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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공주
카밀라 레크베리 지음, 임소연 옮김 / 살림 / 2009년 8월
평점 :
차갑다 못해 푸른 이미지. 한 여인의 표정 없는 얼굴과 책의 제목 <얼음공주>가 사뭇 잘 어울린다. 차세대 애거서 크리스티로 주목 받고 있으며 인구900만 명의 스웨덴에서 100만 부나 팔아 그 저력을 과시한 작가 카밀라 레크베리의 <얼음공주>가 우리나라에 출간되었다. 처음 책을 봤을 때 두께가 만만치 않아 읽는 데 오래 걸릴 거라 예상했지만 하루에 그냥 후딱 읽어버렸다. 그만큼 흡인력 강하고 내게는 올해 읽은 책 중에 순위를 윗돌만큼 괜찮은 소설이었다.
스웨덴의 작고 아름다운 마을 피엘바카는 한때 어업이 마을 사람들의 주된 일이었지만 요즘에 들어서는 관광이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마을은 여름이면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활기가 넘치지만 겨울은 황량하기 그지없다. 그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겨울에는 다른 곳에서 살다가 여름에만 다시 돌아오기 때문에 피엘바카의 겨울은 더 춥고 조용하기만 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부모님의 짐을 정리하기 위해 피엘바카로 온 작가 에리카는 25년 전 친구였던 알렉스가 욕실에서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선명한 푸른 빛의 입술, 기다란 금발, 얼음이 낀 차가운 욕실의 물. 한때 무척이나 친한 친구였지만 언제부턴가 소원해졌던 알렉스의 죽음은 그녀에게 큰 파문으로 다가온다. 아름다운 외모와 부유한 재산, 멋진 남편 등 에리카와 떨어져 있던 사이에 알렉스는 많은 것이 변해 있었지만 자살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 듯 했다. 에리카는 알렉스의 부모의 부탁을 받아 알렉스에 관한 기사를 쓰기로 결심하지만 그 내면 속에선 이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고자 하는 에리카의 의지가 있었다. 하지만 알렉스가 자살이 아닌 살해당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경찰이 개입하고 에리카도 이 사건에 좀 더 깊숙이 접근하게 된다. 이 아름다운 마을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의 범인은 누구일까?
그 뒤 에리카는 탐정 뺨치게 사건의 단서들을 모으고 알렉스의 내연남을 알아내기도 한다. 경찰도 같이 수사를 하고 있지만 어쩐지 에리카에게 뒤처지는 느낌이다. 그녀가 작가라 감이 좋았던 것일까? 그리고 마을의 알코올 중독자인 안데르스가 알렉스와 잘 아는 사이로 밝혀지면서 사건은 복잡하게 꼬여만 간다. 진범으로 지목된 안데르스는 그러나 목 매달아 죽은 채 발견 되는데. 발밑에 의자를 찾지 못한 경찰은 알렉스의 죽음과 안데르스의 죽음이 같은 범인에 의해 저질러 졌을 거라 믿고 사건 해결을 위해 노력한다.
사실 알렉스의 죽음과 범인을 찾기 위한 과정이 책의 주된 이야기지만 책은 에리카와 주변 인물들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꼭 주인공이 에리카라기보다는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을 소개하고 그의 삶을 설명해주는 형식이다. 또 이야기의 진행이 느리기 때문에 다소 지루했던 독자도 있을 수 있지만 이런 자세한 설명과 긴 호흡이 하나로 합쳐지거나 사소하게 여겼던 일이 뒤에 다시 등장했을 때 전율이 느껴졌다. 방대한 이야기를 하나로 엮어내는 것도 작가의 능력이라 카밀라 레크베리라는 이름이 내게 확실히 기억될 책이었다.
피엘바카는 정말 작은 마을이라 마을 사람 대부분이 서로를 알고 소문도 삽시간에 퍼진다. 이런 폐쇄된 마을에 25년 간 감춰진 비밀이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쉬쉬하는 일들, 그 소문의 당사자들, 인간의 어두운 면모가 고스란히 등장하고, 추리소설이지만 사람의 심리를 주로 다루고 있어 흥미롭다. 또 책을 읽는 내내 묘사 된 마을의 차가운 날씨와 황량한 분위기는 소설 전반을 지배한다. 읽으면서 지금이 2009년 무더운 여름이지만 꼭 겨울인 것처럼 오슬오슬 소름이 돋았다.
중간 중간 나오는 작고 큰, 충격적인 반전들은 책을 도저히 내 손에서 떼어 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숨 가쁘게 진행되는 스릴러는 아니지만 느리되 스릴러의 요소는 모두 갖춘 이 소설에 재미를 느끼고 싶은 독자는 얼음공주 알렉스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이 여정에 동참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