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 - 오래된 사물들을 보며 예술을 생각한다
민병일 지음 / 아우라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몽블랑 만년필은 내게 있어서 어떤 이야기다. 단순히 하나의 만년필에 그치지 않고 여러가지 의미를 내포한 하나의 기호이다.

손에 쥐면 손 안 가득 꽈악 차오면서 묵직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몽블랑 만년필.

연륜이면서 깊은 사랑이며 약속이자 삶의 무게로 읽혀졌던 기호였다.

 

약 15년 전, 지금은 베트남에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친구가 박완서님의 <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함께 까만 만년필을 선물로 주었다.

만년필은 오랜 시간 갖기를 소망해왔던 것이었지만, 왠지 내 손으로 구입한다는 것은 그 의미를 퇴색하게 하는 거 같아 마냥 기다려왔는데,

기대하지도 않았던 뜻밖의 사람에게 선물을 받았던 것이다. 친구는 그 만년필에 많은 의미를 담았었다. 소설 속 대사처럼.

 

4년 전, 이삿짐을 꾸리면서 살림살이 깊은 곳에 잠자고 있던 만년필을 찾아내곤 왜 그리고 반가왔던지..

내 지난 청춘과 완성하지 못한 꿈을 만난 것만 같은 기분... 부드러운 수건으로 꼼꼼히 먼지를 닦아내곤 검은 잉크를 채워 의미없는 글자를 써보니.

만년필은 시간을 거슬러 생생하게 글씨를 그려내 주었다.

 사무용품에 특별히 애착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해서 사무용품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가게들이 많이 생기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중에서도 만년필에 대한 개인의 기호도는 각기 그 취향과 깊이를 달리하며 한 개인의 모습을 담아낸다.

만년필에 대한 이야기는 이 책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어디 만년필 뿐이겠는가..고릿적 이야기를 품을 만한 것들은 그 무엇이건 간에 저자의 시선을 비껴갈 수 는 없었다.

 

저자는 두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었으며, 출판사의 편집주간으로 있었으나 어느날 문득 예술에 대한 동경으로 훌쩍 독일로 떠나게 되고 외로운 독일 유학생활 중 엔티크 물품에 지극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벼룩시장과 엔티크시장을 돌면서 여러가지 독일사람들의 고릿적 물건들을 수집하게 된다.

그것은 하잘 것 없어보이는 몽당연필에서부터 유명한 화가의 그림까지...매우 다양하다.

그 물건들이 어떤 경위로 자신과 인연이 닿았는지에 대한 이야기, 개별의 물건에 담겨 있는 아름답고 소중한 사연들, 물건에 대한 감상, 그리고 때로는 저자의 꿈이 담긴 물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예술을 전공한 전문가답게 매우 깊이있는 시선으로 들려주고 있다. 그 표현 또한 시인이어서인지 매우 아름답다.

 

독일은 예술과 철학, 문학과 음악, 과학 등의 역사가 깊고 경제적으로 잘사는 나라여서인지 엔티크풍의 물건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맞춤한 나라이지 않을까 싶다. 엔티크 풍의 문화를 연상할 때 개인적으로 유럽의 여러나라 중에서 가장 먼저 독일을 떠올렸다. 그것은 내가 간접적으로나마 알고 있는 나라가 독일이어서이기도 하다.

책을 몇 장 넘기지 않아,"해질녘 슈바빙 거리의 레몬빛 가스등이 켜지는 시간"이라는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책속 글귀가 절로 연상되었다.

전혜린의 글들에서는 지적인 감수성과 고전적인 정취가 한껏 묻어나는 정서가 존재했었고, <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을 만나면서 25년 전 여고시절에 밤을 새워 읽었던 전혜린의 흔적과 해후하는 느낌이었다. 저자는 책속에서 간략하나마 전혜린의 슈바빙 거리를 언급하고 있기도 한다.

 

대체적으로 지나간 물건에 애착을 갖는 사람들의 특성은 비슷한 거 같다. 잔정이 많다고 해야 할까?

비록 사물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그 안에 따스한 숨결이라도 흐르는 양, 쉬이 버리지 못하고 집 안 가득 이곳저곳에 쌓아두고 있으며 때때로 혼자만의 시간에 그 물건들과 조우라도 할라치면 한없는 과거의 시간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

 

첫월급타서 제일 처음 구입한 것은 인켈이라는 회사제품의 오디오였다. 지금 뒷방에 쳐박혀있지만, (옆지기에게 버리지 않는다고 맨날 구박당하고 있다.ㅠㅠ). 그 당시 소중하게 하나, 둘 사서 모은 LP판들이 각각의 사연들을 품고서 언제고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줄 날을 기다리며 상자 안에 잠들고 있다.

태국산 편지봉투칼은 똑같은 것으로 두개를 가지고 있었다. 한 날 동료가 욕심을 내길래 선뜻 하나를 줘버렸는데....뒤늦게 아쉬운 마음이 들곤 한다.

실패, 참빗, 청동접시, 작은 들국화가 그려진 투박한 접시 몇개, 복자가 쓰여진 대접, 오래된 필름카메라, 등..

내게 있는 고릿적 물건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는 시간...그 시간 속에 함께 했던 사람들. 이야기들...그리고 지금보다 젊었던 나..

옛 것을 통해 잊었던 꿈을 기억해내고, 잃어버렸던 감수성을 불러내는 내 고릿적 물건들...

<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은 잊고 있는 기억들을 불러내주는 묘한 마력이 있는 책이다. 낡고 흐릿한 것들을 가장 소중하게 그릴 줄 아는 마음을 배우게 해준다.

모처럼 갖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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