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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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날의 날카로운 칼날을 넘어서기는 어렵나니,

그러므로 현자가 이르노니, 구원으로 가는 길 역시 어려우리라 - 카타 우파티샤드-

 

서머싯 몸의 장편소설<면도날>시작부분 맨 앞머리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구절을 가만히 음미해보면, 이 소설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민음사에서 세계문학전집 214권째로 서머싯 몸의 <면도날>을 선택했다.

작가의 또 다른 작품, <달과 6펜스>, <인간의 굴레에서>와 함께 서머싯 몸의 3대 장편소설의 하나에 속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인간의 굴레에서>는 11권, 12권으로 <달과 6펜스>는 38권으로 이미 출판되었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함에도 제목은 너무도 익숙한 위의 두권과는 달리, <면도날>은 이번에 처음 들어본 책이면서도 한편으로 소설의 제목으로서 단순명쾌한 것이 맘에 들었다.

'비정한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려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바치는 작품'이라는 설명도 이 책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그러나,내 손에 들어온 책의 두께라니..521페이지에 달하는 두께에 우선 기가 질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시작한 책읽기는 생각보다 수월했다.

작가가 소설속에서 화자가 되어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사람으로 직접 등장하고 있음으로써 소설에 대한 이해를 쉽게 해주고 있다. 몇 호흡 읽지도 않은 거 같은데, 페이지는 상당한 부분을 쑤욱~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별다른 사건의 발생도 없이 언뜻 평이한 진행으로 이어지는 소설은 그러나 마지막 장을 덮고 났을 때,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담백한 물의 맛처럼 조용히 스며드는 소설이 주는 여운은 이 소설이 지닌 저력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작가 몸은 우연한 기회에 프랑스 상류사회 사교계의 중심인물인 엘리엇을 알게 되고, 엘리엇의 전 생애속에서 벗으로 함께 하면서 그의 주변인물들과 교류하게 된다.

엘리엇은 유럽의 상류사회에서 미술품 중개인으로 시작하여 일원으로 인정받기까지 스스로 부단한 노력으로 그 자리를 누리게 된다. 적당히 속물근성과 상류사회 일원으로 요구되는 세련된 매너등을 갖춘 사람으로서 생의 마지막에는 백작의 옷을 수의로 입는 등, 말년에는 잠시 소외의 외로움을 겪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자신이 세운 기준안에서 만족한 일생을 완성한다. 사후에는 이사벨과 조카들, 그리고 일하는 사람에게까지 유산을 배분해주어 후덕한 이미지까지 획득하는 나름대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낸다. 

엘리엇의 조카인 이사벨은 매우 아름답고 건강한 외모한 세련되고 이지적인 성품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누리고자 하여, 어릴적부터 사랑한 래리와 약혼하였으나, 래리가 추구하는 삶이 그녀와 삶과 일치하지 못하자, 과감히 파혼하고 그녀가 원하는 것들을 충분히 채워주는 증권브로커 그레이와 결혼한다. 그레이는 남자는 반드시 일을 해야 한다는 사고의 소유자로 이사벨과 두 딸들에게 더할나위없이 좋은 남편이자 아빠이다. 아내의 옛연인에게도 너그러운 친구로서 주변인에게 호감을 주는 좋은 사람이다.

한편, 래리와는 어릴 적 시를 주고받는 소통하는 친구였지만 결혼후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를 잃고 너무도 순수했던 영혼은 타락의 길로 들어서버리고 만다. 훗날 래리와의 만남으로 그녀의 삶은 잠시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욕심많은 이사벨의 간교로 숨어버린 채, 어느날 살해당한 채 주검으로 발견된다.

