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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 - 魔人, 판타스틱 클래식 01
김내성 지음 / 페이퍼하우스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우리나라 추리소설은 이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스릴러, 추리소설 하면 영·미권 소설이나 일본 소설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물론 나도 그랬다. 우리나라 장르문학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이기도 하고 나쁘게 말해 큰 관심이 없었다. 이번에 한국 최초의 본격 장편 추리소설이라는 『마인』을 접할 기회가 있어 읽게 되었는데 처음엔 책 두께에 놀랐고 두 번째엔 재미에 놀랐다. 김내성의 『마인』은 1930년대의 우리나라 문학을 지식인들의 고뇌와 가족사, 도시문명의 병폐 등으로 한정 짓고 있던 나의 무지에 부끄러움을 안겨주었다.

한국 최초의 추리소설가 김내성(위)과 대표작 ‘마인(魔人·1939년 출간)’의 19판 표지 (출처 서울신문 2009-03-13일자)
김내성은 누구인가? 김내성은 일본 유학시절부터 잡지에 추리소설을 연재해 상을 받을 만큼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던 사람이었다. 고국으로 돌아와 조선일보에 『마인』을 연재하면서 큰 성공을 거두고 우리나라 문단에서 추리소설 작가로 독보적인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작품을 찬찬히 보자니 눈에 띄는 작품이 하나 있었다. 바로 『쌍 무지개 뜨는 언덕』이다. 어렸을 때 굉장히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었는데 같은 작가의 책이라니 깜짝 놀랐다. 거기다 『쌍 무지개 뜨는 언덕』은 추리소설과는 내용이 먼 책이다. 같은 작가의 다른 장르의 소설이라니 흥미로운 부분이다.
천구백삼십X년, 사월 십오일 세계적 무용가인 공작부인 주은몽이 결혼을 앞두고 저택에서 성대하게 생일 파티를 열고 있었다. 그곳에서 은몽은 주홍빛 광대 옷을 입은 어릿광대에게 습격당해 칼에 찔리는 부상을 입지만 그 광대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만다. 이상한 일은 결혼식에서도 일어나고 신출귀몰한 광대는 또 다시 사라지고 마는데...
그 뒤 광대의 정체가 은몽이 어렸을 때 할머니와 방문한 금강산 백도사의 애기 중 해월이라는 게 밝혀진다. 철없던 시절에 정을 나누던 일을 못 잊은 해월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려는 은몽에게 복수를 하려는 것이었다. 해월의 복수로 남편 백영호를 잃고 자신을 지키려는 사람들을 한명한명 잃으면서 은몽은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리게 된다. 사건을 풀기 위해 명탐정 유불란과 미남 변호사 오상억이 등장하면서 사건은 점차 해결 되는 듯했지만 희생자만 더 늘어갈 뿐이었다. 해월은 어떤 자인가? 사흘 안에 해월을 잡겠다는 유불란의 약속은 지켜질까?
이야기는 은몽, 유불란, 오상억의 삼각관계와 미스터리 요소를 적절히 배치해 풀어간다. 인간의 탐욕과 복수, 애정이 주요 요소인데 탄탄한 스토리와 극적인 반전이 이 소설이 나온 지 70년이 흘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도록 뛰어나다. 1930년대 당시 경성의 거리와 과학수사가 도입되기 전 발로 뛰는 수사과정이 잘 묘사되어 있어 독자들에게 그 당시의 모습을 상상하는 즐거움을 안겨주기도 한다.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인물은 탐정 유불란이다. 아르센 뤼팽을 만들어 낸 작가 모리스 르블랑의 이름을 따 만든 이름이라는데 그래서 그런지 뤼팽처럼 변장에 능한 것으로 나온다. 또 그 능력으로 이중생활을 즐기면서 여러 정보를 모으는 것으로 보인다. 재밌는 점은 여느 탐정과는 다르게 사랑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다는 것이다. 특히 탐정은 절대로 사건 중의 이성과 연애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수칙을 따라야 한다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은몽에게 끌리는 자신에 대해 고민 할 때는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오상억에게 질투를 하면서 은몽을 끝까지 지키려하는 모습은 남자 중의 남자요, 큰 키에 사건을 해결하는 비상한 머리까지 갖추다니 요즘 말로 하면 엄친아가 아닐까? 하지만 너무 자주 나오는 애정 씬은 극 몰입을 방해하기도 하는데, 뒤에 정혜영 대구대 교수가 쓴 해설을 보니 그 당시 조선이 <장한몽>같은 신파극이 휩쓸고 있었고, 이 이야기와 인물의 차용이 조선 사람들로 하여금 탐정소설에 더 쉽게 다가서기 위한 장치임을 추정하는 글이 나온다. 순수문학이 꽃 피우던 시절, 정통탐정물을 쓸 능력이 있는 작가가 작가로서의 고민 끝에 추리소설에 신파적 요소와 친절한 설명을 어쩔 수 없이 넣었다면 참 안타까운 일이다.
또 읽으면서 식민지 현실 같지 않게 일본 사람이 한 명도 나오지 않는 다는 점과 너무나 화려한 등장인물들의 생활이 이상하게 생각됐지만 1930년대는 문학이나 언론에 대해 검열이 심했던 시기였다. 글 하나가 신문사를 문 닫게 할 정도로 감시가 심했으니 섣불리 다른 이야기를 쓸 수 없었다는 것이 이해가 됐다. 작가가 역사성을 배제한 판타지적인 1930년대의 경성을 창조해 냈지만 그리도 곳곳에 시대를 반영한 요소들이 있어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난 우리나라 추리소설의 계보를 몰랐을 것이다. 다른 작품 『쌍 무지개 뜨는 언덕』을 보았지만 김내성이라는 작가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인』을 봄으로써 조선 말기 우리에게도 추리소설을 쓴 작가가 있었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올해는 김내성 작가의 탄생 백주년이자『마인』이 나온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크게 기념을 할 수 없어 안타깝지만 늦지 않게 김내성이라는 광산에서 마인이라는 금을 캐준 판타스틱 편집부에 감사드린다. 앞으로도 많은 금을 캐주시길. 그리고 김내성 걸작 단편선이 나온다고 알고 있는데 ‘태풍’이 속해있는지 궁금하다. 탐정 유불란이 나오는 첩보소설이라니 보고 싶은 마음이 불끈불끈 솟는다.
덧) 책을 읽다 보면 생소한 문어체의 말투가 나온다. 일러두기를 보니 원문의 어감과 어투를 살리기 위해 가능하면 수정하지 않았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 예를 들어 “이 품은 나의 피난처, 피난처!” 라든가 “유 선생님의 말씀은 정신병자!” 같은 말이다. 생소함도 잠시. 어느 샌가 따라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