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을 타라
조정은 지음 / 에세이스트사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생전 처음 들어보는 작가의 수필집이다. 제목이 주는 느낌이 예사롭지 않음에도 선뜻 집어들지 못한 것은 아마도 그 탓이 제일 크지 않았을까.

10여년 전에는 에세이스트사에서 출간되는 수필잡지도 정기적으로 구독했고, 나름 이름이 알려진 수필가의 책도 간간히 만나보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삶을 관조하는 듯한 필자의 인격의 격조를 드러내는 그런 수필이 더이상 매력적으로 가슴에 와 닿지를 않았다.

현재 두 어깨로 견뎌내고 있는 삶의  다채로운 공격은 그런 느낌의 수필로는 더이상 위로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점점 내게서 멀어진 수필.

그런 수필의 세상을 낯선 작가의 숨결로 오랜 만에 접하게 되고, 난 아주 큰 위안을 얻었다.

 

구도의 길을 포기하면서까지 서로를 원한 인연, 그리고 이룬 그들의 가정. 어느날 담배의 쓴 맛과 함께 찾아온'부도'의 무게. 저자는 비록 움막같은 집이지만, 사랑이 가득한 가정을 지키기 위하여 바람부는 세상속으로 아침이면 길을 나선다.

세상은 돈으로 사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산다는 친정어머니의 말을 깃발처럼 휘날리며 용감하게 뛰어들어간 세상은 저자에게 그리 호락호락하게 그 부드러운 속살을 보여주지 않았다.

 

에스컬레이터 청소부,,보석상 매니저 일로 가족의 생계를 꾸려내던 현실같지 않던 나날, 몽유병자처럼 꿈 속 세상을 부유하던 어느 날 그녀는 문득 내리는 눈송이를

보고 깨닫는다.

“그 작은 눈송이가 바람에 자기를 전부 내맡기는 것이 아니라 바람을 옹골차게 견디고 있는 것을.  그저 바람에 내맡긴다면 바람은 순식간에 눈송이를 가루로 부서뜨릴 것이었다. 내 몸은 저 무수한 눈송이 중에 한 송이 눈과 다르지 않다....... 그것을 타라.  성난 파도가 뱉어 내는 한 방울을 포말을 타듯이, 지축을 흔들며 용트림하는 폭포의 물줄기로부터 튀어 오르는 작은 물방울 하나를 잡아타듯이 그것을 타라, 타라, 타라, 타라. ” (49p)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뒷목을 세게 치는 느낌이다. 그것은 감동이자 깨달음이다. 아, 그렇구나.....<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같은 그녀다. 파도처럼 , 폭포처럼, 바람처럼 들이치는 삶의 무게에 결코 꺾이지 않고 내일의 태양을 굳게 믿는 그녀,

'겨울밤의 문풍지처럼 울어대는 고독의 비명에 가위눌리고 희망보다 발 빠른 절망이 포승줄을 던지며 따라와도' 여전히 꿈을 꾸는 그녀는 이제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이다.

 

<그것을 타라>는 여느 수필들과는 여러 부분에서 다르다. 마치 단편소설을 묶어 놓은 거 같기도 하고, 드라마의 줄거리를 풀어놓은 것 같기도 한 흥미로운 책이다.

저자는 평소에 수필이 12매의 한계에 묶여 있다는 것에 심한 불만이 있었다고 한다. 소설이 장편서사가 가능하다면 수필 또한 장편서사사 가능치 않겠느냐는 문제제기인 것이다. 또한, 기존의 수필이 주로 '말하기' 수필의 형태를 띠고 있다면 그녀의 수필은 '보여주기'수필의 전형을 말해주면서 이 수필집을 통해 연작으로 장편수필 쓰기를 시도하고 있다. <그것을 타라>에는 그녀의 개인적인 삶을 연작식으로 풀어내고도 있지만, 다양하고 개성있는 등장인물을 등장시키고, 또 그들의 갈등구조를 만들어내면서 생동감 넘치는 스토리 전개로 수필의 진화를 꾀하고 있다. 그만큼 수필이라는 문학장르에 대한 그녀의 사랑과 자부심을 짐작하게 하며, 또한 그녀가 현재 에세이스트사의 편집장이라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저자는 우람하게 자라 하늘을 가득 안고 햇살을 온 몸으로 받고 있는 큰나무만 의미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부드러운 바람, 따스한 햇살, 새들의 지저귐, 영롱한 아침이슬이 주는 환희는 큰나무의 그늘아래서 낮게 자라는 작은 나무나 풀꽃들에게도 똑같이 주어지는 축복이라고. 넘쳐나는 활자의 풍요속에 문자로 만들어진 문학이라는 분야, 그 안에서도 맘가는대로 쓰는 수필이라는 장르는 어쩌면  자신이 쓴다는 것에 행복을 느끼고 그 의미를 갖는다면 그뿐이라고 말한다. "왜 모든 애벌레는 나비가 되어야 하냐?"는 아들의 질문에 대한 답일지도 모른다. 

 

여고시절 읽었던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서>에 나오는 글귀가 자꾸 떠올라 옮겨 본다.

"고통의 바로 한가운데에는 아무리 심한 고통도 와닿지 않는 피안지대가 있다. 그리고 그곳엔 일종의 기쁨이 자리잡고 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아프고도 기뻤다. 그리고 행복했다. 여러 대목에서 자꾸만 눈물이 터졌다. 결국 내가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자기가 가고 싶어하는 길로 간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진정 강한 사람(여성)은 그 불행에 맞서 자신에게 솔직하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결단력 있게 행동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책날개에 나와 있는 사진 속 저자의 옆모습이 참 곱다. 여린 얼굴선을 훑다가 몇오라기 보이는 흰머리카락에 시선이 잠시 머문다. 훈장같다

오래전 그녀와 같은 고통으로 삶의 나락에 떨어졌었던 기억. 그 기억속의 '나'를 이 책을 통해 치유한다. 더불어 그녀와 나, 우리의 삶에  '일종의 기쁨'이 끝까지 함께 하길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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