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발, 자신을 비워 세상을 담는다
타니 아키라, 신한균 지음 / 아우라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어렸을 적 시골에 가면 흙 속에 묻혀있는 깨진 자기 그릇들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언제부터 묻혀있었는지 유래도 알 수 없는 그릇들이었지만 난 그 파편들을 모아 나뭇잎이나 나무열매를 올려놓고 소꿉놀이를 하곤 했었다. 보물찾기를 하듯 흙을 파고 파편들을 맞추고 운이 좋으면 움푹하게 파인 아랫부분을 구할 수도 있었다. 그릇들을 집에 가져가면 안되냐는 제안은 엄마에게 당연히 거절당했지만 그 그릇들과 함께 했던 기억은 내게 소중한 추억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릇은 우리 생활에 떼어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다. 예로부터 내려온 속담이나 관용어에서도 그릇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흔하고 일상화되었기 때문일까? 우리나라의 그릇은 소위 ‘막사발’이라 하여 품질이 낮고 막 쓴다는 뜻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일본은 달랐다. 우리나라의 ‘막사발’은 일본으로 건너가 ‘이도다완’으로 불리며 명품 대접을 받고 국보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기까지 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은 사발을 직접 생산하고 연구하여 그 명맥을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했다. 관심이 끊기다시피 한 전통사발이 재조명 된 것은 최근이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도자기 광(狂)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켰던 이 전쟁에서 우리나라의 수 만 명에 이르는 도공들이 포로로 일본에 잡혀갔기 때문이다. 그 도예기술이 일본의 새로운 산업의 토대로 자리 잡고 세계적인 명성을 얻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렇게 되기까지 꼭 우리나라 도공들의 기술만이 있었던 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막사발’ 이라 불리며 냉대 받던 사발들을 그들은 정성껏 가꾸고 보존하며 함께 살아온 것이다. 또 그 기술들을 자신들의 식으로 바꾸고 발전시킨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임진왜란 이후 도자기 산업에 큰 타격을 입었다. 고려시기부터 내려온 기술들이 끊겼고 간단하며 간편한 자기들이 주를 이뤘다. 사실 지금 생각하면 기분 나쁘고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전에 없는 대규모의 문화약탈로 도예기술 뿐 아니라 많은 문화재들을 빼앗겼으니 그들이 박물관에 모셔놓은 고려청자들과 문화재를 보면서 어떻게 울분을 참을 수 있을까? 그 도예기술로 만들어 낸 도자기들을 유럽으로 수출하여 부국의 기틀을 다지고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니 생각할수록 화가 나는 일이다. (물론 기술을 천시했던 조선의 문제도 있겠지만 난 주는 거 없이 빼앗아 가기만 한 옆 나라가 참 싫다.)     

이 책 <사발, 자신을 비워 세상을 담는다>는 한일 양국의 전통사발 전문가들이 만나 공동집필한 최초의 도자기 관련 서적이라고 한다. 특히 우리나라 저자인 신한균씨의 이름이 들어가 반가웠다. 우리나라 전통사발의 선구자인 고(故) 신정희 옹의 장남이고 사기장으로 일하고 계셔서 그런지 전문적인 시각과 지식으로 많은 가르침을 받지 않을까 생각했다. (전부터 신한균씨가 낸 <신의 그릇>이라는 책을 관심도서에 넣어놓고 한참 고민하고 있었는데 어쩌다보니 이 책을 먼저 읽게 되었다.) 전문가들의 책이라 사발들의 사진과 함께 유래와 사발 모양, 그림의 의미까지 다양한 지식을 섭렵할 수 있어 좋았다. 또 사발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두 관점을 교차하는 식으로 설명해 놓아 균형 있는 시각을 갖춘 책이라고 평하고 싶다. 

예전부터 우리나라가 주변 나라들에 비해 차(茶)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것은 수질이 좋아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도 삼국시대 때부터 차를 마셨고 고려 시대는 차의 국가라 할 정도로 차(茶)문화가 넓게 퍼져있었다는 것은 몰랐다. -책은 이렇듯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사실들을 알려 주는데 유용한 도구이다.- 또 더 나아가 전통사발의 현재와 미래까지 생각하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제일 중요한 건 우리들의 관심이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 흙과 환경도 물론 전통사발을 되살리는데 중요한 조건이지만 그것을 이어나가려는 의지와 일반 사람들의 사발에 대한 의식 바꾸기, 그리고 사발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마음가짐을 갖추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렇게만 된다면 전통사발을 되살리는 것 뿐 아니라 보태어 더 발전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 신한균씨는 일본식 단어인 이도다완을 한국식 단어인 황도사발로 바꾸어 쓰자고 권고한다. 이미 널리 퍼진 단어라 일시에 고쳐지긴 어렵겠지만 이제부터라도 의식하고 고쳐 쓰도록 노력한다면 황도사발이란 단어가 정착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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