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금서
김진명 지음 / 새움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반만년의 역사, 건국이념인 홍익인간의 정신 이 두 가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로 알려져 있는 고조선으로부터 나온다. 하지만 유구한 역사 속에서 고조선부터 시작되는 상고사[上古史]를 증명할 사료는 거의 없다. 단군이 나라를 세웠다는 이야기는 신화로 전해지고 고려 말 이암이 썼다는 <단군세기>는 가장 믿을 수 없는 책으로 낙인 찍혔다. 이렇게 남아있는 자료가 없으니 우리는 중국 사료들을 보며 우리나라의 역사를 끼워 맞출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고조선의 연구가 활발해진 시기는 고려 말 원(元)간섭기 무렵이었다. 몽고 간섭 하에 자주성을 회복하려는 의지로 이해할 수 있는데 그 시기가 13~14세기니 지금으로부터 700~800년 전이다. 고조선부터 세어보면 3천년 정도의 시간 차이가 나는데 그때까지 책을 집필할 만큼의 사료가 남아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고려 말부터 불과 700~800년 떨어져 있는 지금은 왜 그 사료들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일까? 
 

내가 이런 의문을 담고 살아올 동안 작가 김진명도 오래전부터 한 의문에 사로잡혀 왔다고 말한다. 바로 대한민국(大韓民國)에서 한(韓)이라는 글자가 어디서 왔을까하는 의문이다. 고종 실록에는 대한제국 국호를 정할 때 삼한을 잇는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이 삼한이 어디서 유래되었는지 아무도 모를뿐더러 한반도 남부에만 국한되어 있었다고 알려져 있는 삼한을 잇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작가는 주장한다. 작가가 책에서 주장하는 대로라면 고조선 이전에 한(韓)이라는 나라가 있었으며 그들이 우리의 조상들이라 한다. 또 위작논쟁으로 뜨거운 <단군세기>의 진실성을 증명할 수 있다고도 한다. 사실이라면 우리나라 사학계를 뒤집어 놓을 일이다. 책 표지에 써있듯이 한마디로 말해 위험한 책이다. 
 

이야기는 한 여자교수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과학 분야에서 일하고 있던 김미진 교수는 사서삼경에 목을 매고 자살한 모습으로 발견된다. 그 모습에 타살 의혹을 가진 목 반장은 이 사건을 조사하기로 마음먹는다.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을 무렵 목 반장은 김미진 교수의 영안실에서 한 사내를 만난다. 바로 김미진 교수의 친구인 이정서이다. ETER에서 일하고 있는 이 명석한 사내에게 목 반장은 사건의 의심 가는 점을 토로하고 정서도 자체적으로 조사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정서는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친구인 한은원이 김미진과 함께 연구를 한 사실을 알아내게 된다. 하지만 중국에서 일본으로 떠났다는 은원의 소식은 끊기고 은원이 아직 중국에 있다는 확신을 한 정서는 중국으로 가 은원의 행적을 따라가게 되는데. 
 

책은 한 여교수의 죽음과 의문점, 그 실마리를 풀기 위한 여로, 그리고 역사적 사실들을 적절히 혼합하여 독자들을 책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실제로 추리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어 손에서 중간에 떼어놓기란 어려웠다. 그만큼 흥미로웠고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나도 정서와 한 마음이 되어 실마리를 찾아 헤맸다. 또 궁금하기도 했다. 대체 한(韓)이 가진 의미는 무엇이며 작가가 늘어놓은 퍼즐은 어떻게 맞춰질까 하고.

사료가 충분히 남아 있지 않은 이유는 세월의 흐름과 몇 차례의 전란 혹은 누군가의 악의적 조작 등 몇 가지에 있을 것이다. 드문드문 남은 기록으로는 역사를 추측하거나 유력한 설로 구분할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작가의 주장을 온전히 믿기에는 무리가 있다. 작가가 인용한 오성취루와 남해조수퇴삼척에 관한 박창범 교수의 실험은 몇몇 사람들에게 비판 받고 있고 책에서 왕부가 썼다고 나온 <지명원류고>, <씨성본결>과 <유한집>은 존재하지 않는 책이다. 또 아직 고조선의 크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도읍지가 어디였는지에 대한 검증이 확실히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고조선 이전에 한(韓)이라는 나라가 존재했다는 것을 그대로 믿기는 힘들다. 하지만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엄격한 기준과 논리, 확실한 증거자료로 역사를 되살려내야 하는 사학계와는 달리 작가의 주장은 자유롭다. 그 공간에서 작가는 자신이 주장한 바를 서술하고 나름의 증거자료를 제시했다. 섣불리 작가의 생각에 동조할 순 없었지만 책을 읽고 난 뒤 작가에게 미안하고 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오랫동안 김진명 작가의 책을 봐왔지만 작가의 책엔 딱 한국사람, 한국의 것이 깃들어 있다. 작가는 우리가 관심을 끊어버린 것들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도록 독촉한다. 이렇게 뜨거운 감정을 느끼게 하는 작가가 몇이나 될까. 아무리 세계화니 미래엔 나라의 경계가 희미해질거니 해도 우리 후손들이 지켜야 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그것을 쟁점화해서 다시 생각할 기회를 주니 고맙고 작가 홀로 전장에 내보낸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한 마음이다.     
 

결국 한(韓)의 의미는 무엇일지 확실한 것은 없다. 작가의 주장이 옳을 수도 있고 그저 삼한을 뜻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우리가 그 시간을 되찾기 위해선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끝에 반만년의 찬란한 기록들이 세월의 더께를 벗고 우리에게 성큼 다가오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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