가진것도 배운것도 없는 수잔, 그녀만이 가진 매력으로 몽마르뜨 거리의 화가들의 모델과 연인으로 삶을 채우다가 어엿한 사업가의 아내자리와 동시에 그에 걸맞는 화가로의 변신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몸이 가장 객관적으로 살펴보고 때로는 감정이입하기도 하는 로렌스 대럴.(래리)

어린 시절 부모를 일찍 잃고 후원자의 그늘 안에서 성장을 하다가 비행기조종사로서 세계제1차대전에 참전하게 되고, 자신을 구하다가 친구가 죽고 마는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이 경험은 이후의 래리의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 삶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래리, 과거의 현자들이 끊임없이 해온 질문이며, 또한 나름의 다양한 답이 나와있지만, 그것은 결국 답이 없는 관념적이고 무모한 길일 뿐이라는 이사벨의 말에도 불구하고 래리는 자신의 온 몸으로 질문하고 답을 얻고자 사랑하는 이사벨과 파혼하고 구원의 길위에 서게 된다. 세계 여러나라를 여행하면서 부랑자로서, 노동으로, 종교, 책속의 선인들의 말을 통해, 인도의 성자를 통해 깨달음을 구한다.

 

작가는 앨리엇, 그레이, 이사벨로 대변되는 평범한 삶이 갖고 있는 위대함을 잊지 않으면서, 그 위대함을 넘어서는 소피, 수잔에 이어 래리가 걸어가는 구도자의 고귀한 여정을 주목하고 있다.

 

몸은 실용적인 자본의 효용을 말하는 이사벨에게는 '인생을 최대한 쓸모있게 사는 것'만큼 실용적인 또 있을까, 라며 래리의 삶을 이해하지만, 래리의 행적에 끊임없는 회의어린 질문을 던짐으로써 이사벨의 삶을 옹호하기도 한다. 이러한 작가의 시선은 작가가 평생을 살아온 삶에 대한 성찰을 오롯히 <면도날>에 담아낸 것이라고 보여지며, 이 책이 작가의 말년에 쓰여진 것과 맥을 같이한다고 하겠다.

다양한 인간군상의 삶의 진정성을 긍정하는 작가의 모습을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었으며, 소설속 등장인물은 모두 다 작가를 이루는 한 부분이라고 생각되나, 유독 래리의 삶에 할애된 분향이 많은 것으로 볼 때, 래리가 추구하는 삶이 곧 작가가 지향하는 바를 대표하지 않았겠나 짐작해 본다. 

고전소설에 갖고 있는 장점 중에 하나인 시대를 관통하는 인간 삶의 보편성을 그리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때, 서머싯 몸이 그려내는 소설속 인물의 삶은 그에 가장 부합하는 모습이라고 생각된다.

이에 작가가 다른 작품에서 그려내는 다른 인간들의 삶 또한 너무너무 궁금해졌다.

 

엘리엇은 엘리엇답게 삶을 마감했기에 아름다웠다. 이사벨과 수잔  또한 각자의 욕망에 충실하고 긍정했기에 그 삶을 인정할 수 있다.

자, 그러면 이런 경우는 어떠한가. 엘리엇의 일상을 기꺼이 영위하면서 늘상 머리속으로는 혹은 타인에게는 래리의 삶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여지길 원하는 거 말이다. 이런 사람의 삶의 마지막장도 완성이 되는 것인지.

 

우리네 삶에 과연 답은 있는 것일까,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을 충실히 살아왔지만 나 또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여전히 갖고 있지 못한다. 이에 삶의 근원적인 물음을 구하는 소설류에 지속적인 관심을 두고 있다. 나보다 먼저 삶을 깊이 성찰하고 살아낸 지성인들의 숨결을 통해 지혜의 한조각이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희망에서다.  한때는 그 물음의 답에 근접했나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삶은 그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나 싶으면 그 모퉁이에 이제까지 만나지 못했던 새로운 모습을 다시 드러내곤 했다. 요즘 나는 오히려 두렵다. 내가 지금 나름대로 확신하고 내딛는 이 생의 마지막에 도달했을 때, 삶은 여전히 모호한 얼굴을 보여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요즈음의 나를 짓누르고 있는 두려움의 실체다.

더운 여름임에도 계절을 의식하지 않은 만큼 흡입력있는 <면도날>은 적당히 철학적인 주제와 군데군데 흥미로운 사건의 등장이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어 나의 고전소설에 대한 기대치를 한껏 높여 주었다.

책의 뒷부분에는 지금까지 발간된 세계문학전집 1권에서  214권까지의 리스트가 실려 있다. 무심코 그 중에서 내가 만난 책을 꼽아 보니 겨우 33권.

기회가 된다면 제1권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부터 차근차근 읽어봐야겠다는 야무진 계획을 조용히 세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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