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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인 2 ㅣ 뱀파이어 삼부작
기예르모 델 토로 외 지음, 조영학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에드워드의 달콤함에 빠져 있던 독자들은 꿈에서 깰지어다. 여기 색다르고 기괴한 뱀파이어 소설이 있다. <트와일라잇>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나온 어떤 뱀파이어 이야기와도 다르다. <스트레인>의 뱀파이어는 아름다운 여자에게 끌리지 않고 유혹하지도 않는다. 또 몇 분 만에 2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의 피를 흡수할 수 있고 굳이 이빨을 사용하지 않고도 손쉽게 인간의 피를 얻을 수 있다. 그의 존재는 인간들에게 있어 질병이자 재앙이며 이야기는 이 순수한 포식자로부터 인간의 멸종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자네는 지금 검은 공단을 걸친 우울증 환자나 어금니를 숨긴 꽃미남정도를 생각하고 있겠지. 아니면, 바깥세계를 향한 저주에 갈등하는 실존적 존재라든가, <벨라 루고시, 애봇과 코스텔로를 만나다> 정도쯤 되는 영화를 떠올리고 있을 거야.”
<스트레인> 2권 p.26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을 알게 된 건 그의 영화 <판의 미로>에서였다. 개봉 첫 날, <해리포터>나 <나니아 연대기>를 연상시키는 극장 홍보용 포스터를 본 친구와 나는 주저 없이 <판의 미로>를 선택했고, 우는 아이들의 소음과 극장을 뛰쳐나가는 아이와 엄마들 속에서 영화 관람을 마쳐야 했다. 홍보로 인한 실패였다지만 누구도 그 영화의 매력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아이가 볼 영화는 아니었지만) 시종일관 어두운 영화 분위기와 소름끼치는 형상의 요정, 괴물들은 우리가 가진 판타지 정석의 틀을 부숴버릴 정도로 강렬했고 또 인상적이었다. 그런 그가 뱀파이어 소설을 들고 돌아왔다. 전 세계에 밀어닥친 뱀파이어 열풍에 편승한 소설이라는 생각을 한 독자들도 있겠지만 난 전적으로 기예르모 델 토로란 이름에 의지했다. 그의 이름을 달고 나올 책은 그 이상의 뭔가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어떤 뱀파이어를 창조했을 지 궁금하기도 했고.
깊은 밤, JFK 공항에 한 비행기가 착륙했다. 그러나 비행기는 착륙한지 몇 분 만에 여객기 불이 모두 꺼진 채 움직이질 않는다. 기계결함을 의심하는 관제탑 직원들. 하지만 이어 들어간 특공장교들에 의해 승객들이 모두 죽었음을 알아낸다. 착륙한 지 불과 6분 만에 일어난 일이라 관계자들은 테러로 인한 바이러스를 의심하게 된다.
연락을 받고 온 질병관리센터의 에프와 노라는 그 속에서 생존자 4명을 발견하고 격리한다. 그리고 화물칸에서 흙으로 속을 채운 커다란 직육면체 나무상자 또한 발견하는데, 화물목록에 기록이 없는 이 나무상자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리고 집으로 돌아간 생존자들의 변화와 함께 시체 보관실에서 시체들이 전부 없어지는, 설명할 수 없는 사건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는 곧 엄폐이자 일식이다. 나는 인간을 마시기 위해 왔노라.
책에서 ‘마스터’의 존재감은 엄청나다. 큰 키에 말라비틀어진 검은 피부, 날카로운 노란 이빨에 속이 들여다보일 정도의 투명한 피부로 묘사되는 그의 모습은 세상에 이치에 맞지 않을 뿐더러 누구보다도 막강한 존재감을 자랑한다. 또 그와 마주치는 살아있는 존재들은 어떤 이는 경외감으로, 어떤 이는 절대적 공포심으로 무릎을 꿇게 된다. 이와는 달리 다소 실망스러웠던 인물은 질병관리센터의 에프였다. 비행기의 이변을 빨리 알아채고 ‘마스터’에게 대항하는 인물이지만 여느 할리우드 재난영화의 주인공처럼 전형적인 인물이다. 할리우드 재난영화를 보면 대부분의 주인공이 각 분야의 전문가인 과학자나, 교수, 의사 등인데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상황을 헤쳐 나간다는 공통점이 있다. <스트레인>의 에프도 다르지 않았다. 아들 ‘잭’을 위해 헌신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감동적이지만 진부했다. 아마도 나중에 할리우드에서 영화로 제작되는 게 아닌가 생각 되는데 그걸 의식한 듯 한 에프의 캐릭터가 아쉬웠다.
<스트레인>에서는 과거 스페인 독감에서부터 최근의 SARS나 신종플루까지 요즘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바이러스에 대해 말한다. 또 책 곳곳에 9.11에 대한 공포의 잔재가 깔려 있는데 비행기의 이상에 제일 먼저 테러 의심을 한 것도 이와 상통한다. 결국 뱀파이어라는 소재를 빌려 현대 사람들의 근원적 공포심을 자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제일 무서운 건 공황상태라고 했던가.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사람들은 대항할 힘조차 잃고 마는데 바로 조금 전까지 친절한 이웃이었고 주말이면 교회에서 만나던 친구들이 피를 얻기 위해 자신의 몸을 찢는 다는 걸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거대한 재앙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가족조차 지킬 수 없는 인간의 무력함을 나타낸다. 뱀파이어에게 피를 빨리고 점점 변화하는 인간들이 피를 빨기 위해 귀소본능처럼 집부터 찾아간다니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 모든 상황과 기존의 뱀파이어의 틀을 깬 자잘한 설정까지 창조해 낸 기예르모 델 토로에겐 역시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척 호건과 공동작이지만)
2권의 끝에 ‘마스터’와 같은 고대의 존재들이 더 나온다. 이어지는 얘기에서 뱀파이어와 인간의 전쟁이 될지 협정을 깬 뱀파이어와 그렇지 않은 뱀파이어와의 전쟁이 될지 궁금하다. 전쟁은 누구의 승리가 될 것인가. 이미 경고의 등은 켜졌다. 일주일이면 맨해튼이, 석 달이면 미국이, 반년이면 전 세계가 그들의 손아귀에 떨어 질 위기에서 인간들은 다음 세대를 맞이할 수 있을까? 이야기는 아직 1부만을 보여줬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