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놀이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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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얼마 되지 않는 독서이력 중에서 가장 충격적으로 남아 있는 책중의 하나는 바로 조정래님의 시대를 초월한 영원한 고전 [태백산맥]이다.

단행본으로만 만나보던 소설이라는 장르를 10권에 이르는 대하소설로 만나본 처음의 느낌은 소설 속 세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작가의 문체는 생생하여 전라도 여자인 내게는 너무도 사실적으로 와 닿았기 때문이었을까.

전라도땅은 예로부터 민초들의 굴곡진 한과 아픔이 깊이 사무친 역사의 현장. 성장기에 이모저모 다양한 모습으로 접해 온 역사적 사실들은 소설 속 내용들과 많은 부분에서 흡사했기에 소설 속 인물들의 형상이 고대로 현실 속 사람들로 연결지어 졌던 것이다.

조정래님의 소설은 그 동안 대하소설로만 만나봤었고, [태백산맥] 이전에 「황토」「20년을 비가 내리는 땅」「한, 그 그늘의 자리」「유형의 땅」「어머니의 넋」 등 다섯권의 창작집과 장편소설「대장경」연작장편「불놀이」등을 집필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대하소설로 만나본 작가는 그것만으로도 이미 하나의 완성이었기에 굳이 그전의 작품들을 찾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좋은 기회가 있어 <불놀이>, <대장경>을 만나게 된 것이다.

 

조정래님의 작품세계야 말할 것도 없이 민족주의의 색채가 짙은 민중에 대한 신뢰와 기존 부패한 권력에 대한 비판, 그리고 예술적 완성을 향한 집념, 향토색 짙은 문체, 민초들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불놀이>는 네 편의 독립된 중편이면서, 전체적으로는 한 주제로 이어지는 장편의 독특한 형식을 지닌 작품으로서 영어, 독어, 불어로 번역되었고 현재는 중국어, 스웨덴어로도 번역되고 있다고 한다.

몇 년 전, 모 인터넷서점에서 조사한 설문에 의하면, '우리나라 작가중에서 노벨문학상 후보로 가장 적합한 작가'에 조정래님이 선정된 적이 있을 정도로 대한민국의 시대와 역사를 가로지는 저자의 문학세계는 시대를 아울러 독자들에게 가장 존경받고 사랑받는 위치에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82년에 인간 연습-인간의 문-인간의 계단-인간의 탑, 의 제목으로 각가 계간지에 발표하고, 이후 1983년 문예출판사에서 연작장편 단행본으로 출간하게 된다. 약 28년 전의 작품을 오늘에 만나봐도 전혀 녹슬었거나 낡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만큼 저자의 작가적 역량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새삼 부족한 글로 조정래님의 문체나 작품세계를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다만, <불놀이>가 있었기에 <태백산맥>을 우리가 만나볼 수 있었고, <태백산맥>이 존재함으로써 작가 조정래님의 오늘이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느날, 성공한 사업가 황복만에게 걸려온 전화 한 통은, 지금까지 30년 동안 이루어온 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놓는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바로 오래 전, 배점수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시절 그가 좌익의 이름으로 처단했던 지주계급의 아들이다. 그리고 깜쪽같이 숨겨왔던 과거를 남김없이 알고 있는 사람. 갖고 있던 재산의 반절이라도 다 주겠다는 황복만에게 그 자는 단지 황복만의 목숨만을 원한다."당신 너무 오래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소?"

 

황복만에게는 교수인 큰아들이 있는데, 이 아들에게도 괴전화는 걸려오고 괴전화의 주인공 신찬규는 실향민으로 알고 있던 황복만이 사실은 배점수라는 인물이며 아버지가 숨기고자 했던 과거의 고향 전라도를 방문해서 지난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라고 종용한다.

과거가 폭로될 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황복만과 황형민은 공포스러워 하지만, 결말은 의외의 모습으로 펼쳐진다.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인 신찬규는 한(억울하고 분하고 사무치고 서럽고 그립고 안타까운 감정들이 모아져 생긴 마음의 혹-저자의 너무도 적확한 표현)을 한으로 갚지 않고, 단지 전화기 너머 말없음으로 역사의 눈물을 이야기해 줄 뿐이다.

 

산다는 것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황교수의 모습을 통해 표현된다.

산다는 것, 그것은 무엇일까. 죽음 앞에 서게 되면 허망하고 공허하지 않은 삶이 그 어디 있는가. 그러나 산다는 것은 과정이지 결과는 아닌 것이다. 과정은 결과를 망각하고, 결과는 과정을 일깨울 수가 없다. 그래서 삶은 치열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159p)

 

<불놀이>를 통하여 우리의 삶이야말로 바로 진정 한바탕 펼쳐지는 불놀이라고 생각한 저자는 가진자와 빼앗긴자, 죽인자와 죽은자, 그 모두가 서로를 용서하고 품어안을 수 있는 열린 가슴만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들려주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대로 인정하고 한걸음 나아가서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화해의 장은 과연 3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인지. <불놀이>를 읽는 내내 그 내용이 낯설은 옛날 이야기쯤으로 다가오지 않고 현대적 의미의 단어로만 변환되어 아직도 생생한 현실감으로 다가왔다

 

 지난 봄에 우리학교에서 조정래선생님을 모시고 강연회를 가진 적이 있었다. 이름있는 작가분들의 강연이야 늘 있던 행사였지만, 그날 강연장은 유달리 그야말로 물샐틈 없이 학생들과 교직원들로 가득차 있어 작가에 대한 대중들의 존경과 애정을 가늠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울림있는 음성으로 나라와 민족에 대한 애정과 믿음을 보여주던 열기어린 작가의 모습은 이내 뜨거운 박수를 이끌어내었고, 이후 이어지던 Q&A시간 또한 강연 못지 않은 뜨거운 시간이었다.

마침 가지고 있던 [태백산맥] 1권을 들고서 학생들도 제치고 제일 처음으로 저자의 사인을 받던 시간, 날카로운 시선으로 이름을 묻던 저자의 모습에 온몸이 얼어붙었던 순간이 떠오른다. 마치 내 깊은 속을 들켜버린 듯한 느낌은 사무실로 돌아와서도 한동안 떠나질 않았던 기억이 난다. 동안 작품 외에는 그 무엇으로도 저자의 흔적을 만날 수 없었고, 작품이 말해주는 저자는 단순히 소설가로만 불리기에는 무엇인가 부족하다.

<불놀이>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아직 만나지 못한 저자의 책들이 남아 있음을 떠올린다.

그 중에서도 조정래님의 문학전집 1권인 [대장경]이 내 앞에 놓여 있다. 표지만 들여다 봐도 또 하나의 우주를 만날 것 같은 설렘이 온 몸을 감싼다. 할 수 있는 한 저자의 모든 책을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을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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