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그림 수집가들 -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니 모으게 되더라
손영옥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일이다.

문화예술계에서 나름 인정받고 있는 후배가 메신저로 말을 걸어왔다.

미니홈피에 그림 몇 개를 걸어놓았으니 어떤 것이 좋은지 한번 봐달라는 요청이다.

말과 꽃과 페라리 자동차가 어우러진 신예작가의 그림 여럿이 걸려 있었는데, 무엇인가 모던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그런 세련된 화풍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 그림들은 내 취향은 아니었고 해서 그 중에서 가장 자연스런 그림을 선택했는데, 후배 왈,

고르신 그림이 가장 그림답지만, 훗날 돈이 될 그림은 페라리가 있는 그림이라는 설명을 곁들이며, 바로 그 그림을 구입했다고 한다. 근래 들어 가장 주목받고 있는 작가의 그림이기에 분명코 돈이 될 거라는 후배의 말을 경청하며, 혹시나 나도 하는 마음에 그림 가격을 물어 보니 당시의 내 주머니 사정으로는 생각도 못할 액수여서 마음을 접었었던 기억이 있다.

<조선의 그림 수집가들>에 소개되는 수장인들의 그 열정과 감식안에는 감히 미치지 못하지만, 나름 문화예술계 전반에 걸쳐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 지식이 비록 깊지 못하고 수박 겉 핥듯이 그렇게 스스로 자족하는 수준에 그치지만, 무엇인가에 심미안을 가진 자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할 수 있는 소양은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올 봄, <페기 구겐하임 자서전>을 통해 20세기 서양미술사의 전설적인 미술중독가에 대해서 알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한 권의 책으로 다 알 수는 없겠지만, 페기라는 한 여성이 어떻게 해서 미술이라는 분야에서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되었는지, 그가 이룬 업적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짝 들여다볼 수 있었던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그때는 몰랐었다. 우리 나라에도 서화수집가들이 있었다는 그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나는 지난 시대의 역작들은 분명코 누군가가 그것의 가치를 알고 소중히 간직하고 보존해 왔기에 오늘날까지 전해내려오게 된 것이 아니었겠는가.

저자는 지금으로부터 가장 그 추적이 용이한 조선시대의 그림 수집가들에 대해서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준다.

우선 서화 수장에 빠졌던 왕과 왕자들로 그 포문을 열고 있는데, 이 책이 아니어도 세종의 아들 안평대군이 시서화에 능하고 아꼈다는 사실 정도는 역사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비운의 왕자로만 알고 있었던 월산대군, 또한 서화 애호의 삶을 [풍월정집]에 남길 정도로 즐겼다 하니, 아마도 시대를 비껴간 자신의 삶을 위로하고자 서화속의 세상에 빠진 것이 아닌가 한다.

성종은 예술 후원가로서의 공에 주목할 필요가 있고, 그의 유전자는 아들 연산군에게도 전수되었으니, 비록 패륜적 행위와 폭정은 마땅히 지탄받아야 하나 궁중 미술의 발전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파격적인 스타일의 서화를 즐길 수 있게 제도적인 벽을 부순 것은 그의 공이라고 할 만하다.


퐁속화가 만개한 것은 18세기 후반 정조시대였다. 웃음과 해학을 추구한 정조의 화원화가였던 김홍도, 김득신, 조영석 등의 해학과 골계미를 갖춘 작품들이 탄생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왕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화원제도를 만들어 18세기 화단을 풍미했던 쟁쟁한 조선시대 화원들을 육성할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양반층에서도 미술품 수집가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탐욕과 자족의 기로에서 늘 시험받곤 했다.

과시적 컬렉션 문화를 꾸짖던 박지원, 벼슬 대신 예술품을 선택한 선비 김광수, 그림 수집에 탐닉하여 거지 신세가 되어 버린 이조묵, 그림의 투자가치를 알았던 시인 컬렉터 이병연, 조선의 매디치가 안동김씨 가문 등.

서양의 페기 구겐하임도 그렇고, 현대의 수집가들고 그러하지만 사실 그림수장가들은 막강한 재력이 뒷받침 되지 않고는 감히 생각하지도 못한 취미생활이다. 따라서, 왕족이나 권력과 재산을 가진 양반계층이 아니고서는 컬렉터로서의 호사를 누리기는 매우 어려울 터.

18세기부터 점점 신분제도의 경직성이 이완되고 중국으로부터 서양의 문물들이 유입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역관이나 의관의 직업을 가진 중인들의 역할이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중국 사행을 오가면서 약재 무역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었고, 이런 재력을 바탕으로 하여 한 시대를 풍미하는 수장가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석농 김광국은 영,정조시대의 의관으로서 네널란드 동판화에서부터 일본의 우키요에까지. 18세기 최고의 컬렉터로서 그 이름을 날렸다. 중국화, 서양화, 일본화 뿐 만 아니라 조선시대 유명화가의 그림까지 그의 영역은 매우 폭넓었다고 한다.

현재 영국이 보유하고 있는 [여사잠도권]이라는 중국화에 건륭황제와 함께 나란히 수장인을 찍은 안기에 대한 내용은 역사의 엄중함과 기록의 위대함을 알게 해준다. 이 외에도 중인그림을 좋아했던 라기, 민족주의적 컬렉터였던 오세창 등 각각의 매력적인 수집가로서의 한삶은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대단하면서도 마음을 숙연하게 하는 감흥을 준다. 

이렇듯, 한 시대를 풍미하고 시서화에 광인처럼 빠졌었던 수집가들에 대한 이야기는 비단 한 개인의 기록을 보는 재미도 있지만, 당시 문화예술을 즐기고 향유하면서 교류했던 시인묵객들의 모습들까지 함께 만날 수 있는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유명그림 한점이 집 한 채값이었던 조선시대, 위작도 판쳤던 조선시대, 그림만이 아니라 제발도 같이 볼 줄 알아야 했던 감식안의 세계, 그림 속 인장도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등 뒷부분에 담긴 '조선시대 그림 문화 속으로'는 상식으로 알아 두면 매우 유익할 내용으로 가득하다.

벗을 청해 차를 나누며 그림 완상을 함께 하던 조선의 집단문화가 오늘날에도 실현 가능하다면 종착지가 어딘지도 모른 채 한 줄로만 달려가는 현대인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잠시 숨을 골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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