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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경 - 개정판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0년 12월
평점 :
작가정신의 승리라 불리는 조정래님을 맨처음 알게 된 것은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통해서였다.
10권의 책이 나란히 꽂혀 있던 책장을 보며 낯선 책을 읽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대하소설을 좋아했던 나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완독하리라는 각오로
드디어 1권의 첫장을 넘겼을 때, 나를 강하게 흡입했던 그 마력을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잊을 수가 없다.
이후 <아리랑>, <한강>을 연달아 읽으면서도 이상하게도 작가의 대하소설이 아닌 다른 책들을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이렇게 <불놀이>에 이어 <대장경>을 접하게 되면서 다시 한번 작가의 소설세계에 대한 깊은 외경의 마음을 갖게 되었다.
참으로 대단하시단 말씀 외에는 그 어떤 말씀을 할 수 있겠는가.
표지속 작가의 모습은 내 눈에는 민족정신을 대표하는 지사의 모습이 이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품게 한다.
'시공을 초월한 예술혼'이 담겨 있는 <대장경>은 작가의 처녀 장편소설이다.
우리는 지금도 불법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마음을 담아 팔만대장경이 완성되었다고 역사시간에 배우고 있다. 하나, 작가는 32살에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이 민족의 거대하고 거룩한 문화유산일 수는 있으나, 불법의 힘으로 제작 당시 몽고의 난을 물리칠 수 있다는 당시 집권세력의 정치술수를 정면으로 부정하여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대장경>은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위대하고 칼칼하고 싱싱한 예술품의 가치를 담아낸 것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대부분 학생들은 수학여행을 통해서 합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처음 만난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호국정신에 대해서, 더 나아가 경판제작과정에 따른 과학적인 방법을 이용한 조상들의 놀라운 지혜에 대해서 배우게 된다.
경판전 안에 마치 서고처럼 일렬로 겹겹히 나열되어 있는 경판들은 그 과정이나 배경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면 그냥 스치는 보물에 지나지 않는다.
금관처럼 화려해서 눈을 끄는 것도 아니고, 탑신이나 시대양식을 드러내는 건축물처럼 쉽게 와 닿는 이미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많은 수천만 개의 글자 하나 하나가 오자·탈자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게 판각했다는 사실이 놀랍고 경이로와서 오히려 현실감이 떨어지기에 믿기지 않을 뿐. 그러나, 오랜 시간 고스란히 형태의 변형도 없이 보관해올 수 있었던 지혜, 경판전 주위에 숯을 묻은 이유, 창문을 위쪽과 아래쪽의 방향을 달리 내어 습도와 외부의 빛으로부터 보호했다는 사실, 제작에 소요되었던 시간, 인원, 신심, 합심, 등등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 마주 대하면 팔만대장경은 예술품에 대해서 문외한이었던 사람에게도 매우 놀라운 그래서 더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다가오게 된다.
역사적 사실을 살펴 보면, 고려 현종 때 의천이 만든 초조대장경이 몽고의 침략으로 불타 없어지자 다시 대장경을 만들었으며, 재조대장경이라고도 하며, 또한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만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몽고군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보고자 하는 뜻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새긴 것이다. 원래 강화도 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던 것을 선원사를 거쳐 태조 7년(1398) 5월에 해인사로 옮겨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저자는 <대장경>에서 그 줄거리는 역사적 사실을 기본으로 하여 국난 중에도 책임회피로 일관하는 부패한 정치권력 앞에 순수한 불심과 뜨거운 애국심으로 무장한 민초들의 피와 땀, 그리고 의지를 그야말로 감동스럽게 그려내고 있다. 위대한 예술품은 결코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온 몸으로 배우게 해주는 작품이다.
생명의 업을 인식한 한 인간이 스스로의 생명을 불살라 가며 한 가지 일에 몰두할 때 또 하나 새로운 신앙은 만들어지는 것이라 싶었다.(307p)
소설 첫줄을 쓰고, 28일 만에 끝줄을 썼다는 저자는 경판전을 지은 목수 근필처럼 혼을 담아 이 소설을 써낸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소설 속에 담긴 작가의 뜨겁고도 절실한 예술혼을 느끼다 보면 작가에게 있어 소설은
스스로의 생명을 불살라 쓰는 신앙이라는 것을 ,
그래서 그가 얼마나 위대한 작가인가를 우리는 저절로 깨닫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