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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표류기 - Castaway on the Moo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저녁 8시가 넘은 시간. 30분 째 기다린 친구가 거의 다왔다며 급하게 전화가 왔다.
오후에 갑자기 약속을 잡은 터라 영화를 예매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원래 보기로 한 영화는 너무 늦은 시간에 상영하는 바람에 다음날이 걱정돼 또 다른 친구와 영화상영표를 보며 고민하던 중 『김씨표류기』가 생각났다. 시사회 평점이 꽤 좋았던 걸로 기억해서 보고 싶은 영화 일 순위까지는 아니었어도 극장에서 내리기 전 꼭 보리라 다짐했던 영화이기도 했다. 늦게 표를 끊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사이드 좌석에 앉게 됐지만 영화에 대한 기대감으로 우리는 즐겁게 영화 관람을 시작했다.
감독 이해준.
처음 영화를 보기 전, 감독에 대해 많이 알아보는 편이다. 감독 스타일을 요리조리 살펴보고 전작들과 비교해 보는 재미가 쏠쏠했던 것이다.『김씨표류기』의 감독이 이해준 씨라는 걸 알고 옳거니! 하고 외친 건 나 뿐 만이 아닐 거다. 전작 『천하장사 마돈나』에서 여자가 되고 싶어 수술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씨름을 하는 남자아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우리나라 성장영화의 자존심을 세워준 감독이 아닌가. 비록 『김씨 표류기』가『박쥐』와 『마더』사이에 개봉이 되어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고 있다지만 3년 전에도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와 『괴물』사이에 개봉됐다고 한다. 그래도 두 영화와 전혀 다른 스타일로 지금까지 사람들 사이에 화자 되고 있으니 이만하면 큰 성공이 아닐까?
감독 이해준은 전작에서 남다른 소재로 전 세대가 공감 할 수 있는 따뜻한 영화를 만들어 냈다. 이번 작품『김씨 표류기』도 남다른 소재로 판타지지만 사람사이의 연대감을 강조하는 따뜻한 영화다.

그 남자 김씨 이야기
대출 빚은 산더미처럼 늘어가고 여자 친구는 떠나버렸다. 한강 다리 위에 서있던 남자, 미련 없이 한강에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의 자살시도는 그가 밤섬에 흘러가게 되면서 불발로 끝났다. 처음엔 섬에서 나가기 위해 못하는 수영도 해보고 유람선의 관광객에게 도움을 요청해 보지만 모두 실패하고 휴대폰의 배터리도 나간 상황.
밖에 나가봤자 좋은 일 하나 없고 남자 김씨는 밤섬에서 살기로 결심한다. 식량? 옷? 식량이야 구하면 되고 어차피 여름이니 옷도 신경 안 써도 되고. 남자 김씨는 아무도 자신을 보지 못할 거란 확신 하에 기세등등하게 외친다. 나 여기 있다고!!

그 여자 김씨 이야기
3년 째 방에서 나오지 않는 그녀는 은둔형 외톨이이다. 몇 번의 클릭만으로 자신을 바꿀 수 있는 인터넷이 여자 김씨의 세상 전부다. 유일한 취미인 달 사진 찍기를 하던 어느 날 밤, 그녀의 눈에 밤섬에 살고 있는 외계생명체가 포착된다. 그리고 변태이며 더러운 걸 좋아하는 외계생명체를 지켜보는 것이 여자 김씨의 은밀한 즐거움이 되어간다. 열심히 살아가는 그를 보며 그녀는 그와 일촌을 맺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에게 말을 걸기 위해 3년 만에 외출을 감행한 그녀. 과연 그녀의 외출은 성공 할 수 있을까?
이 영화는 상영시간 대부분을 주연배우 두 명이 이끌어 간다. 처음에 원맨쇼처럼 오버스럽다고 느껴진 정재영의 연기도 주인공 여배우라기엔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병색이 완연해 보이는, 정려원의 연기도 영화를 보는 사이에 어느 샌가 영화 속으로 녹아내려갔다.
사실 영화를 보기로 한 결심에는 배우 정재영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 정재영은 감독이 누구든지 간에 그 영화를 자신만의 영화로 만들어 낸다. 그게 나쁘냐 하면 또 그건 아니다. 전에 장진 감독이 TV에 나와 이렇게 말했다. 시나리오를 돌리다가 안 되면 최후의 보루로 정재영에게 보낸다고. 농담처럼 얘기 했지만 장진 감독도 정재영이라면 자기영화의 인물을 독보적인 정재영표 캐릭터로 만들어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또 정려원은 여배우라면 선택하기 힘든 캐릭터를 잘 소화했다. 영화를 위해 살을 많이 뺐다고 들었는데 어찌나 말랐던지 영화 보는 내내 안쓰러웠다. 하지만 창백한 피부와 깡마른 몸에서 나오는 연기가 이 역에 정려원이 아니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만큼 잘 어울렸다. 지금 사극 자명고에 나오고 있지만 이 여자 김씨역이 훨씬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좋은 감독과 좋은 시나리오, 그리고 연기에 대한 노력만 있다면 계속 성장 할 수 있는 배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김씨표류기』엔 외설적인 장면이라든가 심한 욕설이 나오지 않는다. 온가족이 손잡고 관람 할 수 있는, 모든 연령이 보고 공감 할 수 있는 가족영화다. 입소문이 퍼지면 가족단위로 많이 보러 갈 것 같은데 앞서 말했듯이 시기가 어설프다. 워낙 대작들 사이에 끼어있어서 이대로 묻히진 않을까 걱정이 된다. 한달이나 두달 먼저 개봉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도 해보지만 영화를 보고 온 사람들이 괜찮은 평을 인터넷에 올리고 있으니 (나를 포함해서) 앞으로 어떤 선전을 해줄지 기대가 된다. 감독 인터뷰에서 이해준 감독이 박찬욱 감독과 봉준호 감독과 작업시기가 3년 단위로 같은가 보다고 다음엔 작업시기를 바꾸겠다고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걸 듣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도 다음엔 꼭 시기를 잘 선택해 개봉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렇게 잘 만든 영화는 꼭 흥행해줘야 하는 법이니까.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모두 고립된 섬에 표류하는 사람들이다. 희망 없는 세상에서 사는 건 너무 힘들다. 나만의 섬에서 “나는 만족해” 하고 자기위안을 하며 하루하루 살아가지만 누군가 와 이곳에서 꺼내 주기를 바라고 있진 않은가? 영화에 나오는 두 김씨들은 각자의 섬을 표류하는 외로운 사람들이었지만 서로를 알아봤을 때 용기를 내어 다가간다. 그 모습에 행복함을 느낀다는건 우리의 감성이 아직 메마르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건 아닐까.
남자의 빚은 어떻게 될까. 두 남녀는 연인이 될 수 있을까라는 소소한 궁금증이 남았지만 영화는 참 만족스러웠다. 나도 오랜만에 희망의 냄새를 맡은 것 같았으니까. 웃음으로 무장했지만 그 속에 담겨진 희망의 기운을 숨길 수 없는 영화, 많은 분들이 보고 나와 같은 감동을 느꼈으면 좋겠다.
+) 여담이지만 밥을 안 먹고 영화를 봐서 그런지 짜장면이 나오는 장면에서 배가 많이 고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