믹스로 고도성장을 이룩했던 1980년대의 미국을 2000년대에 보는 것도 색다른 느낌이다. 하지만 노숙자들에 대한 무분별한 적개심, 인종차별, 이유 없는 증오들이 아직 판치고 있는 세상이니 <아메리칸 사이코>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무서운 생각도 든다. 너무나 신랄하기에 더 생생히 다가오고 윤리의식과 물질주의의 균형이 어그러진 문명사회의 병폐를 꼬집은 소설. 이 끔찍한 지옥도를 견딜 수 있다면 한 번 읽는 것에 도전해보는 것이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