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대학자인 퇴계 이황은 율곡 이이와 함께 우리 나라 유학계의 큰 기둥을 이루었던 분이다.  

성리학이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크게 일어날 때, 체께를 세우고 새로운 학설을 덧붙여 완성시켰다. 교육에도 뜻을 두었던 이황은 도산 서원을 세워 훌륭한 인재를 길러 내는 데 전념하기도 하고, 최고 유학 교육기관인 성균관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능력 있는 관리 교육에 힘썼다.  

또 두 차례나 지방의 수령으로 나가서 백성의 고통과 농촌의 현실을 직접 보고 겪기도 했다. 이황의 사상과 학문은 후세에도 계승이 되어 우리 나라 유학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뿐만 아니라 일본 명치 시대의 교육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황은 벼슬보다는 학문을 더 좋아하여 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35년 동안 관직 생활을 하면 서 수무 번 이상 벼슬을 사양하고 그 때마다 고향에 내려가 학문에만 전념하려 했다. 명종 임금과 여러 신하들은 이황이 시골에 묻혀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많은 신하들이 임금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이렇게 하여 이황은 마지못해 벼슬을 하였지만, 기회만 있으면 벼슬을 내놓고 시골로 내려가 책을 보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명종 임금이 돌아가시고 선조가 왕위에 오르자, 이황은 예조 판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황은 이번에도 병을 핑계로 벼슬을 사양하고 말았다.  

나는 이책을 읽고 임금의 말에도 자신이 벼슬을 포기하는 것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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