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 세계문학의 숲 3
토머스 드 퀸시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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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이라는 단어는 참 매혹적이다.

그 무엇인가에 중독되어 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 말라, 라는 말을 하고 싶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중독, 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것들은 대체적으로 그 결말이 그다지 좋지 못하다.

이를테면,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도박, 그리고 마약이라는 통칭으로 불리는 아편 등이 바로 그것이다.

담배나 커피는 중독이라는 단어로 수식되기도 하는 이는 기호식풍에 분류되기도 해 먼저 거론된 것들에 비해서 그 위험도가 낮다. 따라서 중독이 가지는 의미도 옅게 느껴진다.

우리는 많은 세월 동안 중독의 증상을 일으키는 위험한 것들에 대해서 학습받아왔다.

그러나, 인간의 유전자 안에는 분명코 일탈의 욕망도 같이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 지속적인 학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도박, 마약등은 맹위를 떨치고 있으니 말이다.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은 단숨에 "아편전쟁"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떠오르게 했다.

아편전쟁은 1840년 청나라 사람이 자기 나라에 아편을 싣고 들어온 영국의 상선을 습격한 데서 발단된 청과 영국과의 전쟁을 말함인데, 청나라가 아편수입을 억제하다가 영국과 충돌하게 되었고, 패하여 난징조약을 맺고 홍콩을 영국에 떼어 주게 되었던 전쟁이다.

아편전쟁이 발발했던 시기는 토머스 드 퀸시가 생존했던 시대로서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을 이해하는데 참고가 되어준다.

아편전쟁을 통해서도 짐작해볼 수 있듯이, 또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아편이라는 것아 지금의 시대가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던 거 같다. 아플때 상비약처럼 사용하는 것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책 속 곳곳에서 감지할 수 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후견인의 보호아래 성장하던 저자도 맨 처음 아편을 접하게 된 계기가 바로 극심한 치통을 다스리기 위해서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표지의 연기가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몽환적인 사진은 어디선가 본 듯,  매우 친숙하다. 선뜻 다가가기 힘든 두려움이 느껴지는 것은 그 사진이 의미하는 결과는 곧 파멸로 연결되는 것임을 연상하기 때문이다. 이런 자연스런 연상은 아마도 중국영화의 영향이 크지 않았나 싶다.

 

토머스 드 퀸스의 자전적인 에세이풍의 소설인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에서 저자는 자신의 삶 속에서 아편이라는 것이 어떤 작용을 했는지,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처음 단순히 치통때문에 아편을 복용하였으나, 이후 그의 삶은 온통 아편에 지배당한 중독의 삶이었다.

아편을 이용하였으나, 아편에 의지하게 되었고, 종래는 아편이 자기몸의 주인이 되어버린 아편중독자의 솔직한 고백은 이 책의 주인공이 아편중독자가 아니라 바로 아편 그 자체로 다가와 독자로 하여금 아편에 대한 새롭고도 간접적인 경험의 세계로 이끈다.

이 책은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공>의 영감이 되었으며, 누구나 알 만한 에드거 앨런 포, 보들레르, 고골 등 동시대 문인뿐만 아니라, 장 콕토, 보르헤스 같은 현대문학의 대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 문제적 작품이라고 하니, 한번쯤은 읽어볼 만한 책임에는 분명하다.

우리나라 연예인들에게 익숙한 마약들이 있다. 히로뽕, 대마초, 등은 심심하면 한번씩 유명한 뮤지션들의 이름과 함께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마약의 명칭이다. 한다, 하는 뮤지션들은 대마초나 히로뽕을 가까이 하지 않은 자가 없을 만큼 마약이라는 물질은 예술인들의 영감과 깊은 연관이 있는 거 같다.

예술의 세계에서는 마약이라는 것이 필요악인지도. 마약이 있음으로 우리는 그토록이나 아름다운 음악을 만날 수 있었고, 또 아편이 존재했었기에 낭만주의 문화의 절정인 문학작품들을 우리는 향유하는 것인지 모른다. 토머스 드 퀸스의 글이 낭만주의 문화의 미학적 추상화로, 혹은 영국 문화의 낭만적 트라우마로 불리기까지는 이런 이유들이 숨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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