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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정치학 - 와인 라벨 이면에 감춰진 불편한 진실, '최고급'와인은 누가 무엇으로 결정하는가
타일러 콜만 지음, 김종돈 옮김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사실 난 와인에 대해 잘 모른다. 프랑스가 와인으로 유명하다는 누구나 다 아는 상식만 갖고 살아온 지 오래다. 와인에 대해 잘 알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만 술을 좋아하지 않는 내게 와인은 그냥 술의 일종으로만 보였다. 와인을 마시는 일이 요 몇 년 새 유행하면서 누구나 읊는 와인 이름을 나만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맛있다는 와인이 왜 내 입에만 쓰게 느껴지는지도 궁금했다. 서로가 통해야 진정 서로를 이해하는 법. 난 와인을 정복해 보자는 거창한 포부까지는 아니었지만 어디 가서 와인의 대해 상식을 뽐낼 수는 없을 까라는 다소 불순한 의도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와인의 정치학?!
사실 어떤 재화든 정치적 세력은 존재해왔다. 돈이 되는 것엔 사람들이 몰려온다. 당연한 이치지만 이 책은 와인에 대해 다루고 있어 흥미롭다. 요즘 와인의 대중화로 가격이 저렴한 와인들도 더러 있지만 와인이라는 것이 아직까지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컵대를 잡고 우아하게 마시는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또 보관하는 장소나 온도에 따라 크게 변질되는 까다롭고 새침한 술이니 대체 어떤 과정에 정치적 요소가 자리 잡고 있는지 궁금했다.
책은 우선 ‘와인의 나라’ 로 알려진 프랑스에 대해 다루고 있다. 프랑스 와인의 역사가 긴 만큼 그 명성을 지키기 위해 생산자나 국가 모두가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처음부터 와인이 프랑스에서 보편적이진 않았다고 하는데 와인이 생산되는 지역은 풍부하게 즐겼지만 그렇지 못한 지역은 와인을 그다지 즐기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 철도가 들어오면서 상황은 크게 바뀌게 된다. 교통의 발달과 수요의 팽창으로 와인산업은 황금기를 맞이하게 되고 그 시기가 정점에 다를 때 쯤 13억병이라는 어마어마한 양을 수확한다.
이때 이 와인들을 바다나 육지를 이용해 운반했던 중개인들이 점점 권력을 얻게 된다. 그들은 나폴레옹 3세의 요구에 따라 생산되는 와인을 61개의 서열로 나누게 되면서 과도한 권력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이 서열이 와인의 품질이나 생산되는 토양을 대상으로 한다기보다 제조업자를 대상으로 한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고급와인으로 분류된 생산업자가 땅을 계속 매입해 와인을 생산할 경우 새로운 땅에서 난 와인들을 이전의 낮은 가격에서 높은 가격의 라벨을 붙여 팔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국에서의 와인의 역사는 프랑스와는 전혀 다른 출발을 한다. 자연적으로 와인을 만들어 왔던 프랑스와는 달리 인공적으로 들여왔고 와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도 싸워야 했다. 포도나무뿌리진디와의 전쟁이라든가 교통발달로 인한 와인산업의 성행, 시장의 안정화 등 대부분이 프랑스와 비슷한 과정을 밟아왔지만 결정적으로 달랐던 건 주정부의 태도였다. 뿌리나무진디로 와인산업이 타격받고 많은 생산업자들이 파산했지만 주정부는 이런 상황에 개입하거나 조사를 하지도 않은 것이다. 철저하게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했던 생산업자들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성공을 거두고 30여 년간 미국을 휩쓸었던 금주령에서도 살아남았다.
1970년 대 들어 와인이 중요산업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미국에서도 원산지표시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떼루아를 중요시 여겼던 프랑스와는 달리 모든 포도가 그 지역에서 날 필요가 없었고, 이 지역에서 재배된 포도로 만들어진 와인은 라벨에 그 사실을 표시 할 수 있었다. 포도품종이나 수확량이나 와인 제조의 독특한 관행보다는 표시된 땅에서 나는 85%의 포도만 사용해도 그 지역의 명칭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 지역이 너무나 광범위 했다는 것에 있었다.
현대에 들어 와인의 원산지 시스템이 혼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원산지시스템은 여러 단체와 와인제조업자들이 엮이면서 아직 예전의 원산지 시스템만을 고집하고 있었다. 하지만 점차 개혁자들이 나타나면서 프랑스 포도재배문화의 윤리적이고 책임 있는 모습을 요구하고 있다.
결국 이 시스템을 지탱하고 있었던 것은 개인이나 집단의 최대 이익보다는 집단에 이익이 골고루 돌아가길 바라는 사람들의 바람이었던 것이다.
여러 흥망성쇠를 겪고 와인의 사업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유럽연합과 미국의 와인명칭과 와인무역에 대한 원만한 협의, 그리고 프랑스에서의 와인제조와 홍보방법에 대한 유연한 규칙 등 느린 변화지만 여러 곳에 거미줄처럼 늘어져 있는 이권을 생각하면 그 시도는 놀라울 만하다.
책을 읽고 나니 와인을 마시고 싶어졌다. 한 잔의 와인이 유통업자나 생산자, 판매자, 평론가 같은 사람들이 유기적으로 만들어낸 정치적 메커니즘의 결과일터이니 알고 마시는 것과 모르고 마시는 것, 맛의 차이가 있을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