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함께 걷는 길 담쟁이 문고
이순원 지음, 한수임 그림 / 실천문학사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푸른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다정하게 걷는 두 부자의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이는 내가 우리집 두 남자에게서 몹시 기대하는 아름다운 풍경이기도 하다.

나는 이 책을 남편과 아들에게 읽히고 싶어서 기꺼이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에 매우 흡족해하고 있는 중이다.

딸이자 엄마인 나에게는 이런 풍경이 아무런 관련도 없을 것 같지만, 이 책을 받고서 갑자기 떠올랐던 기억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내 나이 9살 무렵의 기억. 방죽길을 지나서 넓다란 신작로길을 타박타박 걸었었다. 그리고 호젓한 산길도 끝없이 걸어갔던 기억...그건 아마도 우리가 살던 마을보다 더 깊이 시골로 들어가면 나왔던 일가친척집을 방문하던 길이었다. 나이들어 세상을 타계하신 집안어르신을 문상하러 가시던 길에 아빠는 둘째딸인 나를 동행하셨고, 차편이 용이하지 않았던 시절에 어린 딸과 함께 가던 그 길에서 아빠는 나에게 노래를 불러보라고 다정한 주문도 하셨었다. 그 장면의 기억은 아주 선명하다. 아빠 마음에 들고 싶었던 나는 단지 '아빠'라는 단어가 나온다는 이유 하나로 "꽃밭에서"를 열창했었다. 한 명의 관객은 내 노래가 끝나자 박수를 쳤고, 나는 앞서가시는 넓은 아빠 등을 바라보며 혼자서 자랑스러움과 무안한 마음에 멋쩍어했던 기억. 그 기억은 오랜시간 나를 참 행복하게 했고, 아빠와 나 사이를 긍정적인 관계로 규정짓는 데 큰 몫을 했다.

강릉의 할아버지를 방문하는 길, 작은 아이와 아내는 차에 태워 보내고, 저자인 이순원님은 큰아들과 함께 대관령 고갯길을 걸어서 넘는다.

 

그 길은 신사임당이 어린 이율곡의 손을 잡고서 넘던 길.  그 길을 3년 전 경포대 해수욕장 가던 길에 지났었고 사임당의 시비를 만났다.

 

대관령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고



 

늙으신 어머니를 강릉에 두고
외로이 서울길로 떠나는 이마음
때때로 고개돌려 북평쪽 바라보니
흰구름 아래로 저녁산이 푸르구나

 

 

 그 길에서 아빠는 아들에게 길에 담겨 있는 역사를 들려준다. 아들의 고조할아버지에서부터 아버지가 지나왔던 길에서의 이야기. 그 이야기는 곧 인생의 이야기이고, 뿌리로부터 이어져 오는 오늘의 이야기이며, 한 나라의 이야기이가 되기도 한다.

대관령 고갯길, 그 굽이굽이를 돌면서 저자는 농사짓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타인에 대한 배려의 마음을 들려주고, 고향의 가치에 대해서도 들려준다. 무료해하는 아들을 위해 풀이름대기 게임도 하는 부자의 모습은 울타리 안에서 아침저녁으로 마주쳤던 그 부자의 모습이 아니다. 서로를 더 깊이 새롭게 알아가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희망과 위로를 함께 얻는다. 서로가 너무도 소중하고 사랑하고 있는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대화를 나누는 가족의 모습은 그리 쉽게 그려지지 않는다.

글을 쓰는 아빠의 소신과 고통을 알게 된 아들은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는 으젓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빨리빨리의 세상에서 걸음으로써 자각하게 되는 풍경, 이를테면 스쳐지나갔던 산이나, 나무, 하늘, 그 이름들을 하나하나 불러보는 소중한 시간을 갖는다.

물푸레나무로 만든 책상을 보내주신 할아버지의 깊은 마음이나 엄마의 책상을 확보해주신 아빠의 마음은 가장 가까운 가족이 진실된 마음으로 서로를 어떻게 배려하는지 보여준다. 계획하지 않았던 깊은 대화들이 순조롭게 오고가는 대관령고갯길. 인생길도 어쩌면 이와 같으리라. 아무리 굽이굽이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길지라도 서로가 속을 나누며 발맞추어 걸어간다면 어렵게만 느껴졌던 그 길도 쉽게 혹은 아름다운 의미로 남는다는 것을.

대관령을 길을 다 내려가니 어느새 어두컴컴한 초저녁길. 집으로 들어가는 샛길 입구에서 들려오는 다정한 음성은 또 하나의 아버지인 할아버지의 구부정한 모습이다.

저자가 걸어온 삶의 고비마다 언제나 가장 큰 노란 손수건을 들고서 마중나오셨던 아버지. 그 기다림으로 저자가 살아온 삶의 가장 큰 길이 되어주셨다는 고백은 가슴 먹먹한 울림을 준다. 아버지가 아닌 이 땅의 어머니도, 그리고 아들이 아닌 이 땅의 모든 딸들도 꼭 읽어봐야할 책.  해서 2011년 개정 초등5학년 교과서에 수록이 되었단다.

전편을 다 읽어보길 권한다. 자식을 기르는 어버이라면 깊이 공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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